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37화
후회 속에서 피어난 연꽃 (7)
허허벌판이었던 땅은, 어느덧 자리 잡은 건물들로 인해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과 분위기.
거기에는 카이멘툼의 공법을 시범 적용한 회관부터 시작해서 엄중한 보안의 광산 입구까지, 정말이지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임시 거처 한가운데에 완공된 거대한 대장간.
요새의 시작은 이 시설로부터 뻗어 나가게 될 것이다.
분명, 이 광경은 내 행보가 저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줬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겠지.
드워프들이 대장간을 완공시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비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대장간이다 대장간!”
“일족이 사용할 철을 마련해라!”
“푸하하! 다 녹여 버려!”
그렇게 말하며 보급된 곡괭이들을 깡그리 용광로로 던져 버린 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드워프들의 공학이 결합되면서 작업의 능률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건축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에 턱이 빠지도록 경악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 3일 만에 파 놓은 성곽 터란 말입니까?”
수 킬로미터에 걸친 구덩이가 잡부들을 반겼다.
드워프들은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흙을 퍼 나르고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구덩이의 넓이는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작 스무 명의 드워프들이었다.
“그, 그런데 저들이…… 어어…….”
“드워프.”
“아! 저 드워프들이 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건축가가 가리킨 방향에 서 있던 드워프를 힐끔 쳐다본 조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채굴기라고 하더군요.”
“……예?”
채굴…… 뭐?
순간 바람 빠진 대답을 내뱉은 건축가가, 팔을 휘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저런 것으로 땅을 판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저건…….”
팔뚝만 한 철판에 커다란 송곳이 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특이한 점이라고는 그 뒤에 달린 조그마한 마정석뿐. 대체 저런 것으로 어떻게 땅을 판다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 드워프라는 존재를 발견했다는 소문이 정말로 사실이었단 말인가?!
눈앞에서 직접 마주한 드워프와 연이어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은, 이 자리로 불려온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하는 수 없이, 조지가 그들을 이끌고 직접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다음에 벌어질 장면은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이 가능했다.
“저, 저걸 봐!”
“맙소사!”
엄청난 굉음을 내뿜으며 돌아가는 송곳.
단지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도 단단하게 다져진 지반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1m에 다다른 벽을 깎아 내는 데에는 정말로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것은 상상 속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전설 속에서만 나오던 드워프의…….”
“아무튼, 여러분들은 계약의 내용대로 성벽을 건축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본 사실들을 발설하는 것은 엄금입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렇게 허탈한 표정으로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구덩이 속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오던 수르트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오, 이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온 인간들이오?”
“그렇습니다.”
“흐음…….”
수르트는 쓰고 있던 안전모를 뒤로 젖히며 잡부들의 팔뚝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부담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시선에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난무하자, 수르트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워 내며 말했다.
“우리 드워프들의 공사 일정을 따라오는 것은 고된 일일 것이오. 하지만 성벽 건설이라는 목표를 함께하는 이상, 힘을 합쳐서 잘 해내 봅시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이리로 따라오시오.”
그제야 건축가와 잡부들은 자기가 무슨 장소에 오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길드를 통한 심사와 엄격한 검증을 걸친 후에야 알게 된 성벽 건축 계획.
그리고 이 모든 책임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에스테반의 국왕이었다.
‘그래.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지!’
크흠!
자신들은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이 자리에 온 것이니까.
그렇게 헛기침을 하는 건축가에게, 수르트가 파내어지는 땅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구덩이가 성벽 건축의 기반이 될 땅이오. 지어질 성벽의 생김새는 확인했소?”
“예. 삼중으로 된 성벽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잘 되었군. 이건 우리 드워프가 직접 수정해 본 설계도요. 한번 확인하시오.”
“여, 영광입니다.”
수르트가 들고 있던 설계도를 건축가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곧장 읽어 보라는 듯이 손바닥을 허공으로 밀어냈다.
이에 건축가가 눈을 빛내며 설계도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하나 그런 건축가의 기대가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설계도 속에 숨어 있던 오류가 단박에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저기, 혹시 설계도를 제대로 주신 것이 맞습니까?”
“음. 그렇소. 전반적으로 해당 구조를 따르되, 상세한 기능은 가능한 선에서 수정하면 될 것이오.”
“하, 하지만 이건 이치에 어긋나는 설계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건축가가 설계도면의 한 점을 가리키며 답답함을 토로해 냈다.
“이 기형적인 축조 기법은 대체 무엇입니까? 돌을 쌓아 둬야 할 성벽의 내부를 군데군데 비워 둔다니요?”
“아아! 그 부분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기어를 달아 엘리베이터를 놓을 생각이오. 그렇게 작은 공간이라도 결국 활용하기 나름이겠지.”
“에, 엘리베이…… 터? 아, 아무튼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내부를 비워 놓으면 성벽로를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활하중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모조리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그 다급한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외벽 사각에 위치한 망루였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석만으론 이런 황당한 구조의 건물을 지을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짓는다 하더라도 적군의 마법 공격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내구성에 대한 실험은 끝났소.”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낫겠지.
수르트는 그렇게 일축하며 자재가 만들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눈짓했다.
“저곳에 있는 우리 일족을 찾아가 보시오. 그대들에게 해답을 알려 줄 것이오.”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재단했던 그때.
1왕자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반신반의한 표정의 인부들이 몰려가자, 그 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수르트가 조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들도 오늘이면 에스테반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예, 뭐. 아마 준비되는 대로 곧장 출발할 겁니다. 인부들도 도착했으니까요.”
