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0화
다가오는 전운 (1)
남자가 앉은 자리는 그 어떤 장소보다 오만하고, 권위적이었다.
그리고 그 함축적인 두 단어는, 저 남자를 표현하는 데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베르레토 윌리엄.
에스테반의 유일한 공작가(家)를 이끄는 가주이자, 2왕자의 어미인 사라 왕비를 배출해 낸 수완가였다.
또한 국왕의 친우인 아수스가 죽고 없어진 지금에는, 명실상부한 귀족들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남자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차고 넘쳤다.
“갈데르드 평야라…….”
공작의 중후한 목소리가 방 안으로 나지막이 울렸다.
그의 충실한 수하들은, 그 목소리가 기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그다음에 나온 말에서, 그 진의를 찾아볼 수 있었다.
“암살 시도가 실패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나쁘지 않은 상황인 것은 틀림없군.”
1왕자의 제안으로 에스테반은 갈데르드 평야를 되돌려 받았다.
그 땅이 쓸모가 있었다면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겠으나, 이번 일은 1왕자를 따르던 이들조차도 의아해할 정도로 독단적이고, 또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2왕자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들이 활동하기에도 최적의 시기가 다가왔다.
“반응은 어떻지?”
공작의 눈길이 닿자, 발몽스 백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역시나 부정적인 반응들입니다. 물밑에서 천천히 여론을 확산시키는 중입니다.”
“잘하고 있군.”
제아무리 국왕의 재가가 있었다지만, 결국 이번 일은 귀족들과의 상의도 없이 벌어진 협의였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무르고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일부러 꾸밀 필요조차 없는 여론의 변화였다.
공작이 웃었다.
“이번 일은 1왕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또한 여론의 압박으로 재협상이 결정된다면, 능력을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라, 연방제국을 상대로 외교적인 결례를 저질렀다는 낙인마저 찍히게 된다.
남자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리더십을 보이는 데에 급급하여, 뒷수습조차 생각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구나.”
귀족들을 휘어잡고 있던 아수스를 쳐낸 순간부터, 놈은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덕분에 지지층이 견고했던 1왕자의 세력이 흔들린 것은 물론이고, 이렇듯 실책을 연발하여 자신들이 물밑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툭-
윌리엄 공작의 손에 들려 있던 설탕이, 커피잔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음 행보가, 놈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놈의 노력은 덧없었다.
유약하고 아둔한 주제에, 제 앞길조차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예비 지도자에게는. 이런 비참한 퇴장만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신중하게 행동하는 이는 분명 존재했다.
“각하.”
“뭐지?”
“만약 갈데르드 평야를 받은 것에, 저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면…….”
무언가 자신들이 모르는 ‘정보’라는 것.
조심스럽게 꺼내어진 발몽스 백작의 의구심은 합당했다.
사절단이 돌아간 뒤로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난 시점이건만, 공사의 구분이 확실한 국왕마저 이 이야기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런 발몽스 백작의 신중함에, 공작은 단언했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이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 연방제국이 그리도 손쉽게 평야를 내놓지는 않았겠지.”
또한. 그러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에스테반의 왕가가 직접 움직였다면, 연방제국의 귀에 닿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이건 2왕자의 외할아버지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공작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렇지 않겠느냐?”
“…….”
장막처럼 감추어진 어둠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풍 넘치고 우아한 몸짓. 그럼에도 본연의 성격을 잘 나타내듯, 일말의 망설임 없는 발걸음.
그 남자에게서 보이는 인상은, 바람이었다.
“너는 약속대로, 1왕자의 세력을 와해시키고 왕좌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공작의 눈이 욕망으로 번뜩였다.
“알베도 에스테반.”
* * *
사절단이 돌아간 뒤로 흐른 한 달이라는 시간. 요 근래는 치밀하게 맞물린 수련의 반복이었다.
눈을 뜨면 수련장으로 나와 검술을 연마했고, 이후 쉴 여유도 없이 몸을 단련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그 결과. 나는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오러를 다루는 데에 조금 더 익숙해졌다.
……정확하게는, 과거의 경험을 신체가 뒤늦게 익혀 내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럼에도 아직까지 경지에 맞지 않는 몸이다.
우우우우웅-
손에 든 검에서 2미터를 상회하는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전개되었다.
처음 흑마법의 기운을 흡수했을 때보다도 월등히 짙은 오러의 밀도.
나는 자세를 다잡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허수아비.
“흡!’
폭풍 속의 벼락처럼 쏘아진 검이 정확하게 허수아비의 허리춤을 갈라 버렸다.
촤악!
내질러진 검을 천천히 칼집으로 회수하고 허수아비를 주시한다.
허수아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허수아비가 조각조각 분해되며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찢기다시피 조각난 허수아비는 맹수의 공격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처참한 형태로 변했다.
단 일격에 세 번의 오러를 방출시킨 결과였다.
