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40화
신의 뜻은 어디로 가는가 (3)
수도를 돌아다니던 성녀가 왕성에 도착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성녀님.”
“…….”
손님방.
땅거미가 지고도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 벌써 지났건만, 가르덴 대사제는 잠도 없는지 양초에 의지하여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무거운 음성에 발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움직이던 성녀의 몸이 찔끔 굳었다.
“아, 음. 깨어 있었구나.”
“제게는 성하께 부여받은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성녀님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래?”
칫!
쓸데없이 깐깐하다니까.
대사제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성녀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대사제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
“피, 피곤하기도 할 테고……?”
일단 이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건넨 말이었다.
이른바, 나 피곤해! 정도가 되겠다.
허나 성국 제일의 원리주의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찌 손님의 신분으로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비우셨습니까?”
“그, 그게…… 나는 에스테반의 실태를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성녀께서는 성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헌데, 고작 수도가 둘러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이탈하시다니…… 이런 식의 행동은 성국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나아가 마찰을 야기할 뿐입니다.”
“…….”
큰일 났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저건 진심으로 설교할 때나 나오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성녀의 교육을 맡았던 이가 가르덴 대사제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함의 끝은 지옥의 밤샘 설교.
설마 이대로 아침까지 설교를 들어야…….
……아!
“마, 맞다! 그러고 보니, 1왕자라는 사람은 어땠어?”
“…….”
“그 왜, 성하께서도 가장 우려하시던 부분이 그거였잖아! 최근 일어난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1왕자라는 사람이라면서…….”
성녀는 그렇게 말을 돌리면서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가르덴 대사제를 쳐다보았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일까?
대사제는 한숨을 내쉬더니 읽고 있던 경전을 안아 들며 말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었다고?”
“처음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인자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더니, 대화의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기회를 노리는 사자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부러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그런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위압감이 넘쳤다.
“탐색전. 아마 그에게 오늘의 담화는 내일을 위한 초석이었을 것입니다.”
“흐응.”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성녀께서도 내일을 위해 일찍 몸을 뉘시지요.”
“어? 응, 알았어.”
“안녕히 주무십시오.”
“응. 대사제도.”
철컥-
아자!
그렇게 가르덴 대사제가 손님방을 나서자, 성녀는 소리 없이 환호하고는 침대 위로 엎어졌다.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의 감촉.
세속적인 것을 제한하던 그 딱딱한 분위기의 방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절로 입술이 풀어지려 했다.
“…….”
허나 그런 황홀한 기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성녀는 얼굴을 파묻은 이불 위에서 몸을 뒤척여, 천장을 빼꼼 바라보았다.
곧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불에 얼굴이 가려져 먹먹하게 나온 채였다.
“뭔가 곤란해 보였지…… 가르덴 대사제.”
* * *
“성녀 유리엘. 어릴 적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 내던져진 것을 당대 교황이 거두어들임으로써 성녀로서의 운명을 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성녀의 이야기.
조지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그 양을 가늠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보고를 이어갔다.
“부모는 동반자살, 정확히는 극심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모양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이웃 주민의 말에 의하면 매일 밤 고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레 그렇듯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던 모양이겠죠.”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말끝을 흐리던 조지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아리송하다는 듯 말했다.
“신전에서 거둬들였다는 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만, 이게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하다?”
“굳이 따지자면 위화감을 느꼈다는 수준인데, 공교롭게도 사제가 된 성녀가 교황의 눈에 띈 것이 정확히 전대의 성녀가 병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은 직후라고 합니다.”
“……그렇군.”
“일단 조사한 내용들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만…….”
녀석은 그 뒤로도 보고를 이어 나갔다.
때때로 언급되는 쓸 만한 정보들.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내용이 간혹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성장 과정이나 대외적인 이미지는 물론이고 교육을 진행한 이들의 이름조차 가벼이 넘기지 않고 조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지는 여전히 가슴 속에 남은 의구심을 벗어내지 못한 채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리도 기다렸다는 듯 성녀로서의 품위를 주입시킨 것이?”
