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1화
다가오는 전운 (2)
“흐음!”
시종의 안내와 함께 대전의 문을 열고 아버님이 나타나셨다.
덕분에 한참 무거워지던 대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진정되었지만, 아무래도 어수선하던 장내의 흐름까지는 감출 수 없었는지,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
“험험!”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어수선함은, 아버님이 왕좌에 오르신 뒤에야 비로소 흩어졌다.
아버님은 곧 본론을 꺼내 국무회의 시작을 알리셨다.
“얼마 전 들어온 소식은 그대들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알다마다.
귀족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버님도 그 모습을 확인하시고는 고개를 따라 끄덕이셨다.
“연방제국이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야만족들은 제국의 땅으로 집결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에스테반도 결코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 시각에도, 야만족들은 남하를 감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방제국에서 시선을 끌어 준다 한들, 전투를 피해 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찌 풀어 나가면 좋을지, 마땅한 생각이 있는 자가 있나?”
“소인이 먼저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누구보다 당당하게 손을 들어 올린 것은, 북부의 변경백을 대신하여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젊은 귀족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던 아버님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로메르트 변경백의 손자로군.”
“그렇습니다.”
“좋다. 먼저 말해 보도록.”
아버님의 허가가 떨어지자, 변경백의 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지대에서 확인된 것만 해도 최소 수천의 야만족입니다. 이 기세대로라면, 정말로 야만족들이 국경지대를 유린할 것입니다.”
“……음.”
“로메르트 영지가 앞장서고 있지만, 북부 귀족들의 무력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부디 국왕 전하의 명으로 병력을 일으켜 북부를 지원해 주십시오.”
병력을 일으키라고?
아버님이 눈썹을 약간 들어 올리시고는 말씀하셨다.
“남부의 병력을 움직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저번처럼 왕실의 병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북부의 상황은…….”
“그건 불가능합니다!”
재빠르게 말을 끊고 앞으로 나선 것은 남부의 어느 귀족이었다.
그는 입술을 꿈틀거리면서 변경백의 손자를 비웃고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평소와 같은 야만족들의 습격이지 않소. 어째서 겨우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것이오?”
“이번 일은 그렇게 넘길 수 있는 사태가 아닙니다.”
“이번 일? 북부의 귀족들은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상비군을 조직할 수 있도록, 세율을 포함한 여러 의무에서 이점을 챙긴 것으로 알고 있었소만?”
장내의 시선이 집중되자, 어깨를 으쓱하던 남부 귀족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쪽은 가뜩이나 북부에서 줄어든 세율을 부담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인데, 야만족을 막는 것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오?”
“…….”
로메르트 변경백의 손자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일국의 중대사를 두고 손익을 따진단 말인가?
하지만 남부의 귀족은 여전히 여유로운 음성으로 북부의 상황을 직시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이득은 이득대로 챙기고, 실은 나누겠다는 뜻이 아니오? 그야말로 교활한 잣대라는 느낌이 드는구려.”
“뭣이……!”
“듣자 듣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남과 북의 세력으로 갈린 귀족들이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엄중한 분위기로 진행돼야 마땅한 국무회의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하던가?
사실 남북이 나뉘어 서로에게 적대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종종 있어 온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들이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도 잊을 만큼 과격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참혹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노골적으로 의도된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심하군.”
“저, 전하!”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 소란을 뚫고 귀족들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당황한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내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나는 시리도록 찬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설 뿐이었다.
“조국이 위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꼴이라니.”
“…….”
“누가 보면 이곳이 제 놀이터인 줄 알겠군.”
“마, 말씀이 너무…….”
“입 닥쳐.”
내 서늘한 시선이 정확히 남부 귀족을 꿰뚫었다.
그러자…….
“컥, 커억……!”
숨도 쉬지 못할 만큼의 강한 살기가 놈의 목을 옥죄였고, 곧 실신할 듯 눈을 까뒤집으며 자리에 엎어졌다.
귀족들은 돌연 엎어진 귀족을 황망한 얼굴로 쳐다보면서도, 이유 모를 한기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귀족들이 정렬한 자리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어느 나라의 귀족이지?”
“…….”
“자네는?”
내 손가락이 향한 곳에 서 있던 어느 귀족이, 몸을 흠칫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에스테반의 귀족입니다.”
“호오?”
필시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으며 놈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 힘을 더하지도 못할망정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일부러 내란을 조장하는 것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군.”
나는 시선을 회피하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았고, 마침내 그 시선이 살가죽을 꿈틀거리는 발몽스 백작에게 닿았다.
그래, 마치…….
내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꼭 누군가가 그리되도록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겨, 결단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
나는 그 답을 끝으로 몸을 돌려 자리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장내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있는 것은 1왕자인 나였다.
“아직까지도 편을 가르고 밥그릇을 지키고자 하는 귀족이 있다면, 감히 왕가의 뜻을 배반하려는 자가 있다고 간주해 주지.”
