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9화
감춰진 진실과 드러난 사실 (4)
“허어.”
감탄사와 함께, 분명 어디에나 있을 법했던 평범한 얼굴의 형태가 일렁이면서 사라졌다.
그 뒤로 나타난 것은, 긴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려 놓은 낯짝이었다.
“아티팩트를 통해 완벽하게 은신했거늘…… 대체 어떻게 알아차리셨습니까?”
수행원의 볼품없는 의상으로도 감출 수 없는 짙은 향기.
잘 포장된 존댓말과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자상은, 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는군요.”
음식을 나르던 시녀들은 어느새 뒷걸음질로 물러나 대화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이동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이를 확인한 4황자, 라이덴 델 카롯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정체를 완벽하게 꿰뚫어 본 그 방법이 궁금해서 물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식어 버린 분위기 속에서, 4황자와 눈이 마주했다.
그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허무뿐이었다.
“여유롭고 패도적인 발걸음. 안정적인 호흡. 그럼에도 시종일관 방관자임을 관철하던 태도.”
“…….”
“설명으로 부족하다고 말씀하시진 않으시겠지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그에 어울리는 행실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4황자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단순히 수상함을 느꼈다면 모를까, 고작 그런 것을 통해서 정체를 간파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초면인 데다 대외적인 활동조차 하지 않는 4황자인 저의 정체를?”
얕은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건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한 점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렇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숨어 있던 것에 대한 사과일까? 아니면 정보를 캐내려던 무례에 대한 사과일까?
어찌 되었든 황자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에슐라 백작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백작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1왕자 전하. 결코 나쁜 의도로 정체를 숨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관없다. 이렇게 밝혀진 이상,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겠지.”
애당초 회담 자리에서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언제 밝히려나,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훗날 연방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에스테반으로 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
그리고 그 이유는 나와 관련된 것이었다.
“백작. 여기에선 제가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편하신 대로 하시옵소서.”
백작이 깍듯한 예로 수행원 차림의 남자를 대한다.
그 모습이 우스워 쳐다보고 있으려니, 4황자의 질문이 곧장 들어왔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받아 갈 수 있었음에도 갈데르드 평야를 콕 집어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그 말에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또한 이미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앞선 회담에서 이야기했던 구실이기도 했다.
물론 그 누구도 받아들일 리 없는 핑계에 불과했고.
“제가 보기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밖에는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예시로 들자면…… 그렇군요. 이번 내란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정보력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했다거나…….”
“너무 비약적인 이야기 같습니다.”
“가정 정도는 누구든지 부풀려서 말할 수 있지요.”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당초의 목적은 어디 가고, 떠보는 자와 감추려는 자가 뒤바뀌었으니.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모든 실마리를 쥐고 있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여유롭게 식기를 집어 들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
“뭔가 달라진 게 있을지요.”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 반쪽짜리 얼굴을 바라보고 마주 웃어 준다.
가면 속에 숨은 얼굴은 웃고 있지 않겠지.
결국 이 싸움에서의 승자는,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4황자가 될 순 없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재미있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정보 말입니까?”
“예. 깜짝 선물을 준비해 주신 답례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투로 시작된 가벼운 대화였으나, 결코 그 내용만큼은 가벼이 여기지 못하도록.
“야만족이 제국의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4황자의 웃는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드러났다.
* * *
몰래 온 손님이라는 핑계로 파티의 참석을 거부한 4황자는, 파티의 준비로 분주한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계략을 전부 파훼함으로써, 이역만리의 타국으로 친히 행차하게 했던 1왕자의 탓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가 조찬의 마지막에 건넸던 말이 모든 고민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었다.
-야만족이 제국의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는 4황자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들이 제국을 노린다는 말입니까?
-결전은 다가올 여름이 되겠군요. 놈들은 이미 제국의 턱 끝까지 도달해 있습니다.
신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10년…… 아니, 그보다 더 길게 100년이라는 세월을 되돌려 보아도, 야만족이 제국을 넘본 일은 없었다.
또한 에스테반을 노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당장 그럴 낌새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하지만 1왕자는 응당 자신의 말이 옳다 하듯, 충고를 잊지 않았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야만족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 보십시오. 물론 그때에는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
-대비는 이 정보를 들은 4황자 전하의 몫입니다.
“……실없는 이야기군.”
4황자는 느긋한 몸짓으로 연초를 꺼내 물고는, 폐부 깊은 곳까지 담배 연기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가슴속에 남은 미련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정체를 파악한 것은 답지 않게 놀랐으나, 결국 이 또한 정보의 영역이었다.
자신이 황궁에서 사라졌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았다면, 수행원의 목록을 비교하여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1왕자에 대한 일말의 관심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면, 그 자신감은 대체 뭐지?’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는 의문들.
대체 어떻게 자신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일까?
고작 땅덩어리 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이 사태를 무마시킨 이유는?
그리고 마지막에 되어서야 이런 사실을 알려 준 이유는?
‘……정말로 제국이 파악하지 못한 정보력이 있단 말인가?’
