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69화
석연치 않은 작전 (4)
“…….”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애써 고정시켜 놓은 망토가 바람에 제멋대로 흩날렸다. 카라반 자이트는 고개를 돌려 바람을 피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유독 더 거세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에 어딘가를 내려다보았다.
아렌델의 곡창지대와 야만족의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 엘란데 대협곡.
까마득히 보이는 협곡의 아래에는 개미 떼처럼 몰려든 야만족들이 분주하게 달리고 있었다.
“하하하! 저들을 개미 떼라 표현할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좋지 않겠는가?
높게 솟아오른 협곡의 위로 몸을 이동시켜 준 마법이 아니었다면, 이런 광경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테지.
아마 평생을 살아도 다시 보지 못할 진풍경이라 장담하겠다.
그 순간.
또다시 바람이 불며, 그의 너저분한 머리칼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라반 자이트는 이번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은은하게 피부로 와닿는 열기를 감상할 뿐이었다.
대기를 태우는 거센 화기(火氣). 그리고 그다음으로 느껴지는 짙은 탄 내음.
어둠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주홍빛 화마는, 썩은 바다를 정화하듯 폭력적인 자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잘 타는군.”
어느덧 저 아래로 보이는 야만족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과 공포. 그들을 지배한 감정은 전쟁의 그림자와 가장 유사한 것이었으나, 진정 그것이 전쟁과 함께라면 더욱이 끔찍한 것으로 변모하기 마련이었다.
죽음.
그리고 그건,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저들에게도 생소한 감정이었으리라.
영겁의 지옥이었다.
“주, 준비가 끝났습니다.”
겁에 질린 마법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마법사는 다가오는 화마 따위보다, 카라반 자이트라는 남자의 태연한 표정이 더욱 무서웠다.
애초에 수십 킬로미터의 길이에 걸친 북부의 곡창지대를 모조리 불태우라 했던 것도 그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래. 카라반 자이트는 그것이 정녕 신기했다.
“제어하지 못하는 화공은 자살행위와도 같지. 하물며 그것이 자국의 땅에 불을 지르는 일이라면 더욱.”
“…….”
“신기하지 않나?”
“……어, 예?”
“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잠깐 동안 거센 남풍이 불어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 시기에 갑자기 협곡에서 폭산하는 듯한 바람이 불어오다니…….
이는 아렌델의 토박이들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보편적으로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벌어지는 기현상이었으니 당연했다.
애초에 바람의 방향을 신경 쓰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나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점은, 그 설계가 내부의 상황이나 지형지물까지도 완벽히 이용한 계획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는 곡창지대 전부를 집어삼킨 화마가 다가오고, 유일한 퇴로인 협곡에는 애석하게도 내가 숨어 있지. 공교롭게도 아렌델을 침공한 야만족들이 저 안에 갇혀 있는 모양새가 되었단 말이야.”
“저, 저기…….”
“바람을 만난 불씨가 놈들을 태우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두 발을 달려 북부로 도망치는 것이 빠를까.”
“…….”
털썩-
그는 계단을 내려오듯, 높은 바위에서 가뿐하게 떨어져 착지했다.
아쉽게도 이 질문에는 어폐가 있었다. 결코 이지선다의 보기가 주어질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준비가 끝났다고?”
“그, 그렇습니다.”
“좋아.”
마지막으로 그는 협곡의 전경을 눈 속에 담아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자신을 바람막이로 세운다는 1왕자의 계략은 완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카라반 자이트’의 무자비하고 비상식적인 전략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될 것이다.
“터뜨려.”
조국의 땅이었던 것을 제 손으로 직접 망가뜨리는 것으로. 그리하여 적의 퇴로를 원천 봉쇄하는 것으로.
순간.
마법사와 카라반 자이트의 신형이 마법사와 함께 날아올랐고, 엘란데 협곡은 거대한 폭음과 섬광 속에 가려졌다.
어둠을 밝히며 다가오던 화마조차 잠시 가려질 정도로 밝은 섬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협곡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
그러니까, 협곡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까지 카라반 자이트를 데리고 온 마법사는,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면서 눈을 의심했다.
“이, 이 정도였을 줄은…….”
협곡은 아직 먼지구름에 가려져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북부와의 입구를 열어 주던 협곡의 대붕괴. 마찬가지로 땅에 착지한 카라반 자이트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났군.”
확신 아닌 확신이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부분이었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직 곡창지대 내부의 모든 야만족이 죽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아직 화마는 꺼지지 않았다.
* * *
아렌델의 국왕은 초조하게 보고를 기다렸다.
국운이 걸린 전투. 총사령관인 카라반에게 전략의 개요를 듣긴 했으나, 정작 작전에 대한 불안감과 의문이 남아 있던 탓이었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릴 거라고…….”
