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32화
후회 속에서 피어난 연꽃 (2)
복도에서 뛰쳐나온 누군가에 의해, 왕궁 재무관리인의 몸이 붕 떠올랐다.
퍽!
“크윽!”
“으아악!”
관리인이 들고 있던 서류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어림잡아 눈으로 보이는 서류만 하더라도 최소 수백 장 이상.
급작스러운 충돌에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있던 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으아아악! 기껏 분류해 둔 서류가!”
이 모든 분량을 분류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재무부의 인재들이 갈려 나갔던가?
며칠 밤을 지새워 쌓아둔 서류들은, 고작 예기치 못한 충돌 한 번으로 날아갈 운명이었던가!
무의미한 손길로 서류 더미를 뒤집던 재무관리인이, 고개를 들어 충돌의 원인을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왕궁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문득. 쏘아붙이려던 그의 몸이 굳었다.
그 충돌의 원인이,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던 까닭이었다.
“후, 후작 각하?!”
“커흠!”
에스테반의 재무대신이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발테르 후작가의 가주는 머쓱한 얼굴로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발테르 후작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시했던 서류를 재무회계실로 가져가고 있었나?”
“그, 그것이, 그렇기는 한데…….”
“아! 이런.”
허망한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후작이 구두 아래에 밟힌 서류들을 눈치채고 뒤로 물러났다.
선명한 발자국이 남은 서류는 구겨지고 더럽혀져,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재무관리인의 눈이 길게 찢어졌으나, 차마 쓴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네, 내 급한 일이 있어서 미처 앞을 확인하지 못했네.”
“이건…… 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고생이 많네.”
예…… 뭐.
눈은 애써 웃고 있지만 절대 행복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번 분기의 회계업무가 대부분 끝난 상황인지라, 재무부에 대략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서류를 분류하는 것이 고된 일이라 하더라도, 어찌저찌 넘어갈 수는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재무대신인 발테르 후작은, 그런 일말의 헛된 희망도 허락하지 않았다.
“원인을 제공한 주제에 미안한 이야기지만. 곧 바빠질 수도 있으니, 이 서류 건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주게나.”
“네? 이 시기에는 회계 업무가 비는 시간이 아닙니까.”
“광산이 발견되었다고 하네. 그것도 대륙 역사에 남을 만한 가치의 광산이…….”
그 순간.
발테르 후작은 왕성의 복도를 부리나케 달려가던 그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이, 이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각하!”
“정말 미안하네! 그리고 그 서류는 이틀 내로 정리해서 다시 올려 주게나!”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발테르 후작은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왕궁의 복도를 달렸다.
남겨진 재무관리인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 * *
“……그리고 이것이, 드워프들이 갈데르드 평야에서 채광한 것입니다.”
조사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 속에 감춰져 있던 자그마한 원석을 내려놓았다.
아직 가공되지도 않았기에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엿보이는 은은한 청록색의 광석은, 집무실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국왕이 체통도 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원석을 매만졌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이게 바로…….”
“예. 미스릴의 원석입니다.”
“……맙소사!”
정말로 있었단 말인가?
1왕자의 말을 믿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스릴 광산이란 이야기는 너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히는 제발 그의 말이 맞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할 수 있겠지.
하나. 이렇게 실물로 보게 되니, 가지고 있던 모든 걱정이 마침내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 자세한 것은 확실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미스릴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국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원석을 뜯어 보던 재무대신, 발테르 후작은 아니었다.
“미스릴의 매장량은 어느 정도로 추산되고 있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광석의 매장량은 광산을 개발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특히나, 그것의 가치가 다른 광물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인 미스릴이라면 어떠할까?
규모에 상관없이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라도 개발을 이어 가긴 하겠지만. 대략적으로나마 그 매장량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얼마나 많은 재정을 투자해야 좋을지 가늠하게 해 주는 지표가 될 수 있었다.
꿀꺽-
모두의 시선이 조사원에게로 향하자, 조사원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대답했다.
“드워프들의 말에 의하면, 최소 삼백여 톤에 이를 거라고 합니다. 순수 제련된 미스릴로 따지면 25톤가량입니다.”
“허!”
“그게 진정 사실인가?”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까지 ‘추산’된 것만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25톤의 미스릴? 겨우 그 정도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액수로 따지면 에스테반 1년 예산의 40배가 넘어가는 금액이었다.
너무 큰 돈이라 오히려 실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만한 양의 미스릴이 모두 채굴됨에도 시세가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나온 계산일 터지만, 터무니없는 액수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국왕이 아찔함을 느끼고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을 연방제국 놈들이 먼저 알았다면, 참으로 큰일이 날 뻔했구나!”
만약 그랬다면, 자신들의 옛 영토에서 말 그대로 금화 다발을 뽑아내는 장면을 눈 뜨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상상치도 못했던 수확에 상기된 발테르 후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운이 좋았습니다. 설마 1왕자 전하께서 받으신 땅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낼 줄은…….”
“기적…… 이라고.”
