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34화
후회 속에서 피어난 연꽃 (4)
“하지만 적이 쳐들어오게 될 경우, 이곳은 완전히 고립될 겁니다.”
그때 조지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핵심을 꿰뚫었다.
“호오.”
나는 조지의 지적에 감탄사를 흘렸다.
“세워지는 성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는 말인가?”
“정확히는 방어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 땅의 모양새를 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갈데르드 평야는 삼면의 대부분이 ‘실 타프 그란데’의 산세로 가로막힌 분지에 속했다.
게다가 그 해발 고도는 다른 지역보다 높은 수준.
그 말은 즉. 방비에 신경 쓴다 한들, 결국 놈들의 움직임으로 에스테반과 평야의 경계가 절단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에스테반의 지원을 받기가 요원해지겠죠. 무작정 버티기만 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정확한 지적이군.”
분명 성의 구조에만 몰두하다 보면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지의 우려를 들었음에도 내 고개는 확고하게 끄덕여졌다.
“상관없다.”
“예?”
“오히려 그렇게 나와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할 수 있겠지.”
곤란하다고?
그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경을 치켜올리던 조지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설마 전하께서 노리시는 것은.”
“그래.”
나는 녀석을 마주 보고 웃었다.
“녀석들로 하여금 억지로 이 땅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
“……!”
그렇게 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킨 뒤에, 놈들이 공격하게 만들어 병력을 잡아 둔다.
처음부터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역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땅은 광물자원 이외에도 생물이 생존 가능한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천혜의 산맥으로부터 흐르는 풍부한 수맥.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비옥하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의 토양.
마지막으로 식용 구분에 전문 지식이 필요하긴 하나, 산맥의 초입에 즐비해 있는 열매들까지.
말인즉. 준비만 확실하다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입장에선 어떨까?”
동부 국경지대로 연방제국의 적이 쳐들어온다는 가정하에.
놈들의 입장에서는 미스릴 광산을 품은 이곳이 신경 쓰일 것이다.
게다가 에스테반에선 이를 지원해 줄 루트도 마땅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테지.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 경악하는 수르트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이곳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철옹성 같은 구조를 뚫을 방법은 전무.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놈들은 이곳에서 전력을 낭비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엔 뒤를 잡힐 수밖에 없는 특유의 위치는, 너무나 완벽한 미끼였기에.
조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제 후방을 습격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 겁니다. 지형의 고저차로 인한 불리함을 떠안은 상태에서 말이죠.”
“허어!”
거기에 놈들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힐 방도를 미리 준비해 둔다면 어떨까?
미래의 지식을 활용한 상위 기술의 무기들을…….
나는 성벽의 설계도가 그려진 종이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놈들을 베어 내는 것도, 고립된 성을 구하는 것도. 나머지는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할 것이다.”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을 억지로 비튼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이 땅의 쓰임새였다.
‘놈들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쓸모없다 여겼던 이곳이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자 단숨에 전략적 요충지가 되리란 걸.
한참 동안이나 견적을 짜던 수르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리의 손으로 무적의 요새를 만들어 보이겠소!”
사실 여러 겹의 벽으로 적들을 막아 내는 성벽의 형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돌을 쌓아 놓은 형태의 성벽에 불과한 것.
그러한 구조적 설계와 극강의 자재가 만나게 된다면 말은 달라진다.
‘모르긴 몰라도 무적 그 자체를 우리의 손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수르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상식에 어긋나는 수준의 자재를 가장 어울리는 설계와 결합시킨 것도 놀라우나,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계획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짜여 있던 것처럼.
그를 데려온 1왕자는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것보다도 손쉽게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대체 그가 가진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경악할 수준의 무력에, 전문가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 지식. 게다가 이를 적재적소에 응용하는 전략적 안목까지.
순간.
먼 과거, 선조의 입으로 전해 들었던 용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설마 저 남자는 용족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수르트였으나, 저도 모르게 비현실적인 상상을 떠올릴 만큼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 * *
성벽 건축 계획이 언급된 이후로, 드워프들은 광산을 개발할 인원과 거처를 지을 인원. 그리고 성벽 건축을 개시할 이들로 나누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시 된 것은, 임시 거처 한가운데에 거대한 대장간을 짓는 일이었다.
