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67화
석연치 않은 작전 (2)
아렌델의 왕궁으로 통신이 도착했다.
발신지는 에스테반의 왕국 마탑.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가로지른 이역만리로부터의 급보였다.
“엔테 자작이 연락을 보내왔다고……!”
“그, 그렇습니다!”
최근 갑자기 마력장이 흔들리며 통신 불안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먼 거리에 통신을 보내는 일은, 엔테 자작이 지닌 통신구로는 불가능했다.
그 말은, 사절단으로 찾아간 엔테 자작이 어떻게든 에스테반과 접선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아렌델의 국왕은 긴장된 표정으로 통신의 내용을 확인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긴장감은 환희로 변했다.
“오오, 신은 아직 아렌델을 버리지 않으셨단 말인가!”
통신에 담긴 내용은 1왕자와의 알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서 놈들을 막아 낼 전략을 받아 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
국왕의 몸이 환희로 잘게 떨려왔다.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지원이었다.
한 번의 기회만 있다면 병력을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해 낼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하지만 통신의 내용을 읽어 나가는 국왕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건.”
‘전략.’
거기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1왕자가 가르쳐 준 전략이라는 말이고, 그들이 앞으로 행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 도저히 ‘전략’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루빨리 동부 형무소에 갇혀 있는 카라반 자이트를 해방하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아래와 같은 단어들을 제시하십시오.
국왕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 아래 적혀 있는 단어들을 줄줄이 읽어 나갔다.
“……북부, 곡창지대, 엘란데 협곡, 퇴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람?”
국왕의 표정은 그만큼이나 곤혹스러웠다.
* * *
나는 달빛을 벗 삼아 와인 잔을 기울였다.
소란스러웠던 오밤중의 일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집무실 내부에는 어느새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순간의 여유와 감정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전하.”
그렇게 와인 한 병이 모두 비워졌을 때쯤.
고국으로 돌아갈 손님들의 배웅을 마치고 비도르 남작이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뒤에, 남작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을 터다.”
“…….”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작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루도 쉬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다분히 자기만족에 불과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든 원동력은 ‘애국심’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이용했다. 우습게도, 나는 에스테반의 귀족들에게서 거짓된 애국심을 찾는 한편, 이득을 위해 타국의 귀족들이 가진 거짓 없는 감정을 노린 것이다.
비도르 남작이 얼굴을 굳히며 물어 왔다.
“……전하. 아렌델이 이대로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그들이 내 조언을 무시할 거라는 말인가?”
“전하께서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의 입장이시니, 그럴 가능성은 없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들도 알고 있을 터다.
이 전쟁은 나와 오롯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러니 만일 내가 내비친 구원의 의사가 미덥지 않다면, 정녕 그 순리대로 멸망의 길을 걸으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말대로, 내 전략은 일개 개인이자 외부인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상황이 아니지.”
“…….”
“그렇다면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디 1왕자가 넌지시 점지해 준 전략이, 자신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주기를 말이야.”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명확한 전략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단지 저들에게는 일어설 수 있는 계기만을 내주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 선택은 틀림없이 아렌델을 일으켜 세우게 하리라.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올바른 자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었으니.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설계였다.
“이변은 없다.”
때문에 나는 고고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저들에게서 돌아올 이득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에스테반이 지금보다 위대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 * *
동부 형무소. 그곳은 여러 이유로 수감된 범죄자들을 가둔 아렌델 최대의 교도 시설이었다.
하지만 동부 형무소가 최대의 교도 시설이라 불리는 이유는 비단 그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중대 범죄자들의 무덤.’
그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결코 살아나올 길이 없었으며, 죽어서조차도 그 형을 이어 가기로 유명한 아렌델 최대이자 최악의 교도 시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심연 속에서도 카라반 자이트는 단연 눈에 띄는 범죄자였다. 그곳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렌델의 기둥 중 하나인 자이트 후작가의 가주라고 불렸으므로.
뚜벅- 뚜벅-
형무소의 최심부로 내려가는 왕세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귀족들과 안내를 맡은 교도관이 열을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왕세자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귀족은 이 상황이 우려스러운 듯했다.
“……전하. 부디 생각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카라반 자이트, 그는 왕족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 된 흉악범입니다.”
오 년 전.
왕성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은,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자이트 후작가를 추락시켰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국왕의 막내아들. 그리고 그 옆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쥐고 있던 카라반 자이트.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으나, 끝내 죄인의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왕세자라고 해서 이 상황이 석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도 알고 있네.”
