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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68화 (68/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68화

석연치 않은 작전 (3)

카라반은 보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죄수복을 벗어 나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색 총사령관의 복장을 주워 들었다.

……우습게도.

그의 다리를 묶고 있던 쇠사슬은, 이미 악력에 찌그러져 바닥을 나뒹군 지 오래였다.

순간, 그 얼굴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나를 거짓으로 다루려거든, 다가올 재앙을 걱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는 몸이니.”

“…….”

그렇게 순식간에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카라반은 손목을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 왕세자가 주머니 속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이건?”

“수비를 위한 전략이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이지.”

……고작 단어 몇 개가 적혀 있는 종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관성 없는 단어들의 나열.

하지만 카라반은 이를 받아 들기가 무섭게,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설마 이것도 국왕이 건네라고 지시한 사항인가?”

“그렇다.”

“호오.”

순간, 그의 입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당최 아렌델의 누구도 해석해 내지 못한 단어들이었으나, 그는 종이를 본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저의를 깨달은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그의 머릿속을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아렌델의 머저리들이 생각할 만한 내용은 아닌데?’

게다가 이 내용은 아렌델의…….

“…….”

아주 찰나 간 침묵하던 카라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이걸 건네준 이는?”

“……에스테반의 1왕자. 그는 그대에게 이 단어들을 제시하라고 조언했다.”

“하하하! 그런 내막이 있었단 말이지?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꽤 고품스런 잔꾀를 부렸군!”

“…….”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총사령관의 망토를 어깨에 고정시켰다.

아마도 자신에게 이번 일을 맡기라 한 것도, 국왕의 뜻이 아닌 에스테반 1왕자의 뜻이었겠지.

썩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나’를 풀어 주려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네.”

하나 그런 카라반의 눈은 모순되게도 지금껏 없었을 정도로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에스테반의 1왕자라는 이는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지?

허나…… 그러한 의문은 잠시.

그는 마지막으로 옷맵시를 정돈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야. 정말 무서울 정도로.”

“그대는 그 쪽지 안에 담긴 내용을 이해했나?”

“이해했냐고?”

왕세자의 질문에 카라반 자이트의 입술이 미묘하게 끌어당겨졌다.

이해하다마다.

그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 내용을 이해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나온 대답은 그 속마음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수비는 어찌…….”

“하지만 재미있는 계획 하나가 떠오르는군.”

그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왕세자를 지나쳐 걸어갔다.

차려 준 밥상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서야 ‘카라반 자이트’의 이름이 운다.

그러니 일을 설계한 1왕자인지 뭔지의 의도를 이해했더라도, 모른 척 그 흐름에 편승해 줄 의향은 있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그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뭐, 원하는 대로 한 번 움직여 주지.”

우선은 출진이다.

* * *

드넓은 평원의 곡창지대로 바람이 불어왔다.

허리께까지 자라난 곡물들은 추수의 시기를 지나 조금씩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고, 겨울의 찬 바람이 그 속에 스미며 을씨년스러운 소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그 속에 숨어 움직이는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박- 사박-

마른 풀을 재빠르게 스치며 지나가는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 그 위로 짙게 내리 앉은 한밤중의 어둠.

마침내 병사들은 정해진 위치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참아왔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들이 숨은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부터, 야만족들의 병력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

“…….”

하지만 결코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법이 없었다.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 몰아치는 추위와 긴장감 속의 기다림은 영겁과도 같았으나, 기어이 인내할 뿐이었다.

-곧 때가 올 것이다.

비로소 약속된 신호가 찾아드는 순간까지도. 그리하여 야만족에 유린당한 이 땅을 되찾는 순간까지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기약 없는 인내를 이어 가리라.

그때였다.

피잉-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드디어 한 떨기의 장미가 피어올랐다. 미약한 폭발음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어둠을 가른 신호탄이었다.

지휘관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총사령관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슈슈슈슉-

우렁차게 들려온 지휘관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일제히 진형을 갖추며 사방을 포위했다.

그러자, 상대에게서도 반응이 돌아왔다.

“놈들이 옵니다!”

“숫자는…… 대략 1천여 명으로 보입니다!”

시퍼런 도끼날을 손에 쥐고 달려드는 야만족들. 약탈을 위해 머물고 있던 곡창지대의 이변을 느끼고 황급히 전투태세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동요하지 마라! 아직 다음 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다!”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전선을 유지하라!”

“여기서 물러섰다간 우리의 아내, 자식! 가족들이 몰살당한다!”

이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고국인 아렌델의 땅을 되찾을, 최후의 기회.

기사들이 핏발 선 눈으로 검을 뽑아 들며 야만족들에게 쇄도했다.

“선두의 야만족들을 우선으로 막는다!”

“예!”

이를 뒤따라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이에 응수하듯 야만족들이 도끼날을 번뜩였다.

“기껏해야 왕국의 똘마니 새끼들 주제에 헛짓거리를!”

“막아라!”

챙-!

서걱!

“커어억……!”

“……큭, 역시 야만족인가!”

아렌델을 수탈하며 굶주림을 해소해 온 야만족 전사들은 막강했다. 그 힘은 도끼날이 내리쳐질 때마다 기사들이 맥을 추리지 못하고 나자빠질 정도였다.

지켜보던 지휘관이 이를 악다물었다.

“전선을 비집게 두지 마! 기사들을 엄호해!”

“궁병들은 멈추지 말고 화살을 발사하라!”

“예!”

피피피핑-!

은빛 꼬리를 남기며 날아간 화살들이 하늘을 빼곡히 수놓았다. 그러자, 화살 세례를 맞은 야만족들이 자리에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야만족이라 하더라도 사방에서 노려 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막아 내기란 어려운 법이었으니.