“인간들의 물품은 질이 좋지 않소. 그러나 이 녀석만 있다면, 요새화 따위는 식은 죽 먹기지.”
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지어지고 있는 대장간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노동에 필요한 물품을 자급자족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대장간이 지어진다는 그 행위 자체도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대가 말했던 대로 미스릴을 정제하는 시설도 갖춘 녀석이오.”
“망치와 모루만으로 제련하는 지금보다 효율이 좋겠군.”
“그렇소. 아마 본국에 납품되는 미스릴은 모두 이곳에서 정제 과정을 거친 뒤에 보내지게 될 것이오.”
효율로 따지면 대략 두 배 이상.
자세한 설명을 마친 수르트가 씨익 웃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대장간이 완공되는 오늘 저녁부터는 본격적으로 성벽 개발에 착수할 수 있겠지. 우리 일족의 진가를 보여 주겠소.”
“그래?”
나는 자신감 넘치는 녀석의 포부에 피식 웃어 보였다.
“기대하지.”
빈말은 아니었다.
회귀 전. 녀석들이 야만족의 땅에 세워 놓은 성벽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으니까.
맞아 본 놈이 잘 안다.
“대장간이 완공되면 미스릴의 사용을 허가하지. 계약에 따라 3%의 지분은 온전히 드워프들의 몫이다.”
“이 또한 그대가 말했던 대로, 원하는 것을 만들어도 된다는 소리겠지. 알겠소.”
녀석은 그렇게 수긍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수르트가 약간은 경직된 얼굴로 질문을 던져 왔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뭐지?”
“우리의 몫으로 받게 될 미스릴을 미리 지불받고 싶소.”
가불이라는 건가.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좋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흔쾌한 대답이구려.”
팔짱을 낀 내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갔다.
아직 본격적으로 채광을 시작하지 않은 만큼, 나오는 양은 그리 많지 못하다.
그중 3%의 미스릴이라 해 봤자 제대로 된 무언가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할 터.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에 관해서는 아버님께 말씀을 전달해 두겠다. 알아서 챙겨 가도록.”
“그대의 배려에 감사하오.”
녀석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애초에 창고에 쌓여 가는 저 미스릴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당분간 팔아넘길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다.
드워프들에게 쥐여 주어 미스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지게끔 만드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이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득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입술은 비뚤게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쯤 녀석들에게도 갈데르드 평야에 드워프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겠지.
아마도 일석이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만 말이야.’
평야를 되찾아올 계획을 세우고 있을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놈들이 마주하게 될 것은 철옹성보다 단단한 무적의 성벽이 될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개발했어야 할 기술로 만들어진 요새였다.
“남은 것은 주변을 위협하는 몬스터뿐이군.”
태양기사단을 안배해 두었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터였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몬스터 따위는 무난하게 토벌할 수 있겠지.
……다만.
“…….”
나는 태양기사단의 수색팀이 떠나간 방향을 주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평야에서 산맥으로 접어드는 방향. 그보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거뭇한 기감에 차가운 시선을 유지한 채로.
* * *
“부단장님.”
전투가 끝나고, 상황 정리를 마친 기사가 수색팀을 이끌던 로데르에게 다가왔다.
“네 마리 모두 확인 사살을 마쳤습니다.”
“피해는?”
“미미한 경상자가 다섯입니다. 대부분 살갗이 찢어진 정도입니다.”
로데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를 듣는 그의 표정은 착잡한 듯 그늘이 져 있었다.
“마력의 영향인가…… 산맥의 몬스터가 강하다는 경고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전하께서 조심하라고 이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상대한 것은 고작 네 마리의 오우거가 전부였다.
한데, 놀랍게도 녀석들은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오러의 강한 절삭력에도 버틸 정도의 저력을 보여 준 것은 물론이었고.
“……공사의 소란을 듣고 찾아왔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태양기사단의 일원인 그들이 고전을 겪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받은 충격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남았다.