분명 성녀를 선택하는 일은 신의 역할.
교황은 주기마다 반복되는 신탁을 통해 새로운 씨앗을 확인하고, 신의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허나 이어지는 상황조차 너무도 공교로웠다.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예견할 리가 없거늘, 교황은 마치 처음부터 그녀 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듯 움직였던 것이다.
……뭐, 확실히 이상함을 느낄 만했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끼워 맞춰지는 지식들을 정리하며 이에 대해 답했다.
“당대의 교황은 그녀가 성녀의 자질을 가졌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예?”
순간, 조지가 황당해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알고 있었다니, 그게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비록 유년기를 지낸다 하더라도 성녀가 타고난 그릇은 교황에 견줄 만하지. 그들이 말하는 신성력이다.”
“그 말은…… 성녀의 운명을 부여받기 전부터 그 자질이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너무도 다른 정보가 아닌가?
녀석은 머리를 굴려 관련된 정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분명 성녀라는 이름에 가장 적합한 소녀를 신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는 하나의 상식으로써 인간들에게 자리 잡은 이야기였다.
실제로 신성제국이 그 일에 대해서, 신께서 ‘가장 적합한 소녀’로 교황의 사제를 선택했다, 라는 등의 핑계를 대기도 했고.
이야기만 들어보면 우연에 의구심이 들지언정, 그 진위를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상식이었다.
“처음부터 그 자질을 타고난다는 이야기는 생소한 내용인데요?”
“아니. 성녀의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다만 신성제국 측이 이에 대한 정보 자체를 통제하고 있었다는 게 맞겠지.”
“…….”
녀석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내 눈을 응시하더니,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진실이시군요.”
“당연한 것을.”
녀석이 품은 의구심의 정체는, 전대의 성녀가 급사했기에 똑바로 꼬리를 감추지 못한 신성제국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교단의 관리를 받는 성녀가 병으로 죽는 일은 전례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조지가 눈매를 좁혔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저들이 그렇게 움직일 이유가 있습니까?”
“있지.”
달빛에 번뜩이는 눈빛이 조지가 들고 있는 서류에 닿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미소는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 채였다.
“그리하면 세간에 보여지는 신성제국의 모습을 거짓으로 과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
신의 대리인이 신탁을 통해 성녀를 선택한다.
그 거룩한 행위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일 테니, 이만큼이나 대륙의 선민(選民)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요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는 신성제국의 수뇌부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꾸며진 믿음이었던 것이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조지가 입술을 뻐끔대더니 중얼거렸다.
“……정보를 통제하는 것에 이어서, 신탁의 존재마저도 꾸며 낸 것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래 전부터 내려온 신성제국의 사기극에 불과하다.”
“…….”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에서 오는 이야기와도 너무나 동떨어진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 하지만 신성력은, 그 타고난 신성력이라는 것은 결국 신이 선택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들로서는 거짓말에서 오는 리스크를 감내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정확하다.”
“그렇다면…….”
“단. 그 사실은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소녀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에 한해서겠지.”
“……!”
나는 충격에 말문이 막힌 조지를 보며, 몸을 숙여 책상의 한 곳을 짚어 냈다.
낮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허나 그런 내 입술은 거칠게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 * *
아침.
본래라면 하루를 준비하는 시녀들의 움직임으로 활기찼을 왕성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상태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지.”
상석에 계신 아버님께서 무거운 분위기를 바로잡으시자, 곧 예의를 차리던 이들이 자리로 움직였다.
네모나게 이어진 대리석의 기다란 책상.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두 국가의 대표.
대전의 공허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절박한 공기 속에서, 회장은 명백히 두 세력으로 갈라져 서로를 바라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비공식적인 손님이라도 에스테반의 손님이지. 하여, 짐은 두 국가 간의 유의미한 대화가 오가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하였다.”
한 국가의 대표가 아닌, 회담을 이끌어갈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겠다. 아버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내게 눈길을 주셨다.
나는 그런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테반의 1왕자, 알렌 에스테반입니다.”
