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7화
전야제(前夜祭) (1)
“……확실히 줄었네.”
성벽을 거닐며, 이따금 해자 쪽을 힐끔 살피던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야만족 땅의 경계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확실히 야만족의 기세가 누그러진 것이 보였다.
특히나 오늘처럼 안개가 낀 새벽이라면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었거늘, 요즈음은 안개의 운치를 감상하는 여유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곧 일대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엇? 저건!”
자욱한 안개를 뚫고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
거친 움직임으로 겁박하는 말발굽 소리는 거리낄 것이 없었고, 안개 사이로 드러난 갑옷은 집어 삼켜진 햇빛에 의해 섬뜩한 무채색으로 빛났다.
병사의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습격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의 압도적인 기개.
창을 바로잡는 몸이 긴장으로 경직되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들은 적인가 아군인가?
섣불리 파악에 나서지 못하던 그때. 병사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깃발? 에, 에스테반의 깃발이다!”
이런 시기에 에스테반의 깃발을 달고 나타날 무리가 있다면, 그 가능성은 하나다.
병사가 황급히 성벽으로 이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땡땡땡-
“서둘러!”
“1왕자 전하의 귀환이시다! 어서 문을 열어!”
“개문!”
새벽녘부터 이어진 소란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올려 있던 해자의 다리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곧이어서 성문을 밝히는 횃불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왕자를 위시한 원정대가 북부로 향한 지 2주째가 되는 날이었다.
* * *
“실례합니다! 조금만 비켜 주세요!”
“밀지 마세요!”
“이봐! 누가 자꾸 미는 거야?”
“지나갈게요!”
웅성웅성-
북부 원정군이 수도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대한 인파의 행렬은, 지금껏 없었던 소란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농담으로라도 길거리의 잡초보다 많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죽어나는 것은 안전을 위해 수도 곳곳에 배치된 경비대였다.
“지, 진정하고 물러서십시오!”
“이런! 위험합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경비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질서를 정리하려 애썼다.
그 유래 없던 혼란은, 왕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기사들을 파견시켜야 했을 정도.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오, 온다!”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는 길목으로 금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절도 있는 움직임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와아아아!”
“저 사람들이 바로 태양기사단인가 봐!”
“오오, 이럴 수가! 야만족의 땅에서 돌아온 건데도 다친 사람이 거의 없다니!”
야만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싸운 전쟁의 용사들이다.
지금까지 녀석들에 의해 입어 왔던 피해들을 생각하면, 시민들이 보낸 찬사는 모자랐으면 모자랐지 결코 과하지 않았다.
길목을 트는 데에 집중하던 어느 기사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이는 데는 이유가 있단 말인가…….”
마지못해 하던 수비가 아닌, 이득을 위한 공격을 감행하고 돌아온 기념비적인 날.
사람들은 승리를 부르짖었고,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의 기분도 점차 고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정군이 점차 가까워지고 그 선두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하늘에 닿을 듯 울리던 환호가, 멎었다.
“저분이 바로…….”
“……1왕자 전하.”
시민들은 박수를 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전율했다.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오지로 들어간다는 막중한 임무의 총사령관을 자진해서 맡은 남자.
그리고 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내, 스스로의 능력까지 증명해 냈다.
그는 고된 여정을 소화했음에도 처음과 같이 당당하고 패도적인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저분이 장차 에스테반을 이끌어 갈 지배자라는 건가……!”
가슴을 웅장하게 울리는 감동과 전율에 휩싸여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던 그 순간.
누군가의 경악한 목소리가 조용해진 수도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저, 저길 봐!”
1왕자에게 집중되어 있던 대중의 시선이, 누군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힐끔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태양기사단도, 그들을 도와 북부 원정에 나선 종자들도, 아니었다.
원래라면 주목조차 받지 못해야 정상일 보급품 마차, 그보다 한참 더 뒤쪽.
“……저게, 뭐야.”
거기에 있는 것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대장간의 요정들.
“……!”
더 이상의 함성은 없었다.
아니, 그곳엔 오직 열렬한 찬양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와아아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 환호는 수도의 광장이 떠나가랴 내질러졌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의 감격은, 북부 원정군이 길목을 지나 왕궁으로 입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둥둥-! 둥둥-!
병풍처럼 나열한 군악대가 연주하고 있는 길을 나아간다.
웅장한 선율에 맞게 발걸음을 옮겼고, 곧 기사들이 검을 가슴께로 들어 올리며 예를 표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시는 아버님의 앞으로 다가가,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북부 원정군은, 국경지대를 지키고 비어 있는 놈들의 후방을 습격함으로써, 북부의 치안을 안정시키라는 국왕 전하의 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당당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사였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잠시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기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국경지대에서 온 소식에서 들으셨을 대로, 사라진 이종족인 드워프와의 협력관계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짝- 짝짝짝-
개선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손바닥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은 경외에 다다라 있었고, 귀족들 역시 에스테반에 가져온 이익을 욕망이 아닌 존경으로,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물론 일부 귀족들의 얼굴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고.
‘속이 뻔히 보이는군.’
놈들은 국무회의 때에, 에스테반에 돌아올 이득이 적다는 점을 들어 북부 원정을 반대해 왔었다.
그 목적이 지원을 줄여 나를 위험하게 만들고자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로 재미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겠지.
그리고 그런 내 성과에 누구보다 안심하고 있는 것은.
“……그런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던 아버님이었다.
“잘했다. 북부 국경지대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네 판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정말 자랑스럽구나.”
“과찬이십니다.”
