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76화
광풍 (5)
카라반 자이트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생각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제까지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이따금씩 생각을 정리하며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시야를 더 넓게 보라고? ……이 내게?”
그 실망이라는 말속에 숨은 진심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전 그가 느낀 그것은 진정 자신에게 실망한 이의 감정이었으니.
그렇기에 카라반 자이트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자신에게 실망하였는지. 대체 무엇을 기대하였는지. 그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판단할 수 없는 강한 상대를 눈앞에 두고 느껴지는 감정이란…….
그건 일종의 공포와도 같았다.
‘모르겠군. 정말로 모르겠어.’
게다가 그 기세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감 되기 직전의 기억 속에는, 그런 1왕자에 대한 정보 따위는 전무했으므로.
오히려 유약하다면 유약했다는 평이 많았지, 그런 기세를 내포할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카라반이 복잡해져만 가는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똑똑-
“카라반 자이트.”
노크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놀랍게도 오랜 친우였던 사내이자 그런 자신을 내쳤던 왕세자였다.
“…….”
하지만 그는 말없이 자신의 앞자리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애증이라는 애써 불편한 감정을 삼키며, 왕세자로서 그를 대우했다.
그건, 친우라는 형태로 지냈던 과거의 정겨운 모습도 아니었고, 하물며 형무소에서 있었던 그 날선 감정도 아니었다. 이는 왕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런 시간에 찾아오셨습니까?”
“자이트 공작. 그대가 1왕자와 만났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어쩌면 둘 모두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터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어색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 있는 것은, 왕세자와 공작의 관계였을 뿐이니까.
“그래, 에스테반의 1왕자는 고국으로 돌아갔는가?”
“예. 왕궁의 외부에서 발생한 마력의 파장을 확인하였습니다. 사절단 모두 돌아갔습니다.”
카라반 자이트, 자이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물음에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버린 공작이었으나, 억지로 목을 비틀어 대답을 기워 냈다. 왕세자가 보기에는 그런 모습 또한 의문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별건 아닙니다. 단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방금의 그건…….”
……아니.
왕세자는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일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그대가 만나 본 1왕자는 어땠지?”
“어떤 의미로 여쭤보시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궁금하네.”
그는 아렌델을 구원하고 앞으로의 방안을 넌지시 언급해 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아마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아렌델이 그와 에스테반을 배신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적어도 연방제국과 관계된 일. 그렇기에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는 있던 것이다.
그 뜻을 알아챈 자이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에스테반에 협력한다는 의미가 뭔지 그대가 모르지는 않을 터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와 협력하는 일이 설사 연방제국과 척을 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작전이나 대화 따위로 간접적인 교류를 가졌던 카라반 자이트였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반대로 이야기하면 에스테반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
“그는 앉은 자리에서 보이지도 않는 전장을 장악하는 사람입니다. 지형이나 적들의 움직임, 아렌델 내부의 사정까지. 모든 것을 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사람과 척을 지는 것은 도리어 아렌델에 화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까이에서 칼날을 갈고 있는 연방제국보다 두려운 사내라는 말이었다.
카라반 자이트라는 이 남자는…… 최소한 그가 아는 한, 전장에 대한 감각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자였다.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그런데 대체 그는 1왕자라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것을 왕세자가 알 턱이 없었다.
“……걱정하지 말도록. 물밑에서 에스테반과 협력하며 중립을 표방하는 일은, 아버님과 나 역시 동의하는 의견이니.”
“응당 옳은 선택입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왕세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대로 가만히 놈들의 작태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연방제국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네.”
어찌 되었든, 놈들의 수작으로 인해 아렌델의 북부는 무너졌다. 더 나아가, 1왕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회생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만 수년 이상이 걸릴 거라 예상하고 있지 않은가? 왕세자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 사건은 덮어 두더라도, 최소한 놈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네. 이것 역시 아버님께서도 동의하고 계시는 의견이지.”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던 카라반 자이트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훗날, 혹은 지금 당장에라도 놈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전략.
카라반 자이트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고, 왕세자는 놀란 기색을 내보이며 감탄했다.
“……그렇군. 그런 방법이 있었어.”
“당분간 세세한 작전을 생각해 두고 있겠습니다.”
“알겠네. 그대만 믿지.”