이 전략은 에스테반의 1왕자가 제시한 단어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한데. 멋대로 바뀔 바람의 방향을 무슨 수로 예측하고, 이를 기다린단 말인가? 그대로 이루어질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하다못해 학자들에게 자문받을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나았으련만, 한시가 시급한 때이기에 그마저도 행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결국 국왕으로서는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선택은…… 1왕자와 카라반을 믿는 선택은 옳은 것이었나…….”
“아버님.”
국왕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왕세자는 침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1왕자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왕세자여, 어찌 그리 자신할 수 있는 것이더냐?”
생각해 보면, 처음 에스테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왕세자였다.
1왕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그라면 반드시 아렌델에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했던 것 역시도 왕세자였다.
하지만 그 물음에 왕세자는 의뭉스럽게 답했다.
“그의 행보가. 진정으로 아렌델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렌델을 원한다는 것은 당최 무슨 소리인가? 그것이 작전의 성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왕세자의 맥락 없는 대답에 국왕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을 그때였다.
쿵쿵쿵쿵-
철컥-!
“국왕 전하!”
전령이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은, 마침내 고대하던 소식을 물고 도착했다.
“총사령관과의 통신이 준비되었습니다!”
“드디어!”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색했다.
그러고는 전령이 가져온 마법구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연결하게! 직접 보고를 듣겠네!”
“예, 알겠습니다!”
치직- 치지지직-!
통신 마법구로부터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운 연결음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지독히도 싫어했을 그 소음이었으나, 국왕에게는 이를 거슬리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상대방과의 통신 연결이 완료되었는지, 잡음이 사라지고 곧 거친 야생마와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라반 자이트입니다.
“지, 짐일세! 총사령관, 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예, 들립니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하지만 안정된 목소리.
하지만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마법구 너머로 시끄러운 고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꿀꺽-
“지,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뭔가? 아니, 그보다 야만족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렌델을 침략한 야만족들은 곡창지대와 함께 모조리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그 말은…….”
-잃어버린 북부를 탈환했습니다. 이 소리는 병사들의 함성입니다.
“오오…… 맙소사……! 정녕, 정녕 성공했구나!”
국왕이 체통도 잊은 채로 감격에 소리쳤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멸망을 운운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야말로 꿈 같은 승리를 거두어 낸 것이다.
이에 왕세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남아 있던 일말의 긴장감을 털어 냈다.
“병사들의 피해는 어떻게 되지?”
-야만족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유인한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허어! 아주 잘해 주었네!”
황제는 지금까지의 마음고생을 자신에게 보상하기라도 하듯,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1왕자의 말대로, 전략을 들은 카라반 자이트가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이다.
‘정녕 1왕자의 전략을 믿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구나……!’
비록 놈들을 막기 위해 엘란데 협곡과 북부의 곡창지대를 잃어버렸으나, 기울어진 국운을 돌려놓은 대가라고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은 성과였다.
아깝지 않다 뿐인가? 오히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전략의 단초를 제공해 준 에스테반의 1왕자를 부둥켜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만큼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왕세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1왕자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암, 그렇고말고! 그가 아렌델을 살려 주었네!”
다만, ‘개인적인 도움’이라고 보안을 못 박은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을 것을…….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면. 1왕자 개인이 아닌, 에스테반의 왕실에 친교의 사절단을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으리라.
“……!”
그 순간, 문득 국왕의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접점이 없던 국가에서 타국의 왕자 개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분명 외교적인 결례에 해당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혹자가 보기에는 왕을 무시하고 아랫것을 다룬다고 생각하거나, 타국의 왕족에 부정한 공물을 바친다는 오해를 빚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접점을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예?”
왕세자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국왕은 턱을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의 파티를 여는 것이 어떠냐? 적당한 명목으로 에스테반의 1왕자를 ‘초대’한다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야.”
“확실히…….”
“왕국의 은인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감히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밖에 대접할 길이 없구나.”
이런 시국에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일원들이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어찌 친교의 뜻을 교류하는 것이 하루나 이틀에 그치겠는가? 다음번에는 아렌델이 에스테반으로 향하면 될 것이고, 그리하면 두 국가 사이에 우정도 보다 싹트게 될 것이다.
국왕이 확신하기에는 풍전등화에 놓인 아렌델을 내친 주변국보다, 저 먼 타국에서도 손을 내민 1왕자의 가치가 더욱 높게 보였다.
“지금 당장 에스테반의 왕실로 사절단을…… 아니, 통신을 보내려무나. 그가 도착하는 날에 맞춰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겠다.”
“예, 응당 옳은 판단이십니다.”
왕세자는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의실의 문을 나서는 왕세자의 뒤로, 애증의 관계에 놓인 두 친우의 진지한 대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에스테반.”
등을 돌린 순간부터, 왕세자의 얼굴은 굳은 채로 더는 밝아지지 않았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히 감추어 낸 표정.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실로 복잡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