“……크흠!”
“이의는 없나 보군.”
그러고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사태가 잠잠해지길 기다리신 아버님께 목례했다.
잠시 후.
어느새 엄숙한 분위기로 뒤바뀐 대전 위로, 아버님의 점잖은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병력을 차출하겠다.”
더할 나위 없이 옳은 판단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야만족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말했던 대로 북부의 병력만으로는 저들을 막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문제점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하. 소인이 한 말씀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로메르트 변경백의 손자였다.
아버님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셨고, 이어서 변경백의 손자가 말했다.
“지금의 북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야만족 전사들은 조금의 틈만 있다면 무기를 들고 성벽을 기어 올 것처럼 공격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고, 이에 맞서는 병력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지금의 실정입니다.”
“그 말은 병력을 차출하더라도,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인가?”
아직 여린 티가 남아 있는 변경백의 손자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습격은 그 궤를 달리하니, 이전처럼 일시적으로 방어선을 물리는 것은 오히려 성벽이라는 이점을 포기하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버티기 위해 물러서는 것조차 위협을 받는다.
회귀 전에 있었던 야만족의 남하에서는, 성 세 개를 내줘야 했을 만큼 처절한 상황이 이어졌었지.
만약 이번에 연방제국이 시선을 끌어 주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한 공세를 직접 받아 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님의 고개는 굳게 내저으셨다.
“방어선은 물리지 않는다.”
“국왕 전하!”
“놈들이 이 땅을 짓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패배를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고.”
반드시 그리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아버님의 결연한 눈빛이 곧 나를 향했다.
“국경지대 수비를 도울 이들이 이미 북부에 다다랐다.”
“예?”
“그들이라면,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버텨 줄 수 있을 터다.”
“……그들이라고 하신다면.”
쏟아지는 의문 속에서 아버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태양기사단이 북부를 도울 것이다.”
“태, 태양기사단!”
귀족들은 들려온 이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왕국의 최정예 기사들만을 모아 둔 왕실 직할 제2 기사단.
그 영광스런 이름에 걸맞게, 전원이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유저들이라는 경악스러운 전력을 보유한. 그야말로 북부 대륙의 대표적인 기사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두 제국과 맞닿은 국경선을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까?”
북부 야만족의 땅이 위협적인 것은 분명하나, 신성제국과 연방제국에 맞닿은 땅보다 중요한 곳은 없었다.
그렇기에, 태양기사단의 주 활동 범위는 에스테반의 남동부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태양기사단이 북부에 다다랐다는 소리는…….
“설마 야만족의 침공을 예상하시고……!”
“오오!”
귀족들의 감탄스런 시선이 아버님에게로 쏠렸다.
놈들의 움직임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불과 며칠 전이다.
말인즉, 국왕은 이 모든 사태를 예견하고 미리 태양기사단을 움직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아버님은 이에 긍정하시면서도 고개를 내저으셨다.
“침공을 예상한 것은 맞지만, 그건 짐이 한 일이 아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보를 제공한 이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다.”
귀족들의 표정에 또다시 의문이 서렸다.
그 순간.
처음부터 쭉 내게 닿아 있던 아버님의 시선이, 흐뭇하면서도 따스하게 바뀌었다.
“알렌 에스테반. 네 공적을 내게 설명하게 할 참이더냐?”
“헉!”
“무슨……!”
나는 다시 한번. 귀족들과 시선이 마주했고,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제가 태양기사단을 북쪽으로 안배했다 한들, 그건 모든 지시를 허락하신 국왕 전하의 의지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야만족들이 침공할 것이라는 네 판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 대비도 없이 놈들을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경악하고 있던 귀족들의 앞으로 나섰다.
물론 그 시선은 아버님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상태였다.
“태양기사단의 전원이 북부로 향한 지금. 이는 왕국의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
“그리하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아버님은 내 질문에 당황하시면서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시고는 말씀하셨다.
“야만족들의 공세를 무너뜨린 뒤,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다음 습격에 대한 대비를 마쳐야겠지.”
“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물러난다 한들 놈들은 지금껏 그래 왔듯 에스테반을 노릴 테고, 이는 10년. 혹은 20년이 지나도록 그 흐름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회귀 전의, 그리고 지금까지의 에스테반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님의 표정이 단박에 이상함을 감지하신 듯 찡그려졌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이번 연방제국과의 전쟁을 이용해야 합니다.”
“……전쟁을 이용한다?”
놈들이 굶주리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었고, 안이한 움직임은 곧 눈덩이처럼 에스테반을 덮치게 되겠지.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내 본심을 털어놓았다.
“저를 북부로 보내 주십시오. 제 손으로 야만족들의 기세를 꺾겠습니다.”
아버님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셨다.
“지금…… 무슨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