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4화
도망자들 (2)
살면서 경외감을 느낀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추켜세워지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고, 이는 검술을 접한 순간부터 한 번도 변한적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남들과 다른 재능을 타고났었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아니었다.
“혹시 저희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 방금 뭐라 그랬나?”
어젯밤 합류한 후발대의 기사들과 함께 수색 작전을 수행하던 부단장 로데르가 답지 않게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랬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가끔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으니.
이를 지켜보던 기사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1왕자 전하께 부담스러운 명령을 전달받기라도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고…….”
“음? 그러면 야만족과의 전투가 매우 힘드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지치신 것 같습니다.”
“……후우. 그 반대일세.”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로데르는 말없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없이 잿빛이라 생각했던 대지는 놈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바닥으로 허물어진 육편들은 누구의 것인지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수두룩했다.
그래. 그곳에 몸을 뉜 망령들은 자신들을 위협했던 적이었다.
그런데도, 로데르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투구를 벗어 내자, 찬란한 은빛 머리칼이 그림같이 떨어져 내렸다.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핏빛 안광에는, 무료함 외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한 치의 과정도 없이, 모든 것은 그 남자의 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기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렇다는 말은.”
“최소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의 경지. 어쩌면…… 그 이상이 분명해. 우리에겐 검을 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네.”
“그, 그렇다면 단장님보다도 높은 수준의 경지가 아닙니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횡설수설하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확고하기까지 할 정도로 명확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표하는 자신의 행동 역시 틀렸다.
1왕자의 실력을 단순히 재단하기엔,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후발대가 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수백의 야만족을 베어 내시면서도, 1왕자께선 처음의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지. 마치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
“그분에게 있어서 야만족 전사라는 것은, 그런 존재에 불과했네.”
장애조차 되지 못하는, 스쳐 가는 과정의 극히 일부.
하지만 그런 취급을 받기엔…… 놈들은 지금까지 북부 대륙의 안전을 위협해 오던 대표적인 위험 요소였다.
여러 번의 토벌대가 조직되어야 했을 정도로. 그렇게 수많은 희생을 낳았을 정도로……!
분명 그랬을 터인데…….
“애초부터 우리 기사단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
알고 있던 상식과 눈으로 본 진실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그저 국왕을 납득하게 만들기 위한 패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실체를 깨달은 것은,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선발대에 속했던 기사들이 그런 표정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행동하면서까지 이런 곳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만족 놈들을 줄인다 한들, 결국 그 수는 한계가 있을 것인데…….”
“그런 표면적인 이유를 생각해서야 의미는 없겠지.”
로데르가 비장한 표정으로 일축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지배자의 생각을, 한낱 기사들인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것이 뭇 기사들의 경외를 받는 태양기사단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딸칵!
-여기, 말씀하신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기사의 긴급한 마법 통신이 들려왔다.
* * *
“이것은…… 누군가가 감춘 흔적 같군요.”
조지가 안경을 매만지며 대가리를 내밀었다.
곡괭이와 안전모. 그리고 수레로 보이는 무언가까지.
황폐한 땅의 흙먼지가 인위적으로 뒤덮여 그 진의가 가려졌으나, 분명히 그 형태는 채광 도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제는 현지에서 광맥이라도 발견하시렵니까?”
“…….”
“허어, 살다 살다 내가 극지의 광석을 다 보게 생겼네. 미스릴이랑 묶어서 관련 논문이라도 한 편 써야 하나.”
쓸데없는 너스레다.
나는 말에서 내리며,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찾아온 것은, 납작 엎드린 태도의 로데르였다.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태양기사단은 여기에 남기고, 자네만 따라오도록. 다른 이들에게 적이 온다면 즉시 마법구를 발동시키라고 일러두어라.”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오랜 승마에 장딴지를 주물럭거리는 조지를 끌고 이동했다.
“아악! 잠시만요!”
쉴 틈도 없는 이동에 비명을 지르던 녀석이, 이내 엉거주춤하게 뛰며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 왔다.
“저 사람은 또 왜 저런답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저 고개 빳빳하던 놈 말입니다. 부단장인가 뭔가 하던 사람.”
조지는 물자와 척후를 담당하던 후발대와 함께 이곳으로 도착했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은 모를 터지만, 눈치껏 기사단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해 낸 모양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1왕자에 대한 경외심이 생긴 모양이지.”
“……인제 와서 말입니까?”
“모르는 일이지.”
녀석의 말 대로, 에스테반을 나서는 태양기사단은 처음부터 순종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 행동하라는 기사단장의 강령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상의도 없이 벌어진 인원 차출과, 급작스러운 북부로의 출전에서 아무런 실적도 없는 내 지휘를 신뢰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전장에서조차 상관을 신뢰하지 않는다니, 같잖은 이야기지.’
