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38화
신의 뜻은 어디로 가는가 (1)
창문 밖 첨탑 위로 보이는 뾰족한 아치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다.
정적이고 지루한 은빛의 향연. 그 아래로 흩뿌려진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들이 눈을 간질였기에, 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따분하다.
그 어떤 이가 이따위 정경을 신록이 피어난 숲이라 표현했는가?
저가 보기에는 권세 따위로 점철된 허영심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스윽 고개를 돌려보니, 대성당 사이로 드러난 정갈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태양은 속세를 떠났으니, 어찌 우민들이 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으랴.
“……곧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이끌겠다 하시니.”
……
그 하염없는 중얼거림과 정적을 끝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백색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것은 다분히 진부한 일이었다.
그 끝에서 마주한 이들이, 다급히 전당의 문을 여는 것 역시 마찬가지.
“헛!”
“흠……! 신의 뜻이 함께하기를.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들은 나의 무엇을 보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일까.
어떤 것에 나를 비추어 보고 있는 것일까.
“…….”
어색하게 기워 놓은 침묵.
당연하겠지만, 마음속 파문에 답할 이는 없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전당의 문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신전을 연상시키듯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기둥들이 자신을 반겼다.
기둥은 인간이요, 저 천장의 높은 뜻은 신의 것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신을 섬기는 이들의 가치관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내부는 이미 회담이 시작되었는지, 그림처럼 정갈한 은색의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이번 일은 가벼이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일.
저들이 말하는 이번 일이라는 것은, 완충지대로써 작용하던 에스테반이 연방제국의 땅을 받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카롯트 연방제국은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인간들.
즉, 성국의 적이었기에.
거기에…….
“에스테반은 지금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히 인간의 영역을 이종족에게 내준 역사는 없었다.
인간이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주신의 은총이었으니까.
대륙은 신이 피조물에게 내린 은혜나 다름없었으니, 저들이 대륙의 땅을 양보하는 것은 가히 신의 뜻에 반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였다.
……까지가 대외적인 성국의 입장.
“대륙인들의 이목이 저들에게 향한 지금. 성국의 입장을 확고히 하여 배교자와 그 무리에게 철퇴를 내려 마땅하다고 생각되옵니다.”
팔을 휘적거려 가면서까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옳은 것을 행하는 자의 것이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과연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확언컨대, 저건 자신의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 그 뜻을 곡해하는 자들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버린 성국의 추태에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르한 대사제는 말씀을 주의하십시오.”
이를 중재하는 이는 아니었다.
온화하나 강직하고 위압적인 목소리.
이에 조금의 완곡함도 없이 철퇴를 운운하던 대사제가 몸을 흠칫하며 발걸음을 물렸다.
“교황 성하…….”
은색의 화려한 성복 위로 얹어진 금빛 망토.
몸짓에 가벼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신성력에 은을 엮어 놓은 듯 반짝거렸고, 그 투명한 눈동자는 온아하게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성국의 지도자이자 신의 대리인인 아델 드 로에나.
아직 불혹(不惑)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였으나, 적어도 그만큼은 이 썩어빠진 성국을 지탱해 주는 진정한 사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직 배교를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연방제국에게 받은 땅을 이종족에 양보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황이…….”
“아니요.”
교황의 손에 들린 지팡이. 영광의 홀이 살랑, 하고 흔들렸다.
“그들은 주신, 로에나의 뜻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외교적인 문제에 빗대어 배교를 언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
“단순한 정황 증거만으로 저들을 몰아세운다면, 카롯트의 배교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과거에 성행하던 잘못된 마녀사냥과도 다를 바가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교황은 전당의 기둥 면을 장식한 태피스트리를 쓰다듬었다.
교황은 존엄한 위치에 있었으나, 결코 사제들과 눈높이를 달리하는 경우가 없었다.