오전의 일을 회상하던 라이덴 델 카롯트의 관심사는 결국 1왕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영문도 모를 정도의 집착이었다.
그때였다.
스륵-
4황자의 뒤에서 그림자가 일더니,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4황자 역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라이덴 전하. 본국과의 연락으로 말씀해 주신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 들어 보겠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복면의 남자가, 귓가에 입을 대었다.
“현재로서는 전쟁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
“놈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 첩보원을 파견했으니 곧 전하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군요.”
역시 그랬군.
1왕자는 단순히 허세를 부림으로써 나를 뒤흔들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추궁하듯 물어 온 그 상황을 여유 있게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복면의 남자에게서 보고가 이어졌다.
“그와는 별개로 최근 북부 국경지대에서 이상한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식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지라…….”
“말씀해 보십시오.”
“예. 그것이…….”
그렇게 1왕자의 갑작스러운 폭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낯선 방향으로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가 원하는 방향 대로였다.
* * *
쿵!
책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휘날리며 집무실을 가득 메운다.
최소 십 년 동안은 쌓여 있었을 먼지들이다.
조지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재빨리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도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지금부터 네놈이 머릿속으로 넣어 둬야 할 것들이다.”
방금 꺼낸 온 것은, 왕실 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전략 전술에 관한 서적들이었다.
먼지를 닦아 내고 책의 제목을 확인한 조지의 얼굴에 기가 찬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요즘 보좌관은 전략 전술도 익힌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럼 사실은 제가 참모로 온 겁니까?”
“그럴 리가.”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내젓는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저는 살면서 이런 것을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지금부터 하면 되겠군.”
“…….”
표정 안 풀어?
무감정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그제야 녀석이 꾸물거리며 책에 쌓인 먼지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흐트러짐 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늦어도 한 달 이내로 문장 하나하나까지 전부 외워 오도록.”
“그럼 저녁에 있을 파티는 어떻게 합니까?”
“보내 주지. 몇 시간 내로 모두 외워 온다면 말이야.”
조지의 표정이 곧 죽을 놈처럼 울상이 되었다.
당장은 녀석에게서 뛰어난 전략 전술의 운용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략 전술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닥쳐올 전쟁을 기다리는 것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정세를 살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당장 네놈에게 참모의 역할을 도맡아 하라고 하진 않겠다. 하지만 간단한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는 올라와 줘야겠다.”
이미 정해진 보좌관의 미래.
조지는 한숨을 푹 내쉬고 다가올 운명에 타협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의 표정이 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분량을 한 달 안에 외우는 것은 무리인데요…….”
“그 부분은 알아서 하라.”
“예, 예.”
녀석은 이젠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펼쳐 들었다.
이내 첫 페이지에 빼곡하게 새겨진 글귀들을 향연을 보며 억! 하고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파티의 안내장을 훑어보았다.
그 순간, 조지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왕자 전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음.”
“굳이 지금 같은 시기에 전쟁을 대비해야 합니까?”
녀석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윽고 내 시선을 눈치챈 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어차피 연방제국 놈들은 야만족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렇다면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놈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비하시는 겁니까?”
반드시 전쟁이 날 거라는 확신.
녀석의 말은, 그런 것이 있었다면 굳이 지금부터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냐는 뜻이었다.
그것도 한 달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주면서까지 급하게 말이다.
조지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연방제국 놈들과 맞붙기 위해서가 아니다.”
4황자에게 제공한 정보.
아마도 사실의 확인을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제국에 드리우는 전운의 기운을 깨닫고 있겠지.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지.’
나는 아직까지 의문점이 풀리지 않은 조지를 뒤로하고 대륙 전도에 다가갔다.
애초에 야만족이 제국을 넘볼 수 있을 만큼의 저력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바로 전에도 야만족의 땅과 맞닿은 여러 국가를 제쳐두고 에스테반으로 기어들어 오지 않았는가?
그런 실정 속에서 놈들이 제국을 노리고 있다, 자신감 있게 말한 이유.
거기에는 야만족의 땅에서 일어난 끔찍한 기근이 있었다.
그해 유난히 추웠던 야만족의 땅.
몰아치는 칼바람은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얼어 죽게 만들었으며, 심각한 기근으로 인한 식인이 번번이 일어났다.
야만족들은 먹고 살 식량을 위해 점차 남쪽으로 발길을 들였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근접한 국가들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직격타를 맞은 곳이, 바로 대륙 최대의 곡류 생산지이자, 먹을거리가 풍족하기로 잘 알려진 연방제국.
그 경우가 심했을 때는, 국지전 수준의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유일하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이 사실을 놈들에게 알려 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유유히 자리로 돌아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다가올 진실 사이에 한 줌의 거짓을 교묘히 숨겨 두는 것.
식량자원이 야만족의 땅으로 급격히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요사이, 남하하는 야만족과의 충돌이 잦아졌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되었을 테고.
그런 와중에 내가 내밀은 정보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되어 놈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대관절,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는 조지의 질문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그저, 지금까지 했던 대로만 움직이면 될 뿐이다.
이미 계획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