딱히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상부 명령에 의해 끌려 온 입장에서 자기 살길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나 역시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내 명령에 반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뭐, 이젠 더 이상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만.”
두꺼운 코트 사이로 저미는 서늘한 대답에, 조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군요.”
“아무것도. 나는 단지, 지금까지 했던 대로 움직였을 뿐.”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든. 그건 그들의 몫이었고 내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 땅에서의 내 의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이득을 뽑아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우리는 까마득한 절벽에 가로막힌 협곡의 끝자락으로 다다랐다.
그 장엄한 광경은 둘째치고, 목적지라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광활하고 텅 빈 공간.
나는 손을 뻗어 일행을 멈춰 세우고는, 벽면을 매만지며 감지되는 기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환상 계열 마법이다.”
“예? 아무리 봐도 절벽인데요?”
“네놈 따위가 구분할 수 있었다면, 환상마법이라 부를 수는 없었겠지.”
흐음.
그러면서 벽면에서 손을 뗀 뒤,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골치 아프군.
협곡을 막고 있는 삼면의 절벽 중, 오직 하나만이 진정한 목적지로 행하는 통로일 것이다.
하지만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셋 모두.
아무리 감각에 예민한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마법사가 아닌 이상에야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은 무리가 있을 터였다.
‘전부 부술까?’
……아니.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워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져 내리는 절벽에서 다른 이들까지 보호해 내기는, 아무래도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니까.
‘역시, 시간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과거에는 이런 결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았다면 고작 기사단만을 데리고 오는 일은 사양했을 테지.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못한 내 실책이었다.
조금만 더 명확한 힌트가 있다면…….
그렇게 턱을 괴고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음? 이쪽 절벽 면은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
“이걸 보십시오. 유독 이쪽 면만 깎아 세우지 않은 것처럼 부드러운 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가 말한 ‘부드러움’에 대해 만끽해 나갔다.
흠, 과연…….
“……로데르 캘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전하.”
“눈썰미가 대단하군. 정답이다.”
“예에? 여, 영광입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자세히 봐도 모를 정도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나 역시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 테지.
“……부단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수준의 재능이란 것인가.”
검술을 겨루는 것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노라면, 그건 힘도 아니고 속도도 아니었다.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다음 행동을 예상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지닌 눈썰미는, 검술이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지를 물리고, 두 사람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눈치껏. 그리고 침착하게.”
“……하아. 또 영문 모를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체념한 조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이상. 어떻게든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앞으로 펼쳐질 즐거운 장면들을 기대하며, 적을 도려내듯 오러를 담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쨍그랑-!
“헉!”
“……허!”
허공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절벽째로 무너져 내렸다.
어느새 절벽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라졌고, 기이한 양식의 석제 건물로 가득한 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춤 뒤로 물러서며 헛웃음을 흘리는 조지에게, 친히 이야기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좌관의 자리가 울겠군.”
그러고는 뚜벅뚜벅 문명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광산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아쉽게도 여긴 이종족의 땅이다.”
“……이종족?”
조지는 전설 속에서만 전해지던 이종족의 지식을 더듬어 가며 말을 이었다.
“이종족은 대륙에서 전멸했다고, 학자들 사이에서 전해졌던 걸로 아는데…….”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인간이 가진 지식이란, 결국 그들이 보고 들은 것 수준이지. 예외는 없다.”
“……그리고 1왕자 전하는 그런 것을 찾아내셨고요.”
녀석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힌다.
그건 어떻게 알았냐는 말을 돌려서 전한 것이었지만, 나는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자체만으로 내가 북부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였으니.
그때.
쿵!
어딘가에서 날아든 망치 한 자루가 조지의 발 앞으로 박혔다.
그와 동시에 로데르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조지는 개의치 않으며 실실 쪼갤 뿐이었다.
“침착하게란 말은 이런 것입니까?”
“그건 아니고.”
조지가 흙먼지가 흩날리는 제 발밑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장도리도 아니고 머리 부분이 한 뼘이 넘어가는 야금술용 망치였다.
“……허.”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발이 아작 나는 것쯤은 애교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겠지.
그렇게 망치를 툭툭 건드리던 조지가, 친히 망치를 선물해 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 이 땅에는 무슨 볼일이냐!”
“……드워프?”
눈을 씻고 다시 확인해도 다를 건 없었다.
머리통만 한 망치를 한 손에 들고, 떡 벌어진 상체를 드러낸 단신의 사내들은…… 분명 전설에만 나오던 드워프가 분명했다.
그것도 삽화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드워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