인간의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주신의 영광뿐.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교황의 좌(座)에 앉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타인의 잣대를 마음대로 해석하려 들지 마십시오. 인간은 언제나 실수를 반복하는 생물일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대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에스테반의 배교.
만에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기정사실화된다면 성국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이 분명했다.
에스테반으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성국 수도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는 말과도 다름없었으니.
“가르덴 대사제를 파견하겠습니다.”
“……!”
“이번 일에 대한 성국의 의사를 표명한다면. 그리하면, 그대들의 노여움도 한 층 가라앉겠습니까?”
전당에는 정적이 흘렀다.
대사제를 파견한다는 말은, 타국이 외교 사절을 보내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오랫동안 외교와 접점이 없었던 성국이 움직인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대사제를 파견시킨다는 이야기가 갖는 의미가 가볍지 아니하다는 것이었다.
‘이단 심문.’
혹은 흑마법사들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
뭐가 되었든 그들이 움직인다는 말은, 곧 성국이 몸을 움직이겠다는 말이었다.
“가르덴 대사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겠습니까?”
교황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한 사제에게 몰려들었다.
주름진 얼굴 속에서 엿보이는 엄격함과 진실함.
조금의 원만함도 보이지 않는 원리주의에는 요르한 대사제조차 미소를 감추지 못했으니.
곧, 가르덴 대사제의 입이 열리며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사 표명과 권고에 불과합니다. 하니, 이번 일은 성국의 비공식적인 손님으로서 파견하기로 하겠습니다.”
이에 철퇴를 운운했던 요르한 대사제가 미소를 감추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비공식적이라는 제한은 떨떠름했으나 만족스러운 이야기였다.
결국 이 또한 에스테반을 압박하는 수단이었음이 분명했으니까.
모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교황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수백 년 만에 등장한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 역시도 중요한 사항이니만큼, 추가적인 인원을 선발하겠습니다.”
“…….”
“혹 가르덴 대사제님과 함께 에스테반으로의 여정에 오르실 분이 있으십니까?”
“…….”
정적이다.
당연하다는 듯한 침묵에, 교황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렇군요. 아쉽게도 이곳에 계신 대사제분들은 움직일 여유가 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뭐.
까탈스러운 원리주의자로 유명한 가르덴 대사제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 이가 있을 리 없겠지.
애초에 그런 성격이니만큼, 함께한 이와의 마찰은 이미 예정이 아닌, 확정일 터니.
어지간한 인물이 아닌 이상에야…….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한 적임자는 최소한 대사제급 이상의 직책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성국에도 있어 중요한 사항이니 말이지요.”
그 순간. 불길한 듯 곤란한 교황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했다.
교황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
아, 그게 나였다.
“성국을 위해 또다시 힘써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어코 교황의 입에서 그 ‘대사’가 흘러나왔다.
“부탁드립니다.”
* * *
“……허어. 이것이 바로 조지 군이 말했던 미스릴 검이라는 것이군요.”
태양 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엘베른은, 집무실의 조명 아래에서도 역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직 미스릴로 이루어진 청록색의 검신.
드워프들의 기술력으로 정제되고 제련되었기에, 그 가치는 다른 명검조차 감히 이름을 내밀 수 없을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엘베른을 쳐다보던 비도르 남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사용하시던 검의 형태와 빼닮은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요.”
“일부러 형태를 기억해 두었다가 비슷하게 제작했던 모양이더군.”
“으음, 과연……! 조지 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던 이유가 있었군요.”
“녀석이?”
의외라는 듯 물어본 내 물음에, 남작이 답했다.
“예. 그들을 위해 직접 뛰어다니며 고생한 것은 자신인데, 정작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며 섭섭함을 표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긴 이동에 나가떨어졌기에, 일부러 아버님께 다녀오는 틈을 타 휴식을 명했건만.
투정을 부릴 정도라면 아무래도 꾀병이었던 모양이다.
‘하루를 쉬었으니 더 강도 높은 일을 시켜도 되겠군.’