물론, 이 또한 신체에 맞지 않는 무리한 움직임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경지는 과거를 쫓고 있지만, 여전히 한심한 몸이군.”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지금의 내 몸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화가의 붓질을 기다리는 순백의 도화지처럼. 과거의 모습은 물론이고,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 또한 그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몸이 완성되는 순간이 회귀 전의 나를 뛰어넘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몸의 완성이라는 건가.”
나는 오른팔의 문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하는 작업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가만히 놔두어도 착실히 흡수하고 동기화해 나갈 테지만, 인위적으로 그 속도를 조절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바로 이렇듯.
파아앗!
몸속에 잠자고 있던 오러가 전신에 어우러지며 신체 능력이 급격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법 각인의 통로를 따라 오른팔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전신으로 퍼져 나가던 오러가 축척된 마력과 만나 폭발적인 신체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큭!”
신체의 활성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과부하를 느낀 오러가 활동을 중단하고 회수되기 시작한 탓이다.
이식된 마법 각인을 고의로 자극시키는 일이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후우.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기운을 잠잠하게 만들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느껴지는 기운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마법 각인에 흡수되는 마나의 양이 미약하게나마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전신에는 마비가 온 듯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폭주하기 직전인 마력을 잠재우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3초 언저리인가.”
처음 각인을 자극시켰을 때에는 1초도 넘기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버텨 주는 신체의 능력이 그만큼 올라오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자극을 통해 되돌아오는 리턴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슬슬 첫 번째 임계점을 넘을 시점이군.”
오른팔의 문신 위로 짙은 은빛의 마나가 일렁였다.
정확히 예상대로였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마법 각인의 기능이 해방되기 시작하겠지.
이 또한 모든 지식을 알고 있었기에, 회귀 전을 통틀어서도 기형적인 동기화 진행 속도인 것은 분명했다.
“전하.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수련장까지 찾아온 비도르 남작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쓰러진 허수아비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수련장을 나섰다.
어느덧 잠들었던 태양이 어둠을 집어삼켰고, 외부는 하루를 준비하는 사용인들로 북적였다.
목적지는 평소와 같은 1왕자의 집무실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 * *
웅성웅성-
국무회의를 위해 모인 자리였건만, 귀족들이 토로하고 있는 것은 정작 불안감이었다.
자기 안위만을 계산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
혹은, 에스테반의 발등에 떨어질 불씨를 우려하는 순수한 걱정.
뭐가 되었든, 그 까닭이 이틀 전 연방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소식 때문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전쟁이라니…… 에스테반에도 피해가 오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가시적으로 드러난 야만족들의 움직임.
연방제국의 황제는 남하하는 야만족들을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군대를 일으켜 세웠고, 마침내 야만족과 제국의 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그제 새벽에 벌어진 소동이었다.
“야만족들이 드디어 미친 모양입니다.”
“이제 북부 국경지대에도 야만족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허어!”
그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하듯, 실제로 북부에 적을 둔 귀족들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덕분에 국무회의는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바싹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옆자리에 서 있던 비도르 남작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제국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겠지.”
전쟁이라는 이름이 주는 섬뜩한 울림.
에스테반에는 꽤 익숙한 긴장감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규모가 광대했던 일은 손에 꼽을 일이었다.
나는 한시도 진정하지 못하는 북부의 귀족들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얄팍한 재물이라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재미있지 않은가?”
“예?”
“제 손으로 지켜 내지도 못할망정, 발만 동동 굴리는 꼴이라니.”
“……헉!”
그러자, 내 폭언에 자못 당황한 비도르 남작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전하! 그래도 저들은 야만족으로부터 에스테반을 지켜 온 북부의 귀족들이 아닙니까.”
“아니. 놈들이 진정 조국을 지키고자 했다면, 작금의 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에라도 영지로 뛰어가 병력을 정비했을 것이다.”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남작의 시선이 다시 한번 주위를 훑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위치한 북부의 귀족들은, 야만족의 움직임이 확인되자마자 수도로 달려온 이들이었다.
북부 국경지대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변경백이, 제 손자를 대신 보내며 스스로 혼란 진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작 남은 것은 에스테반을 지킨다며 알량한 허세를 끼고 다니던 이들 밖에는 없던 것이다.
나는 남작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날짐승도 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지.”
하물며 한낱 미물조차도 제집을 지키기 위해 포식자와 얼굴을 맞댄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잘 보아 두어라.”
그리 말하는 시선이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어느 북부의 귀족에게 향했다.
그다음으로 시선이 머문 곳은, 안보가 위협받는 와중에도 아첨을 일삼는 기회주의자의 무리였다.
조금의 위협조차도 감히 맞설 기개 없이.
단지 기회만 된다면 제 영지의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갈 위인들.
그렇게 연방제국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곧장 조국을 배신하고 놈들의 편에 붙었지.
“저들은 그저, 금수만도 못한 의지를 가진 쓰레기다.”
“…….”
“온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갑자기 무엇이 온다는 걸까?
그렇게 당혹과 의아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비도르 남작이, 이윽고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뭇 기사들의 이정표이자 에스테반 왕국을 이끄시는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