일부는 무력감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던 로데르가 재빨리 표정을 지워 내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이 구역에는 몬스터의 출현이 뜸하니 다행일세.”
“예. 오우거를 제외하면 마주친 몬스터도 없고…… 전투로 지친 기사들이 쉴 수 있겠습니다.”
피로한 상태로 산맥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행위나 다름없다.
그건 아무리 무력에 강한 태양기사단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기사들에게 휴식을 명한 로데르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더 점검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은 휴식 시간이 끝나는 대로 계속해서 주변을 수색하고 있도록.”
“부단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황을 보고하러 1왕자 전하께 다녀오겠네.”
“예? 어찌 부하 기사들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자네들은 지치지 않았나. 휴식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네.”
“…….”
확고한 대답이었다.
이미 저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더 이상의 설득은 통하지 않겠지.
원래 그런 분이셨으니까.
그렇게 기사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적을 발견하더라도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말도록 단원들을 통솔하고 있게나.”
“예. 다녀오십시오.”
로데르가 나무에 매인 말고삐를 풀고 주변을 살폈다.
평원이 좁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영토적인 문제일 뿐, 중립지역인 천혜의 산맥을 포함하면 생각보다 넓은 구역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위치한 장소는 산맥과 마주한 평야의 끝자락.
임시거처가 지어진 장소로 향하려면, 저 방향으로…….
“……!”
문득 주변을 살피는 로데르의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하군.”
“예?”
“전투가 끝난 지도 오 분이 넘게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숲이 조용하네.”
자연은 그 어떤 감각보다도 예민하게 다가온다.
신경을 집중하면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은, 평소 같았으면 쓸데없는 불안감 따위로 치부할 정도의 하찮은 수준이 아니었다.
타고난 눈썰미에서 오는 불길함이라고 해도 좋았다.
“설마…….”
그 순간.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의 머리 위로 소리 없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동시에 로데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조심해!!”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위급한 목소리에, 기사들의 고개가 황급히 뒤를 향했다.
태양을 가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검은 실루엣.
그리고 거대한 발.
로데르는 바로 검을 뽑아 앞으로 나가며 외쳤다.
“모두 물러서!”
“큭!”
시퍼런 검날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며 검은 실루엣을 쳐냈다.
하지만.
카가가각!
마치 바위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거력이 그를 덮쳐 왔다.
판단은 찰나였다. 로데르는 순간적으로 팔을 끌어당기며 그 일격을 흘려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를 구했다.
쿠구궁!!
마치 지진이 난 듯한 굉음과 함께 방금까지 로데르가 서 있던 지반이 폭삭 주저앉으며 강한 먼지구름이 흩날렸다.
고작 발길질 한 번으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탓에, 로데르는 비상하는 모래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건 대체 무슨…….”
“……오우거?”
녀석은 오우거였지만, 오우거가 아니었다.
통상적인 대형 몬스터보다 1.5배는 거대한 몸집.
그 위로 각각의 자아를 가진 두 머리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불쾌한 모습.
놈은, 옛 고서에도 악마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었을 만큼이나 흉포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
놈의 정체를 확인한 로데르가 재빠르게 무기를 들어 올리며 지휘를 시작했다.
“모두 전투 준비! 쉬운 상대가 아니다! 여느 몬스터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옙!”
그 외침에 멍하니 있던 모든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최적화된 포위 진형이었다.
‘……제길!’
이 시각에도 트윈 헤드 오우거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다 잡은 먹잇감을 농락하듯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놈이 이 구역의 우두머리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오자 갑자기 몬스터들의 출현이 뜸해진 이유를.
산맥의 영향으로 더욱 흉포해진 몬스터.
녀석이 보기에, 앞선 오우거와의 전투로 지친 기사들은 손쉬운 먹잇감이겠지.
방금 직접 상대해 봤기 때문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저릿하게 마비된 손목을 만지던 로데르는, 짧게 입술을 깨물고는 신중하게 명령했다.
“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놈을 상대한다. 절대로 광산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