그렇게 녀석의 처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휴가에서 돌아온 비도르 남작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도 훨씬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갓 마차에서 내리던 조지의 표정이 차라리 더 평온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나는 겉옷을 받아드는 비도르 남작을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죽상이군. 휴가가 아니라 파견을 다녀왔나?”
“예…… 아, 죄송합니다.”
그럴 만도 했다.
휴가를 다녀온 곳.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보금자리였어야 할 땅이건만, 임시 보좌관이라는 직책 탓에 다시금 왕성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현자 타임이라는 거다.
“……흠흠.”
비도르 남작은 자리에 앉은 내게 작게 헛기침하더니,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는 듯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갈데르드 평야에서 많은 일을 이루어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국왕 전하와의 회담은 어떠셨습니까?”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이미 아버님께는 모든 계획을 알려 드렸었기에, 이번 회담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보고 수준에 불과했다.
유의미하게 진행된 대화라고는 없다고 해야 할까…….
그나마 흥미를 느낀 점이 있다면, 회담에 참석한 것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동부의 발테르 후작.’
연방제국과의 전쟁이 불거진 미래에도 그 직무를 다해 냈던 재무대신.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에스테반의 충신 중 한 명.
그가 아버님과의 회담 자리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은, 아버님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척되었다는 뜻이었겠지.
실제로 광산과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의 그의 눈빛은, 가벼운 이야기라도 허투루 듣지 않겠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야기가 빠르니 잘된 일이었지.’
덕분에 드워프들에게 광산의 관리를 일임하는 것을 쉽사리 납득시킬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역시도 정보부처 설립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 넓은 의미에서라면 충분히 성과가 있는 회담이었다고 하겠다.
나는 천천히 다리를 꼬며 고개를 까닥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다. 휴식을 취하고 내일 다시 오도록.”
“……그렇군요. 때로는 쉬어가는 여유도 필요한 법이지요.”
“복귀 첫날부터 맡길 업무는 없다는 소리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지겠지.”
그런 내 손가락이 조지가 던져 놓고 도망간 짐 무더기에 향했다.
“이왕이면 저것도 같이 치워 버리도록.”
“…….”
그렇게 집무실에 거닐던 수하와 짐 덩어리가 떠나가자, 겨우 차분한 분위기의 집무실이 완성되었다.
갈데르드 평야에 지어졌던 임시 거처와는 다른 분위기.
“……좋군.”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또 안정감이 물씬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처음 회귀했을 때 느낀 일시적인 그리움과는 다른 감정. 숱한 전쟁에 나서면서도 느낀 적 없었던 시답잖은 감성이다.
나는 그 집무실의 그리운 향기 속에서 천천히 상념에 빠져나갔다.
간만에 찾아온 여유가 어쩐지 반갑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숙이…….
물론 그런 평화가 깨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다다다다다-!
집무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이에 차분하게 감겨 있던 눈이 점차 뜨여진다.
“남작인가.”
쾅-!
곧 문이 거칠게 열리고, 숨 가쁜 발걸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렇군.
그 발걸음의 무게로 짐작했거늘,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방금 나갔던 남작이 또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며 짧게 물었다.
“뭐지?”
“저, 그, 그것이……!”
그건, 평소의 호들갑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무언가 충격을 받고 당황한 듯한.
그 물음에 답한 것은, 뒤따라 집무실로 들어온 조지였다.
“방금. 왕성으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신성제국으로부터 사신단이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호오.”
“도착은 이틀 뒤.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말이겠죠.”
갑작스러운 외교 사절의 방문.
예정된 수순이라면 수순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에스테반에 있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 그뿐만이면 좋았겠지만…….”
신랄하게 어깨를 으쓱이던 조지의 분위기가, 순간 무겁게 변했다.
놈의 평소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의아할 정도로.
그렇게 말을 이어 가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들을 이끄는 이가 다름 아닌 성녀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