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45화
도약, 혹은 도태 (1)
에스테반의 왕도(王都)는 전 대륙을 통틀어서도 치안이 좋은 편에 속했다.
아무런 걱정 없이 골목길을 거닐 수 있었고, 때로는 야밤에도 축제가 벌어질 만큼이나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적었다.
전체적인 크기가 작아 관리하기 쉬운 탓도 있겠으나, 비단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라 단언하겠다.
‘기사의 나라’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는, 그 용맹한 이명답게 기사.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벼운 경범죄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으며, 경비대가 해결하기 어려운 중범죄의 경우는 왕실 제3 기사단인 아르곤 기사단의 도움만 받는다면 문제없이 처리 가능했다.
기사들의 왕이 다스리는 안전한 도시.
그럼에도 경비대의 일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결국 치안을 어지럽히는 범죄자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리라.
“오전에 사로잡힌 범죄자는 네 명. 그중 한 명은 범죄 이력도 없고 단순히 난동을 부리다 체포된 것이기에, 가벼운 조처가 내려질 예정입니다.”
경비대장은 보고를 이어 가던 수하의 목소리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난동을 부린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
“그는 이웃 영지에서 활동하는 학자인데, 당시 확보한 주변인의 진술로 추측하면, 사기를 당한 뒤로 술김에 난동을 부린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히는 난동이 아니라, 대로변에 드러누워 있다가 경비대에 인계를 당한 것이긴 해도…….”
“……후우.”
퍽 감정이 실린 한숨이었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무슨 학자란 사람이 대낮부터 술을 처마시고 길거리에 나자빠져…….
그렇게 잠시 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싸 쥐던 경비대장이 말했다.
“범죄 이력은 없다니까 대충 훈방 처리하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아, 잠깐만.”
우뚝-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수하의 몸을 멈춰 세웠다.
제일 중요한 것을 깜빡한 것이다.
수하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자, 경비대장은 찡그렸던 표정을 애써 풀어내며 물었다.
“그리고 보니 그 난동을 부렸다고 하는 학자의 이름은 뭔가?”
“엘 바르도 라고 합니다.”
“엘 바르도?”
생소한 양식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남부 대륙의 것이려나?
그럼에도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이었다.
“엘 바르도…… 엘 바르도…….”
그 순간.
“……공문?”
문득, 익숙함의 이유를 헤아리던 경비대장의 머릿속으로, 얼마 전 왕실 측에서 내려온 공문의 존재가 떠올랐다.
당최 무슨 내용이었던가?
그렇게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나가던 경비대장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섰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넘어졌으나 신경도 쓰지 못했다.
“……당장, 당장 보고서를 준비해.”
“예? 누구한테…….”
“이 자식이 얼마나 됐다고 공문도 까먹어!”
어리바리한 부하의 행동에 경비대장은 책상에 놓여 있던 만년필을 던졌다.
이에 화들짝 놀란 부하가 펄쩍 뛰며 피하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공문을 내려보내신 1왕자 전하께 말이다, 멍청아!”
“……아.”
에드워드는 책상 서랍에서 편두통 약을 꺼내서 입속으로 털어 넣은 뒤, 목젖을 툭툭 치며 억지로 삼켜냈다.
“지금 당장 엘 바르도라는 학자가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께 알리고, 경비대를 보내 그의 위치를 추적해라!”
“예? 예!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당장!”
그렇게 지시하는 경비대장의 표정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 * *
엘 바르도?
북부인의 이름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조지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뭐, 그건 대충 알겠는데…….”
그러고는 이내 귀찮음이 만연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학자랑 사찰이랑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수도의 상점가.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활기찬 장소에, 로브를 두른 두 인영이 나타났다.
생기가 넘치는 거리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얼굴을 가리듯 후드 자락을 내린 모습은 사뭇 수상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두 사람의 허리춤에 달린 인식 저해의 아티팩트는 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두 사람이라는 것은, 사찰이라는 명목하에 거리로 나온 나와 조지를 칭하는 것이다.
“애초에 굳이 전하께서 움직일 이유가 있습니까? 듣자 하니 사기를 당해서 쫓기고 있다는 것 같은데, 그 정도라면 대충 경비대를 시켜 조사하라고 이르면 그만일 거고…….”
분명 녀석은 나와 함께 왕성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주위를 살피며 남작의 기척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의 거리를 거니는 지금에서는,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는지 다시금 본래의 늘어진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웬 야생의 초식 동물도 아니고…….
나는 한심한 눈길로 녀석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기회는 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찾아오는 법이지.”
“…….”
“교육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따라와라. 어차피 네놈도 남작에게 걸리면 좋은 꼴을 보진 못할 테지.”
“예에.”
“그리고…….”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힌트를 남겼다.
“앞으로 네가 맡을 일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예에…… 예?”
나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 화들짝 놀라는 조지를 뒤로하고, 상점가의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더 걸어가자, 그 끝에 자리 잡은 허름한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눈에 띄는 간판에 적힌 ‘모험의 쉼터’라는 글귀만이, 낡은 건물의 용도를 짐작게 했다.
“여관이네요.”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지.”
그 말에 조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확실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녀석은 주변을 휙 훑어보더니, 몇 가지를 확인하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숨은 감시가 있군요. 아무래도 좋은 의도로 지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뒷골목 암흑가의 세력들이 위치한 장소다.”