단지 손님을 맞이하는 어제의 담화와는 달랐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는 에스테반을 대표하는 이가 앉아야 할 자리이자, 이해관계에 있는 당사자의 자리였다.
즉. 본격적인 축제의 광대가 되는 무대였던 것이다.
그런 내 시선은 정면, 은빛 사제복을 입은 이들을 향한 채였다.
“다시금 소개 드립니다. 성국의 대사제, 가르덴입니다.”
노년의 중후한 음성이 회장을 가득 채운다.
얼굴에 진 주름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직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성녀, 유리엘입니다.”
이어진 가련한 목소리.
회장에 위치한 세 명의 이목이 풋풋한 복숭아색 향기에 이끌려, 창백한 듯 투명한 하얀 색의 피부에 잇닿았다.
그렇게 어느덧 쌀쌀해진 가을의 공기 속에서, 나는 마침내 은빛의 소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드디어 등장했군.’
새로운 변수.
그리고 이 회담을 이끌어 갈 열쇠.
성녀의 일행을 바라보는 내 미소는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고, 곧 깔끔하게 끝맺음한 자기소개에 고개를 끄덕이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에스테반의 가을은 쌀쌀하기로 악명 높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도착이 늦어졌다 들었거늘,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음, 그랬다면 다행이군.”
긴장감으로 굳은 것일까, 아니면 그 스스로도 성격을 자제하고 있는 것일까.
의자에 달라붙어 차분한 대답을 꺼내고 있는 성녀의 모습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저 점잖은 모습이야말로, 꾸며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제 가식적인 인사는 끝났다.
“사사로운 대화는 어제의 것으로 충분하겠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고, 곧 내 시선 역시 그 맞은편에 앉은 가르덴 대사제에게 머물렀다.
가벼운 눈짓이었으나 그의 눈빛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떤가.”
“자리에 위치해 주신 이들께서는 바쁘신 몸이니, 어찌 불청객이 이 이상 시간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예의에 합당한 대사였겠으나, 그 속내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입장에선 에스테반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겠지.
특히나 어제의 담화로 기시감을 느꼈다면 말이야.
“서신의 내용과 어제의 대화로 짐작하건대, 신성제국 측의 의문은 두 가지. 하나는 연방제국과 에스테반의 관계에 있겠으며, 다른 하나는 드워프를 받아들인 일에 있겠지. 내 짐작이 틀렸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성하께서 우려를 표하신 부분은 그 둘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군.”
그는 억지로 얼버무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게 아니라면 신성제국이 움직일 까닭이 없거니와, 그런 수작이 통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신성제국의 입장에선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
순간, 냉정하고 직설적인 말에 대사제의 주름진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조금의 대화도 없이 이어진 결론으로의 발단.
그 모습이 마치 그대들이 읊는, 겉 사정 따위는 관심 없다고 못 박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기에…….
하지만 그 얼굴에 비친 당혹감도 아주 잠깐이었다.
“……좋습니다.”
냉철한 눈빛을 교환하던 대사제가, 품속에서 교황의 칙령을 꺼내 들고 엄중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황제를 신격화하는 교만한 집단. 이에 협력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종족에게 인간의 땅을 내어준 것 역시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하여, 성국의 대사제들은 에스테반과 연방제국의 강력한 외교적 단절, 그리고 이종족들에 대해 보다 정확한 사상의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외교적 단절의 범위는 그 땅으로부터 드나드는 모든 상행까지 포함된 강력한 규제입니다. 이는 단순한 권고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가르덴 대사제는 그렇게 엄포하며 칙령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무리한 요구. 그리고 시작된 신성제국의 본격적인 압박.
앞서 연방제국 측에서 움직임을 보였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는 모양이었다.
허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리를 꼬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인 손님이라기엔 권고사항이 많아 보이는데.”
일반적이라면 수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아마도 그게 바로 제 뜻이 옳다 여기는 이들이 원하던 상황이었겠지.
문장 하나하나에서 신성제국을 움직이는 대사제들의 역겨운 욕망이 엿보였기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니. 이미 그 입술은 비뚤게 올라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