조지가 마차 대열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분간 태양기사단은 주둔해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그렇군.”
이제 남은 것은 인부들과 협력하여 공사를 이끌어 나가는 일뿐이었다.
처음 약조했던 대로의 순수한 자유.
그리고 거기에는 그 어떤 강요와 참견도 없었다.
‘이 땅에 오도록 제안한 것은 우리를 위한 배려라고 했던가…….’
드워프들은 이제야 비로소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리석은 선택에 후회하면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만, 하던 작업을 마저 하러 가 보겠소. 그대도 할 일을 하러 가시오.”
“그러죠, 뭐.”
조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떠나갔다.
* * *
“전하.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나는 마부의 정중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적으로 지급된 물자는 모두 바닥에 내려진 상태였고, 그 대신에 짐마차로 오른 것은 정제된 미스릴이었다.
그리고 그 정체는, 잘 포장되어 마부조차도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둔 상태였다.
“좋군.”
짧았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파견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젠 또다시 1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였다.
나는 기틀이 잡혀가고 있는 평야를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나.’
여기에 있는 드워프 일족과 미스릴 광산은 장차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날카로우면서도, 강인한…… 그런 무기가.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운명이었다.
그때, 마차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있던 조지가 폴짝 뛰어내리며 말했다.
“근데 이대로 출발할 겁니까?”
“무슨 뜻이지?”
“정말로 저들을 불러오지 않아도 되냐는 뜻입니다.”
녀석이 말한 ‘저들’이란, 드워프들과 태양기사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그들을…….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성패를 결정짓는 시점에 거추장스러운 예의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아무렴요.”
녀석의 작은 빈정거림을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렸다.
“출발한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다란 상자를 들고 달려오는 수르트였다.
조지가 웃었다.
“잘 달리네요.”
“…….”
허억! 허억!
녀석은 짧은 다리로 열심히 질주하고는, 떠나가려던 마차 앞까지 당도하고 숨을 헐떡였다.
다급하면서도 안쓰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뭐지?”
“사, 사실은…….”
“천천히 말해라.”
“허억, 큭…… 고, 고맙소.”
어찌나 급히 달려온 것인지.
녀석은 그렇게 가빠지게 숨을 고르면서도, 기절할 것처럼 몸을 휘청이고 있었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녀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용건은.”
“……사실은, 이것을 전해 주고 싶었소.”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들고 왔던 기다란 상자를 내게 건넸다.
정확히는 상자라기보다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한 장식장에 가까웠다.
내부는 하얀 천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이게 뭐지?”
“그게…… 일족의 대장간에서 완성된 첫 번째 검이오.”
“검?”
나는 내용물을 감싸고 있던 보자기를 가볍게 들춰냈다.
그 안에서 얼핏 보이는 청록색의 검.
검신은 언뜻 보면 보석을 조각해 둔 것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웠으며, 유려하게 굽이치는 물결의 무늬는 각도에 따라서는 푸른색으로 보이기까지 했으니, 뭇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염없이 존재하고만 있는데도 하나의 예술 같은 그 자태.
그럼에도 살갗이 에일 것 같은 예기에는, 옆에 서 있던 조지조차도 탄식을 표할 정도였다.
“……허, 미스릴이군요.”
“그렇소. 우리의 몫으로 받게 되어 있는 지분의 미스릴을 사용한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저들의 몫으로 받게 될 미스릴.
분명. 그날, 놈이 받아 가기를 요청했던 미스릴이었다.
나는 답지 않게 놀라움이 이는 것을 느끼며 녀석에게 물었다.
“그건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다고 인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만?”
이 정도의 순수 미스릴을 재련하기 위해서 그들의 쥐꼬리만 한 지분이 얼마만큼이나 갈려 나갔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것을 내게 주기 위해 사용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와 일족의 뜻이오.”
비록 첫 만남은 어긋났으나, 이제 그들의 일족은 1왕자라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진 지식이나 성품이 거짓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행보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나 요정의 계약 따위로 속박되지 아니하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요정의 눈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미스릴을 보다 완벽하게 정제하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었소. 미리 전해 주고 싶었지만 방금 완성된 탓에 그러지 못했지. 하지만 일족의 뜻이 전해졌으리라 믿소.”
“…….”
“크흠! 아, 아무튼 그대가 사용하던 검을 토대로 형태를 만들었으니 쓸 만할 것이오. 물론 그대가 이 정도론 만족할 리가 없…….”
“좋은 검이군.”
“어?”
순간 예상치 못한 답에 멍해진 수르트를 보며 물었다.
“검의 이름은 있나?”
“아니, 아직 그게…….”
“그렇다면 좋군. 마침 보자마자 하나가 생각났거든.”
떠오른 검의 이름.
그것은 선왕의 검을 잃어버린 어느 어리석은 왕이 사용하던 검의 이름이었다.
다시는 그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가다듬은 이의 다짐.
“이 검의 이름은 엘베른이다.”
나는 그리 말하며 엘베른의 검신을 길게 내빼었다.
그와 동시에 이를 감싸며 흩날리는 붉은 색의 오러.
꽃잎에 둘러싸인 것 같은 그 모습 위로 태양 빛이 쏟아졌다.
“거참.”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조지는 나직이 불만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이 하는 건 다 그림이 되네.”
그 모습이 마치 전설에서나 나오는 한 장면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