“겸손은 미덕이라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알렌 에스테반,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
급히 병력을 편성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출정식과 같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는 별다른 예식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누구도 1왕자에게 전쟁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경지대 수비와 원정은 보란 듯이 성공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이득도 챙기지 못할 거라 생각한 상황에서조차…….
아버님은 나와 태양기사단. 그리고 드워프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시다 말씀하셨다.
“일어나도 좋다.”
“예.”
꽉-
“헉!”
“……국왕 전하?!”
몸을 감싸 오는 아버님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공식 석상에서, 그토록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시는 분이셨건만…….
나는 약간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던가…….’
회귀하기 전으로부터도 무척이나 먼 옛날의 기억이었기에 나조차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하게 물러나신 아버님이, 걸음을 옮겨 드워프들을 향해 다가가셨다.
“반갑다. 그대가 야만족의 땅에 있던 드워프 일족의 통솔자인가?”
“그렇소이다. 수르트라고 불러 주시오. 인간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리하겠다.”
녀석은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꽤 긴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물론 그 긴장의 원인이 뜨거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입술을 움직였다.
-잘하고 있군.
“크흠!”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은 어길 수 없다.
하물며 녀석에게는 일족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우리 드워프들을 왕국으로 초대해 주어서 고맙소.”
“그 부분은 국경지대에서 소식을 전해 온 병사들에게 들었다. 살아갈 장소를 필요로 했다지?”
“그렇소. 일족을 지켜 주던 결계가 망가지는 바람에 거처를 옮겨야만 했소. 그 순간 때마침 나타난 것이, 저기 있는 1왕자요.”
“……정말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군.”
그리고 그건 이 자리에 위치한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드워프라는 존재는 신화나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단어에 불과했으니까.
오히려 국왕의 입장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황당함을 느꼈을 때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버님은 잠시 강렬한 시선으로 드워프들을 쳐다보다가 말씀하셨다.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간들의 시선이 부담될 것이다. 쉴 곳을 정해 줄 테니 이만 물러나고, 그대와는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지.”
“고맙소.”
그렇게 녀석은 물러났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
그 뒤로 그런 귀족들의 열망과 같은 눈길이 따라붙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드워프 대장 수르트의 모습에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정작 내게는 그런 반응이 반가울 따름이었지만.
아직 이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시작하기도 전이었으니.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군.’
나는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태양기사단에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태양기사단이 꼼꼼하게 봉인되어 있는 궤짝들을 들고나왔다.
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아버님이 눈썹을 들어 올리셨다.
“저건?”
“살아갈 장소를 제공받은 드워프들의 감사 선물입니다. 본디 제게 준 것이나, 왕국의 얼을 품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자로서 개인적인 물욕을 부릴 수는 없었기에, 왕실에 헌납하고자 합니다.”
“대체 무엇이기에…….”
몬스터를 포박할 때나 사용하는 강력한 일회용 마법 사슬.
고작 상자 하나를 묶는 데에 낭비하기는 아까운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을 테지요.”
“…….”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 신호가 떨어지자, 상자를 묶던 봉인이 풀려나가며 궤짝의 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일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헉!”
“저, 저게 뭐야!”
태양 빛을 받은 무구들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낸 것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세상에! 드워프, 드워프제 장비다!”
전설 속에서만 나오던 드워프제 장비.
비록 조악한 북부의 광석으로 만들어졌다지만, 무려 수백 년 동안 만든 무구들 중 가장 나은 것만을 추려 왔다.
단언컨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가치의 공물들은, 귀족들조차 체통을 잃고 경악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지켜보시던 아버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나는 쏟아지는 경악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 * *
왕성에서 열린 파티는, 원정대의 성과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성대하게 열렸다.
고지식한 일부 귀족들은 보잘것없는 탁상공론이라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왔지만, 이번 파티가 에스테반 전체의 고양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 알렌 에스테반 1왕자 전하가 입장하십니다!”
별빛처럼 바스러지는 샹들리에.
왕실의 악단이 연주하는 원무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일단의 귀족 무리들.
그 지루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사뭇 누군가가 기대했던 축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조지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파티를 즐기는 태양기사단을 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저 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없어서 부럽네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입장만을 고대하던 처음의 흥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연회장 한구석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비치된 과자를 주워 먹을 뿐.
설상가상으로 재미를 보장해 줄 귀족들조차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동물원의 사자라도 된 기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집무실로 돌려보내 주지. 사절단과의 파티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부라도 시켜 줄까?”
“……농담입니다. 파티가 참 즐겁군요.”
펴질 줄 모르는 얼굴을 보면, 천하의 사기꾼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긴 한가 보다.
하지만 놈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둘이다.
감흥조차 느껴지지 않는 멍청한 광대놀음을 지켜보며 시간을 달래느냐, 죽어도 하기 싫은 공부에 매몰되느냐.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밤은 좋을 대로 행동하도록. 원한다면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
“예? 그래도 됩니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겠지.”
“자유를 대가로 듣는 잔소리면 싸게 먹혔네요.”
분명. 보나 마나 남작에게 한 소리 들었을 거다.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든가…….
물론 저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틀고 있는 수행원을 데리고 다닐 이유는 내게는 없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음.”
그렇게, 녀석은 실실 웃는 얼굴로 입에 과자를 문 채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 역시도 따분한 시간 때우기를 이어 나갈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한 틈을 노려 회장을 빠져나가고자 아무도 없는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만 아니었다면.
“오랜만입니다. 알렌 형님.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테이블에 기대어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는 남자.
바로 에스테반의 2왕자인 알베도 에스테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