오히려 그는 남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카라반 자이트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정녕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까지도.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네.”
에스테반의 1왕자가 보내온 통신. 그 안에 담긴 전략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불렀으나 모두 알 수 없다는 대답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1왕자는 카라반 자이트의 이름을 언급하며, 반드시 그에게 해당 단어들을 제시하라 말했다.
“그건, 적어도 카라반 자이트라는 남자만큼은 자신의 전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다.”
“어찌 그렇게 될 거라는 자신감이…….”
“……에스테반의 1왕자만이 아는 진실이겠지.”
왕세자의 눈이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저 그 확신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라야 할 뿐이었다. 또한 그런 카라반 자이트가 진실로 자신들을 도와주기를…….
“도착했습니다.”
철컥-!
마침내 왕세자 일행이 다다른 최심부의 문이 열리고,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랜턴이 그 지옥의 내부를 비추었다.
세 평 남짓의 작은 공간. 햇빛이 드나들 수 있는 창조차 없는 회색의 벽면. 마지막으로 썩은 내가 가득한 지하의 밀폐된 공기.
……거기에 있는 것은, 왕국 기사단의 옛 단장이라 불렸던 남자였다.
“미천한 곳에 높은 분들이 오시다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라반 자이트.”
“그래, 무슨 일로 이 나를 찾아왔소?”
그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반가웠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격한 환영의 인사를 보냈다.
랜턴의 불빛 사이로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날것의 근육들이 보였다.
왕세자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겠다. 지금부터 왕명에 따라, 그대를 야만족 수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게 무슨 소리요? 총사령관? 누구? 나를?”
“지엄하신 국왕 전하의 명령이다. 무릎을 꿇고 받들도록.”
“……하하하! 그렇구먼!”
카라반 자이트는 눈앞에서 펼쳐진 황당한 상황에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황당함과 호탕함은 결코 일맥상통하지 않았으나, 이 꼬락서니를 보라!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악귀와 같은 눈빛 속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살의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치병에 걸린 늙은이들이 드디어 미쳤나?”
“……감히!”
한 귀족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를 막아 세운 것은, 국왕의 칙서를 손에 든 왕세자였다.
“카라반 자이트. 이 상황이 납득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이 지옥 속에 가둘 때에는 살인귀 취급을 하더니, 이제는 나를 입맛대로 다루려고 하나?”
“…….”
왕세자는 침묵했다. 그와 반대로, 카라반의 이죽거림은 점차 심해졌다.
“무고한 옥살이가 이어진 지도 벌써 오 년이다. 인제 와서 총사령관이니 뭐니 지껄인들, 내가 눈 하나라도 깜빡할 것 같으냐?”
“…….”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는 그 작태에는 이골이 나는군. 네놈을 친우처럼 보듬어 주던 옛정마저 잊고 쳐 죽이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는 그렇게 씹어 뱉듯 말하며 감방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발목에 달린 쇠사슬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냈으나,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순간.
“…….”
입술을 깨물던 왕세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미리 언질이라도 되어 있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자리를 비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감방을 가득 채우던 이들이 모두 나가자, 왕세자가 카라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총사령관의 임무가 끝나면 그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보상해 주겠다.”
“보상? 무슨 말이지?”
“짓밟힌 명예와 충심, 그리고 가문의 영광까지. 그대를 구국의 영웅이자 공작으로 추대해 주겠다는 뜻이다.”
“뭐라?”
카라반 자이트의 눈에 처음으로 이죽거림이 아닌 다른 것이 깃들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거대한 근육들이 시선을 따라 꿈틀거렸다.
“국왕이 이를 허가했다고? 내 모든 죄를 사하고 공작 위를 내리는 것을?”
“…….”
“하!”
왕세자는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로써 이 제안이 국왕의 의지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카라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애증. 결국 그 역시도 사사로운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잠시 후. 카라반 자이트의 눈이 번뜩 뜨여졌다.
“내 명예를 되찾으려거든 단순히 작위만을 내리는 것이 아닌, 왕족 시해 사건의 전말을 재수사해야 할 것이다.”
“약속하지, 왕실의 이름을 걸고.”
“또한 왕실의 이름으로 가문의 무고를 보증해야 한다.”
“약속하지.”
이어지는 그 조건에도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좋아. 이딴 나라를 다시 섬기는 일은 내키지 않지만, 자유와 명예가 보장된다면 돕지 않을 수는 없겠지.”
그의 입가엔 어느새 소름 끼칠 정도로 사나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