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44화 (44/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44화

신의 뜻은 어디로 가는가 (7)

“흐음.”

나는 침음을 흘리는 동시에 손을 움직여, 테이블 주전자에 놓인 찻물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색한 공백을 이어 주는 정적과 향긋한 차 내음.

하지만, 여유로이 움직이던 손이 멈추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럴 순 없습니다.”

“어…….”

……그럴 수 없다고?

순간,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설마 자신의 질문을 단박에 일축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을까? 그렇게 두 눈을 끔뻑거리며 대화를 곱씹는 모습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왜요?”

“그걸 가르덴 대사제도, 교황께서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그런…….”

정보를 듣는 것은 자신인데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문이 막힌 듯, 당황한 채로 한참 동안이나 대화 내용을 곱씹던 성녀는.

“……엥?”

처음의 차분한 연기는 어디로 갔는지, 웬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찻잔 위로 주전자를 기울이며 그 향내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냥 알려 주기 싫은 게 아니구요?”

“납득하기 어려우시겠습니까?”

“아니, 그, 그치만…….”

이번 회담에서 신성제국을 움직인 열쇠는 그들의 비밀과 관련된 것.

때문에 정보를 공유해 줌으로써 그 가치가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면 모를까, 고작 두 사람이 원치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는 말은…… 어찌 되었든 핑계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생각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실은 성국으로 돌아간 가르덴 대사제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성녀께 그 비밀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말이지요.”

“……네에?”

가르덴 대사제의 이름을 언급한 그 순간부터, 성녀의 눈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당최 본모습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대는 것이, 퍽 당황하긴 한 모양이었다.

“대사제가 부탁했다고요? 전하께?”

“그렇습니다.”

“…….”

이는 한낱 대사제가 성국을 이끌어 가는 성녀의 눈을 가리겠다는 것과도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의 부탁도 아닌, 믿었던 가르덴 대사제로의 부탁.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가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뭐…… 그, 그렇게까지 했다면, 분명 제가 알지 못하는 뜻이 있었겠…… 지요?”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는 성녀의 모습에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보다 대사제의 인품을 잘 아는 그녀이기에, 간곡한 부탁을 청했다는 대사제의 행동에 더욱이 당혹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오랜 기간 동안 함께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모종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던 것은 대사제 역시 마찬가지.

때문에 대사제는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부탁을 청해 왔다.

-부디, 성녀께서 그 짐을 짊어지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교단이 그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벌여 온 행각들. 그 죄악.

이는 한낱 인간에게 짊어지게 하기에는 불합리할 정도로 과분한 업보였다.

고작 순리에 따라 성녀의 자리에 오른 이 소녀에게, 하나의 신자였을 뿐인 성녀에게 그 짐을 짊어지도록 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울 정도로.

……물론 그따위 가식적인 입장과 뜻은 오롯이 그의 것.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녀는 지금의 모습으로 지내 줘야겠지.’

그것이 보여 주기식이든, 아니든.

연방제국을 견제하는 두 국가의 외교적 우호는 신성제국이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성립된다.

그러니 나 역시도 이 지루한 소꿉장난을 끝낼 생각이 없었고, 비로소 성녀는 신성제국과의 협력이 진행되는 동안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 틈새 없이 짜여진 의도하에서, 영원히.

“그래도 정녕 들으시겠다면, 알려 드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

정녕 악마와 같은 유혹이었다.

하지만 성녀는 팔을 휙휙 내저으며 거부의 뜻을 밝혀 왔다.

“아, 아뇨!”

“듣지 않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어련히 알려 주실까 싶어서…….”

“호오.”

할아버지와도 같은 그의 염원을 무시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행동에 짧은 감탄사를 마치며 읊조렸다.

“좋습니다. 적절한 때가 다가온다면 감추어졌던 진실을 알려 드리지요.”

“적절한 때라면…….”

“글쎄요. 그것만은 신께서 아실 따름이겠지요.”

나는 그렇게 의뭉스럽게 말하며 채워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무감한 눈은, 천진난만하게 끔뻑거릴 뿐인 성녀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의아할 정도로 시린 시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한편.

집무실 밖으로 내보내진 조지는 남작의 눈치를 보더니, 뒤꿈치를 들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중앙계단으로 접어드는 복도의 반대편.

가히 살수와 같은 움직임이라 자부하였으나, 남작은 이를 놓치지 않고 조지를 낚아챘다.

“캑!”

꽉 잡힌 옷깃이 목을 압박해 닭목 비트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창문에 언뜻 비친 남작의 얼굴이 무시무시했다는 탓도 있으리라.

“조지 군, 어딜 가려는 것인가.”

“아, 아무래도 오늘 일과는 끝난 것 같은데 저는 이만 방으로…….”

“그건 자네의 바람일 뿐이네. 전하께서 휴식을 명하시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야.”

비도르 남작은 붙잡은 옷깃을 놓으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저 남자, 아무리 봐도 성녀와의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 문밖에서 기다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미친 짓이다.

“그리고 자네는 일과가 끝나는 대로 나를 찾아와야 하지 않는가?”

“…….”

……진짜 미친 짓이다.

조지는 댓 발 나온 입술을 지레 우물거리며 남작의 옆으로 나열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문 옆으로 귀를 가져다 대는 것이, 제 상관이 성녀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왕족 집무실의 방음이 귀를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뚫릴 리는 없었다.

“……뭐, 대충 비밀 이야기나 하고 있겠지.”

그렇게 어깨를 으쓱인 조지가 남작에게 말을 걸었다.

“남작님은 뭐 추가적으로 들은 거 없습니까?

“신성제국에 관련된 것 말인가?”

“예, 뭐. 그런 것도 좋고 연방제국과 관련된 내용도 좋고.”

“……흐음.”

