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3화
도망자들 (1)
어느덧 완연한 여름이 찾아온 어느 날, 야만족의 땅에는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7월의 중순만 아니었다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오지를 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누그러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젠장! 나는 배가 고프다고!”
검은 가죽 갑옷의 사내가 외친 말은, 모두의 공감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최근 들어 더욱 척박해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는, 이전과 같이 식량을 발견하는 것조차도 매우 고된 일이 되어 버렸으므로…….
하물며, 일족의 지배자인 ‘칸’의 명령으로 그런 야만족의 땅에 남게 되어 버린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마음에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어찌 보면 자신들이 하루가 멀다고 배를 굶주리는 이유도 그 탓일지도 몰랐다.
남아 있던 일말의 식량까지도 연방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모조리 징발해 갔으니까.
“남동쪽으로 간 놈들은 지금쯤 배불리 먹고 있을 텐데…….”
“크흐흐. 확실히, 약탈하기에는 비옥한 땅이 최고지.”
“제길! 칸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콰직!
말라비틀어진 풀떼기를 발로 짓밟은 검은 가죽 갑옷의 사내가, 신경질을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먹고, 죽이고, 빼앗는다. 그것이 자신들의 즐거움이자 신조다.
그렇기에 전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따분한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위치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 좋지. 하지만 우리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적어도 칸의 거처를 지키는 지루한 임무는 받지 않았으니까.”
“낄낄.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먹을 것과 즐거움만을 좇는다면 남동부의 제국 땅이 먹음직스러운 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척박하지만 확실한 안전이 보장된 에스테반의 무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학살극은, 전쟁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소소한 수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야만족 전사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흐흐흐. 그래, 여기는 그나마 낙이라도 있으니까.”
잿빛 토양 위로 흩뿌려져 굳어 버린 검붉은색의 액체와, 살점의 흔적들.
최후의 저항으로 휘두른 검은, 야만족들의 전리품으로써 그 몫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운이 나쁘게도 야만족의 남하 소식을 듣기 전에 상행으로 나선 약탈의 희생양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배를 채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그들이 말하는 아쉽다는 말은, 굳이 술과 고기 같은 물질적인 부분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살점을 썰어 낸다는 손맛, 그리고 짓밟혀지는 상대에게서 스며져 나오는 절망감 등.
가능하다면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었기에,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쩝.”
이를 탐탁잖은 눈치로 지켜보던 검은 가죽 갑옷의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피 묻은 짐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난 얼굴로 짐 가방을 패대기쳤다.
“젠장, 쓸데없는 것이나 짊어지고 다니다니!”
짐 가방에 들어 있던 금빛 패물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졌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살육과 욕망의 충족이 전부였으므로.
털썩-
아무렴 어떠냐는 표정으로 되돌아온 검은 갑옷의 사내가, 핏물이 낭자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한데, 곧장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 이거 뭔가…….”
지진?
워낙에 작은 느낌이어서 지금껏 체감하지 못했지만, 등을 붙이고 누운 지금에는 움직이는 땅의 진동이 물씬 전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굶었나…….’
뱃가죽을 더듬으며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 나간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복부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느낌에 불안감이 엄습하며 표정이 뒤바뀌자, 잇따라 가방을 건드려 보던 한 야만족 전사가 혀를 차며 물어 왔다.
“왜 그래? 이제 와서 등이 찝찝하기라도 한 거냐?”
“아니 이게…….”
사족을 덧붙이려던 야만족 전사의 말이 멎었다. 무언가 번뜩 떠오른 탓이다.
어디서 이런 느낌을 경험했더라?
그래, 분명…….
“……말발굽?”
“야만족 무리를 발견했다!”
“대응할 시간도 주지 말고 즉각 섬멸하라!”
“충!”
돌아본 언덕 너머에서는, 태양 빛을 등지고 다가오는 금빛 갑주의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놈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쏜살같이 언덕길을 하강하는 놈들의 움직임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젠장! 간악한 에스테반 놈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습격해 올 줄이야…….
분명, 에스테반을 공격하던 병력이 모조리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움직인 모양이지.
그러나 허를 찔렸다는 당황도 잠시. 맹렬하게 달려오는 그런 기세와는 다르게, 야만족 전사들의 얼굴은 점차 펴지기 시작했다.
“……뭐야, 고작 다섯?”
“캬하하하! 정신 나간 놈들이구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자리에 있는 야만족의 수는 열넷.
소수 대 다수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개인의 전력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가 나면, 그건 더 이상 전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학살이 되어 버리므로.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땅을 수호하던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이 싸움을 주도하는 명백한 강자는 그 자신들이었다.
아무런 이변도 없었다.
“맞서 싸워라! 칸의 전사들이 가진 저력을 보여 주자!”
“감히 이 땅으로 기어들어 온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그렇게 도끼를 뽑아 든 야만족 전사들이 적당한 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죽어라!”