이야기를 들은 대로라면 확실히 놈들에게도 충분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그렇게 왕세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이었다.
치지지직-!
“…….”
왕세자의 품 안에 있던 통신 마법구가 짧게 울었다. 왕세자는 카라반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마법구를 꺼내 들었다.
발신지는 아렌델의 동부였다.
“무슨 일이지?”
-저, 전하……! 큰일 났습니다!
“……큰일?”
왕세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연방제국, 이것들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이번에는 연방제국이 아니라 동부의 국가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은……!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왕세자뿐만 아니라 자이트 공작까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 동부를 잇던 통로가 복구되었습니다.
“……뭐라?”
-협곡에서, 동부와의 직선 무역로를 가로막던 폭풍이 멈췄습니다!
“……!”
마법구를 든 팔을 천천히 내리는 왕세자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깊은 생각으로 잠겨 있었다.
동부와의 직선 무역로…… 타바르 협곡…….
하지만 그곳은 분명…….
“금지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1왕자의 부탁이 있었던 것으로…….”
왕세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 당시 아렌델 국왕과의 대면이 끝난 직후에 1왕자가 요구한 보상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금지로의 통행이었다.
그 누구도 지날 수 없던, 그리고 누구도 살아날 수 없던, 그곳으로의 통행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부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처음에는 우려를 표했으나,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출발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연히 왕궁으로 돌아왔었다.
그렇기에 그땐 이번 전투에서 그러했든, 그저 그가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려 한다고만 여겼거늘…….
한데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그런 타바르 협곡의 폭풍이 멈추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이는 분명, 1왕자가 무언가에 관여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밝혀내지 못했던 원인 불명의 폭풍을 잠재운 무언가에.
“알렌, 에스테반…….”
말문이 막혀 버린 왕세자는 전율했다. 그리고 그건,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우우우웅-!
“여, 여기는……!”
“……왕궁?”
“에, 에스테반으로 돌아왔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나타난 사절단 일행은, 돌아온 장소가 익숙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품위도 잊고 또다시 경악에 빠졌다.
“꾸, 꿈이 아니었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벌써 하루 만에 수백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왕복했다.
심지어 그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그것이 꿈만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도리어 거짓말일 터였다.
하물며 그 자신들이 그럴진대,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떠할까?
“허억!”
“저, 저걸 보십시오! 사라졌던 귀족들이 나타났습니다!”
“레네다 자작…… 페넥 남작…… 정말로 아렌델의 사절단으로 임명된 귀족들이 맞습니다!”
“허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로 저 귀족들이 권능을 통해 아렌델에 다녀왔다고?!”
귀족들이 일거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몰려든 이들이 진실을 목도하고는 경악했다.
사흘 전, 1왕자는 급작스럽게 아렌델로의 사절단 파견을 제시했다.
귀족들로서는 당연히 의아할 노릇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1왕자가 또다시 멋대로 기행을 벌이겠거니 하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렇게 파견될 사절단 일행이 정해진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하지만 그 오늘, 바로 그 당일에 1왕자는 출발을 명했다. 아무런 준비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말 그대로 몸만 오라고 말한 것이다.
최소한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
그렇기에 모두들 경악하고, 의심했으며, 일부는 분노까지 했다.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만에 아렌델에 다녀오라니!
-대체 어떤 생각이신지…….
-대체 신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제아무리 1왕자라도 이번만큼은 선을 넘었다.
그리고…… 그 황당한 명령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로 에스테반에 나타난 대마법사의 존재를 믿으란 말인가……!”
귀족들은 그렇게 경악했다. 그리고 그런 경악은 정신을 차린 사절단 일행이 움직이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이보게 들! 잠시만 기다려 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적어도 이 사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빛 속으로 사라졌다가 등장한 당사자들이었음이 분명했으므로.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모든 일의 원인인 1왕자와, 그 의문에 가려진 ‘대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성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 *
“아렌델로의 사절단 파견이라.”
아버님의 진중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이내 생각에 빠져 계시던 아버님이 맞은편 대각선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셈이 되겠군.”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있었다.
얼굴마저 시간을 역행하고 젊어진 데다가 그 기세마저 달라졌다지만, 수십 년을 보아 온 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드 엘레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