비도르 남작은 1왕자의 명령으로 미스릴과 드워프에 관련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 아마도 회담이 진행된 이래로 밤낮을 지새우며.

꼬박 며칠을 1왕자와 함께했을 것이 분명하니, 적어도 조지 자신보다는 들은 것이 많으리라.

남작은 작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하께서는 원체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보니, 별달리 들은 것은 없네.”

1왕자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뜻을 밝히는 일이 없었다.

차분히. 그리고 물밑에서부터 움직여 ‘확신’을 만든 뒤에야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남작이 아는 1왕자는 그랬다.

“다만. 이번 일 역시도 전하께서 기다려오신 사태임이 틀림없겠지. 전하께서 지금까지 감추고 계시던 평야의 정보를…….”

“쉿.”

“…….”

조지가 남작의 말을 끊어 내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댄 그 순간.

꺾인 복도 너머로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왕실 수호 기사단.

그는 순찰을 도는 듯 경직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거닐었고, 곧 남작과 조지를 지나쳐 다음 구역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하세요.”

“……전하께서 지금까지 감추고 계시던 평야와 미스릴의 정보를 언급하신 것 역시도 그 ‘확신’이 무르익었기 때문이시겠지.”

“결국 이 모든 것이 전하께서 기다려온 일이라는 겁니까?”

“…….”

“1왕자 신봉자도 아니고 그 절대적인 믿음은 뭡니까 대체.”

“…….”

조지는 한껏 놀리며 눈썹을 들썩였다.

뭐.

그렇게 말했다지만 녀석이 보기에도 확실한 추측이었다.

미스릴이 감춰진 연방제국의 땅을 받은 것도.

드워프들을 시켜 성벽을 짓게 한 것도.

결코 세상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미스릴의 정보를 신성제국에 넘긴 것도.

연방제국과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지원을 ‘자의로’ 받아 낸 것도.

이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 이어지지 않았던가?

‘정말로 대륙의 흐름이 스스로에게 닿도록 유도한 것만 같단 말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1왕자는 연방제국에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제 아버지를 암살하고 에스테반을 빼앗으려던 적들에 대한 분노?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짙고, 끈적한 살의에 가까웠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을 보면 안다.

‘만일, 실제로, 정말로 이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유도된 상황이었다면.’

처음, 연방제국의 세작이었던 아수스 백작을 베어 냈던 때부터.

혹은 그보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비로소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한데, 궁금한 것이 있네.”

조지는 들려온 비도르 남작의 의문에,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정신을 깨웠다.

“음? 뭡니까?”

“방금 전의 일, 말이네.”

“방금 전이라면…….”

아, 금방 지나간 기사를 말하는 건가?

“분명 왕실 수호 기사단이었죠. 그게 왜요?”

그렇게 삐딱한 자세로 되묻는 조지에게, 남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지 군,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어쩐지 그를 경계하는 것만 같았다네.”

“경계요?”

“평범하게 목소리를 줄이면 되었을 것을, 말을 끊어 내면서까지 주의하지 않았는가?”

“……아아.”

기사는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저 복도 너머에서부터 걸어오는 기사를 미리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 거리에서 두 사람의 밀담을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냥 짐작 같은 겁니다.”

“짐작? 왕실의 기사인 그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짐작한다는 말인가?”

“비슷합니다.”

조지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알아보니, 얼마 전까지 왕실 수호 기사단을 후원하고 있던 이가 아수스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분명…… 생전에는 그랬다고 알고 있네.”

남작은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 국무 회의에 불려 나오셨던 1왕자 전하께서, 때문에 아수스의 후원을 받았던 왕실 수호 기사단장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놈들은 아마도 후원자를 죽인 1왕자 전하를 고깝게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공개적인 자리에서 망신을 받은 기사단장은 확실하겠죠.”

“음? 고작 그런 이유로…….”

“뭐, 고작이라고 할 만한 이유는 아닐 겁니다.”

능력만을 대우하는 아르곤 기사단과 태양 기사단과는 달리, 제1 기사단인 왕실 수호 기사단은 그 출신 성분이 확신한 사람들만을 뽑는다.

말인즉, 기사 전원이 귀족의 자제이며, 그 소속이 갖는 명예는 여느 기사단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1왕자는 그들의 프라이드를 짓밟았다.

후원자가 사실은 내란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를 가감 없이 공표하며 국무회의에서 대대적인 망신까지 내렸다.

이해관계만을 좇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이건 어마어마한 무시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첫 번째 이유.

마침내 조지는 남작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비밀을 읊조리듯 낮게 속삭였다.

“제가 기억하는 이 시간대의 순찰은, 왕궁의 정문과 후문. 그리고 별관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복도를 지나가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죠.”

“…….”

작디작은 사소한 정보.

어쩌면 왕궁의 사용인 중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보였으나, 조지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최근 제 귀로 기이한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소문?”

남작이 물었고, 조지는 더욱 작게 속삭였다.

“2왕자의 외조부인 윌리엄 공작이, 왕실 수호 기사단의 새로운 후원자라는 소문 말이죠.”

“……!”

철컥-!

그때, 집무실의 문이 급작스럽게 열리며, 성녀가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조금은 후련한 듯 골몰히 눈을 빛내던 성녀는 두 수행원을 지나쳐 갔고,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던 조지와 남작은 집무실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여유로이 찻잔을 들어 올리던 1왕자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그들에게 명했다.

아직 일정을 마치기에는 이른 시각…… 아무래도 조용히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남작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시선을 옮겨 조지를 바라보았다.

“조지 군, 그럼 지금부터 자네는 나와 같이 교육을…….”

……

……아.

조지는 이미 저 멀리 복도를 달아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나온 조지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접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되물어 왔다.

“사찰이요?”

갑자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