부웅-
몸통만 한 크기의 대부를 찍어 내리는 전사들의 움직임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선두로 달려오던 에스테반의 똘마니가, 말과 함께 양단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서걱-
“크아악!”
몸과 머리가 분리된 채 허무하게 쓰러지는 동료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무슨…….”
전사의 머리띠에 붙어 있던 공작새의 깃털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대전사로의 승격이 확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고작 일 합을 나눈 것만으로도 바닥을 구른다는 것은, 아무리 굶주렸더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죽은 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처음과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달려오는 선두의 기사를 맞이하는 야만족들의 몸이, 우뚝 굳어 버렸다.
“커억, 끄어어억!”
동료의 죽음에 전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고, 기세에 질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반보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의사와 관련 없이 다가온 무형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정체를 깨달은 순간, 야만족들은 목을 죄어오는 핏빛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마저 얼려 버릴 정도로 강한, 원초의 공포였다.
“……살기.”
다음으로 선두에 서 있던 검은 가죽 갑옷 전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 * *
휙-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허공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피해는.”
“……사살한 야만족은 모두 열넷. 기사단의 피해는 경상을 당한 인원조차 전무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양기사단의 부단장. 로데르의 눈은, 어쩐지 갈 곳 잃은 듯 떨려 오고 있었다.
보고를 전달받은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상인이라…… 보아하니, 지나가던 밀수꾼을 약탈했던 모양이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 신원을 파악해 두고, 가족들에게 전달할 유품들은 추려서 하루빨리 본국으로 보내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직 후발대가 오기 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구역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1왕자인 나와, 왕실 제2 기사단인 태양기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북부 원정군.
우리의 목표는, 비어 있는 야만족의 땅을 교란시켜 녀석들의 피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야만족의 땅에 피해를 입힌다라…….’
회귀 전의 내가 들었다면 미친 사람 취급했겠군.
그만큼 감회가 새로웠다.
오직 거무튀튀한 땅과 말라비틀어진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이 장소는, 회귀 전. 그 어떤 국가도 뚫지 못했던 야만족들의 방어선이었으니.
익숙한 듯 과거와는 전혀 딴판인 공간.
회귀 전에는 이 장소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병사의 희생이 뒤따랐던가?
잃어버린 병력을 복구하기 위해 에스테반에서도 뼈아픈 출혈을 감내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놈들을 습격하는 입장인가.”
정작 그렇게 감상을 늘어놓는 내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채였다.
나는 다시금 시선을 기사들에게 돌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야만족은 백스물넷.’
움직일수록 놈들과 마주하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 역시 지속해서 늘어나고 있었고.
말인즉, 조금씩이나 점점 야만족의 땅 깊은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일개(一個) 중대 수준의 야만족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왔군.
나는 어느 기사가 외친 방향으로 기감을 펼쳤다.
어느새 근질거리기 시작한 몸은,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내고 있었다.
* * *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야만족의 땅이다.
오지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꽤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기에, 어떻게든 반응이 올 거라고는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숫자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이런! 수습은 그만하고 현장에서 이탈하라! 후발대와 합류하여 친다!”
“충!”
태양기사단 부단장 로데르가 말고삐를 쥐며 소리쳤다.
기동성에서부터 압도적이니, 한 번 이곳을 벗어나면 놈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두려움에 숨이 멎을 정도로 시린 1왕자의 목소리였다.
“멈춰라.”
“…….”
“누가 멋대로 움직이라고 했지? 나는 이탈을 명한 적이 없다만?”
장내에 있던 기사들의 머리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에 눌어붙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던 1왕자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적은 쉰넷, 그중 주술사는 둘이다. 알아서 할 테니, 모두 하던 수습에 집중하도록.”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각기 떨어진 모든 기사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로 나타난 오망성을 보는 로데르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전하! 조심하십시오!”
허공에 그려지고 있는 불길한 오망성 주변으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반쯤 선명해진 검붉은 빛의 마법진은, 금방이라도 화염을 쏟아 낼 것처럼 역겨운 목울대를 꿀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명백히 그들의 총사령관이었다.
“젠장!”
우우우웅!
마법이 발동되는 것을 확인한 로데르가 이를 악물고 1왕자에게 달려갔다.
1왕자의 오른팔이 번뜩인 것은, 그다음이었다.
“……어?”
“나는 분명히 하던 일에 힘쓰라고 했을 터다.”
살짝 들어 올려졌던 1왕자의 오른손이 내려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쏟아 내려 화마로 휩쓸어버릴 것만 같았던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이 사용한 주술 따위는 환각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가 본 장면이라고는, 1왕자의 오른팔이 번뜩였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마법이…… 사라졌다?’
방금 내가 본 것이 진실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법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간단한 상황이었지만, 그 과정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로데르에게, 1왕자 특유의 낮으면서도 무감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휘말려도 좋다면, 내 명령에 불복해도 좋다.”
그땐, 네 안위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로데르의 고개가 홀린 듯 내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