하지만 그 위협적인 공격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수십 명의 숫자가 준 시점부터, 그 피해가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은 퍼부어진 화살을 맞고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퓨퓨퓩-

“크흐흐, 허튼수작을!”

“……!”

“이, 이런, 제 동족의 시체를……!”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야만족들은 순식간에 팔을 뻗어, 상대하던 병사들의 목을 휘어잡았다.

그러고는 동료의 시체를 사용했던 것처럼, 그들을 이용해 화살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퍽퍽-!

“젠장!”

이미 쏘아진 화살을 멈출 수는 없는 법. 사로잡힌 병사들의 몸에 자비 없는 화살들이 내리꽂혔다. 그러자 지켜보던 지휘관이 펄쩍 뛰며 중지를 명령했다.

“사, 사격 중지! 아군이 공격받는다! 화살을 멈추어라!”

“크흐흐흐.”

털썩-!

야만족들은 시체가 된 누더기를 집어 던지고는 태연하게 전투를 이어 갔다.

놈들의 피해는 초반에 화살로 받은 피해를 제외하면 아직까지도 거의 전혀 없다시피 한 상황.

어느덧 바람이 머무는 소리만이 들려오던 곡창지대는, 병사들의 피와 살점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뚫린다! 놈들이 방어선을 뚫고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어딜!”

서걱!

“크으윽……!”

“젠장! 진형을 유지하란 말이다!”

“부, 불가능합니다…… 커억!”

애써 붙들던 전선이 무너졌다. 그 경악할 전력에 지휘관의 평정심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초조한 지휘관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전황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다.

“이, 이런 것들을 상대로 어떻게 버티라는 말이냐! 다음 신호는?”

“아직입니다!”

“큭!”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방어선을 뚫고 나오려는 야만족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녕 허무하게 병사들을 잃는 상황만이 연출될 가능성이 컸다.

지휘관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더 버티라는 말이냐……!”

이토록 헛되게 병사들을 낭비할 순 없었다. 저들은 아렌델의 미래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명령을 어기고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방어선을 물려 피해를 줄이는 데에 신경을 우선해야만 했다.

그렇게 지휘관은 다급하게 후퇴를 명령하려 했다.

“병사들은 모두 자리에서…….”

……그 순간,

“…….”

지휘관은 무언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말을 멈추었다.

그건 말 그대로 ‘기시감’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아주 사소한 변화에 불과했으니까.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곡창지대에 만연하던 잔잔한 바람은 진실로 멎어 있었다.

또한 미풍에 흔들리며 번지던 곡창지대의 마른 풀들도, 풍경을 담아낸 화폭처럼 다분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윽고 다가올 해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따분하게, 단지 병사들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힐 뿐.

그 속에서, 지휘관은 홀린 듯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거짓말처럼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렌델에서 가장 큰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타바르 협곡.

그곳에서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면에서 병사들의 얼굴을 스치던 겨울의 찬바람은 온데간데없고, 돛단배를 밀어주는 순풍처럼 부드럽고 정겹게 그들의 등 뒤를 떠밀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건 착각이었다.

정녕 멈추었던 대기의 흐름은 해일의 전조였던가? 점차 속도를 높이며 몰아치는 바람은 호기롭게 그 존재를 과시했다.

광풍.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바람은 하나의 미치광이와도 같았으니.

마침내 약속의 신호가, 반격의 봉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윽고 두 번째 신호탄이 피어올랐다.

-피융!

“……!”

그래. 이미 반격의 때는 도래해 있었다.

억눌려 왔던 아렌델의 분노와 살의가 폭발하듯, 거센 바람으로 용솟음친 것이다.

지휘관이 몰아치는 경악 속에서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모두 준비했던 짚단과 횃불에 불을 붙여서 던져라!”

화르르륵-!

재가 되어 버린 지푸라기의 불씨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또한 기름을 머금은 횃불 위에서 시작된 작은 파문은, 그 주변으로 자란 겨울의 건조한 작물들을 일제히 집어삼키고 이내 활활 번져나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호탄이 치솟은 것을 확인한 다른 무리가 이어서 불길을 연결시켰고, 그 불의 장벽은 점차 길어져 수 킬로미터에 걸친 하나의 질주를 형성해 냈다.

어둠이 내려앉은 대기를 밝게 태울 정도로 거대한 방호벽이 완성된 것이다.

“만일, 우리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 단순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면…….”

정녕 이 남풍의 시작과 야만족의 유인을 기다린 것이라면.

불길은 북쪽으로 이는 거센 바람을 타고, 기어코 곡창지대에 범람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또 해일처럼 모든 것을 정화해 나가리라.

“제, 제기랄!”

“이런! 비켜!”

“사, 살려…….”

방어선을 뚫고 다가오려던 야만족들은,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번지는 불길에 발걸음을 물렸다.

이미 그 불길이 몸으로 뚫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거세져 있었던 탓이다.

개중 몇 명은 같은 야만족에게 밀려 불구덩이 속으로 자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달려들어!”

“멍청한 새끼들, 빨리 뚫으라고!”

그 경계에 고립된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병사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처음 비웃음을 흘리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휘관 역시 그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불길을 뚫고 나오는 놈들을 처리한다!”

“물러서! 다가가지 말고 화살을 발사해! 놈들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거다!”

“놈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퓩퓨퓨퓩!

“컥!”

“이 새끼들이!”

살기 위한 애처로운 발악. 막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을까?

다만 야만족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가면서도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뜨, 뜨거워! 으아아악!”

“안 돼! 내 몸이!”

……멈추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죽음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전장에 선 이들의 핏발 선 눈은 아비규환에 잠식되어 광기로 물들고 있었다.

“……지옥.”

초열지옥(焦熱地獄).

산 자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진정한 형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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