나는 녀석의 결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에스테반의 치안이 좋다고 하더라도, 혼돈(混沌)을 자처하는 범죄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왕실에서 이를 인정해 줄 리는 없을 따름이니,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려거든 그 눈을 피해 음지로 달아나야만 했다.
“어쩐지…… 가을바람에 춥지 말라고 로브를 입힌 건 아니었나 봅니다.”
조지는 그렇게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따라 여관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부로 들어서자 보인 것은, 은은한 주황색 조명 빛 아래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술잔을 든 채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용병들의 모습.
좋은 용도로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고는 해도 외형만큼은 서민 여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위기에 맞춰 적당한 테이블로 앉은 조지가 말했다.
“그래서,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이곳으로 오신 이유는 뭡니까?”
“경비대의 조사에 의하면, 예의 학자는 매일 이 시각에 맞춰 여관에 방문한다고 하더군.”
“굳이 이런 곳에요?”
“이런 곳이니까 방문하는 것이겠지.”
그는 사기를 당한 뒤에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이웃 영지에서부터 빚쟁이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달아났다고 했다.
당연히 추적당하는 처지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이곳, 으쓱하고 인적 드문 곳에 있는 장소까지 흘러들어 올 수밖에 없었을 거다.
적어도 정보는 남지 않는 장소인데다 겸사겸사 추격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나름 적절한 은신처라고 판단했겠지.
게다가.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술에 취해 정보를 흘리고 다닌 것을 보면 썩 훌륭한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기를 당했기에…….”
“못해도 천만 골드 이상의 금액을 빚지게 되었을 것이다.”
“캑!”
눈이 번뜩 뜨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
“그게 진짜입니까?”
“연구의 투자와 관련된 사기라고 하더군.”
“…….”
때문에 조지는 혀를 내두르며 오만 상을 찌푸렸다.
물론 이는 세간에 알려지지도, 경비병들이 알아내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미 사건의 모든 전말이 그려지고 있었다.
평범한 학자가 어째서 그런 거액의 빚에 쫓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사기’의 수법과 그 배경이 무엇인지도.
‘이번에는 확실히 뒤를 잡을 수 있었군.’
경비병들에게 공문을 내려, 예정대로 난동을 부린 그 학자를 주시하게 한 것도.
엘 바르도라는 이름을 듣고 사찰을 나선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전하께서 직접 오신 겁니까? 그 정도 금액의 투자 사기라면, 필시 썩은 귀족들도 연관되어 있을 테니까요?”
“글쎄.”
나는 상황을 짐작하던 조지가 뱉은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꽤 핵심에 다가간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내용이다.
결국 이 사건의 주요 포인트는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느냐’에 불과했으니까.
곧이어 녀석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뭐, 결론은 목표가 오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군요.”
“그렇다. 정보에 따르면 아마 머지않아 도착하겠지.”
“……기다림을 빙자한 술집 탐방쯤 되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녀석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비도르 남작이 기다리는 왕궁에 있는 것보다는, 휴식을 겸해서 사찰을 나서는 것이 합리적이었으므로.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그들을 발견한 종업원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식사하시려고요? 주문은 어떤 걸로 도와드릴까요?”
척-
종업원의 손에 들린 메뉴판이 테이블 위로 펼쳐졌고, 나는 조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우선 맥주 한 잔에 핫초코 하나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자리를 떠나가려던 종업원을 가로막은 것은 조지였다.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보자, 녀석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뭡니까? 그 핫초코라는 어린아이 같은 선택은!”
“네놈이 마실 음료다. 필요 없나?”
“전하도 저랑 같은 나이가 아닙니까? 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핫초코는 무슨…… 아, 아니, 그건 그렇고.”
조지는 종업원의 눈치를 한 번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맥주라니, 그거 용병들이나 마시는 싸구려 술이라고요?”
녀석이 당황한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메뉴판에 적힌 이름 중에는 분명 귀족들도 즐기는 와인들도 꽤 존재했다.
시세보다 꽤 비싼 가격에 팔리기는 하나, 그렇게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었다.
한데 그런 많은 음료 중에서 하필이면 맥주를 택하다니…….
“나도 안다.”
“…….”
물론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로서는 꽤 흡족한 선택이다.
회귀 전 숱하게 겪었던 전쟁들.
자욱한 먼지의 바람 속에서 끈적한 혈 향을 맡으며 넘기던 맥주잔의 그 쾌감은, 내게 그리움과 같은 것이었기에.
오히려 왕성으로 납품되는 일이 없다 보니, 일부러라도 마시고 싶었던 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지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어랍쇼? 이게 웬 보기 힘든 얼굴이랍니까?”
등 뒤에서부터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
나는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구석진 테이블로부터 친근하듯 유유히 다가온 남자는, 분명 낯선 얼굴이었다.
“내 맥주도 한 잔 사 줬으면 좋겠는데요?”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 정체를 느끼고 있었다.
한없이 가벼워 바람 위를 걷는 것만 같은 그 기척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 남자’만의 고유한 속성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다가온 남자는 입술을 내 귓가로 가져다 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알베도 에스테반.
그는 일국의 2왕자면서도, 자유를 좇아 달아나려고 발버둥 치는.
……독특한 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