기적이라 함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은 결과를 빚어낸 상황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정말로 기적이었을까?
-드워프들을 갈데르드 평야로 보내서 미스릴을 발견하게 하죠.
국왕은 제 아들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갈데르드 평야에서 미스릴이 발견된 것이 우연으로 보이게끔 만들자고.
-그리하면 미스릴 광산의 존재를 알고 그 땅을 받았다는 연방제국의 의심을 덜어 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말이죠.
모든 상황이 그의 머릿속에 짜여 있었다.
아수스의 배신을 점지해 냈던 그때처럼. 드워프를 발견해 냈던 그때처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국왕의 귀로, 또다시 발테르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편으로는 이만한 이득을 놓친 연방제국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 올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음…… 아, 그렇군.”
“국왕 전하?”
“크흠! 아무것도 아닐세.”
그래. 지금은 미스릴 광산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미 좋게 된 일을 두고 원인을 따지는 것은, 미련한 행동이었고.
“그럼 개발 논의에 앞서, 내 생각을 말하겠네.”
국왕이 자세를 바로잡고 근엄한 표정으로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쩌면 에스테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회의의 시작이었다.
* * *
마법구가 전해 온 소식은 썩 만족스러웠다.
“정말로 우리끼리 개발에 착수해도 되는 것이오?”
“음.”
드워프 대장 수르트는 개발 허가가 떨어졌다는 말에 기뻐하면서도, 그 말이 뜻하는 진의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렇다면 사실상 채광한 양의 3%라는 조건은…….”
“두 번 설명해야 알아듣겠나?”
“……아니오, 이해했소. 단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뿐이지.”
갈데르드 평야의 전체적인 관리는 에스테반 측에서 맡되, 미스릴 광산을 개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드워프들에게 일임한다.
이는 방금 전 있던 국무회의에서 아버님이 내리신 결정이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잘 생각했소. 이 분야에서는 우리 드워프들의 능력을 따라올 자가 없으니, 안심하고 있어도 좋소.”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두들기자, 광산의 진입로를 확보하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옷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팔뚝에는 멀쩡한 곳 없이 옅은 생채기가 가득한 꼴이었지만,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일족이 기뻐하고 있으니 나도 할 맘이 생기는구려.”
“마음대로.”
놈들의 태도는 이미 180도 달리진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미스릴의 존재가 지금까지의 취급과 대비되어, 더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
물론 저들 일족에게 예상보다 더 많은 지분의 미스릴이 돌아가게 된 탓도 있으리라.
그렇게 녀석이 떠나가고, 로데르가 찾아왔다.
“말씀해 주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태양기사단에는 갈데르드 평야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수색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지금 부단장 로데르가 말하는 것은, 그중 내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항에 대한 것.
“지금 가지.”
우리는 드워프들이 뚝딱 지어 놓은 임시 거처를 지나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어느 공터에 다다랐다.
특이하게도 수풀이 군데군데 짓눌린 흔적들이 보였는데, 이를 가운데에 둔 태양기사단의 매서운 눈빛이 주변을 훑고 있었다.
나는 수풀을 헤치고 공터의 중앙으로 들어가,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크군.”
거대한 크기의 발자국.
뭉툭한 흔적 사이로 드러난 발톱의 자국은 땅을 헤집어 놓았고, 무언가가 지나간 자리에 꺾인 식물들은 생명을 잃고 거무튀튀하게 바래 있었다.
그 흔적만으로도 위험성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뒤에서 지켜보던 로데르는 침음을 흘렸다.
“마물입니다. 그것도 오우거와 미노타우로스 급의 대형 마물.”
“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 타프 그란데’가 천혜의 산맥으로 불리던 이유에는 그 산세가 험준하고 높은 탓도 있었지만, 거기에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몬스터의 일부분은 간혹 산맥 아래로 내려와 이렇듯 평야 지대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는데, 이는 회귀 전 연방제국이 미스릴 광산을 개발할 때도 큰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던 사항 중 하나였다.
“과연, 전하께서 방호벽을 최우선적으로 구축하라고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군요.”
로데르가 바라본 방향에서는, 드워프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서 서로 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방호벽을 건축할 돌을 광산에서부터 나르고 있는 부류. 그리고 착실하게 벽을 쌓아 나가고 있는 부류.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속도의 작업이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일주일 내로 간단한 방호벽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로데르의 표정이 신중하게 바뀌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몬스터들이 소란을 듣고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문제가 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천혜의 산맥에서 내려온 대형 몬스터라 하더라도, 이곳에 있는 태양기사단은 전원이 오러를 사용 가능한 실력자들이었다.
몬스터의 습격 정도는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양기사단이 돌아간 이후에는?
방호벽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임시로 지어진 수준으로 놈들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을까?
과거와 다르게 이 땅을 개발하는 것이 드워프라 하더라도, 결국 제대로 된 방어 수단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회귀 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 에스테반의 국방력으로는 연방제국처럼 상비 병력을 주둔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형 몬스터라…….”
마침 잘됐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구상하던 것을 진행하기에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