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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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반 왕국 상단의 관리자, 벨더렛. 그는 본디 넓은 대륙을 누비고 싶다는 이유로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키워 나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에는 용병이었던 아버지의 아래에서 자라온 어린 시절이 존재했다.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겨난 ‘낭만’이라는 감정. 그것이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개화시키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된 것이다.
실제로도 그 덕분에 대륙의 정세에도 유난히 밝은 상인이 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상인이라는 직업은 그의 천직이었다 할 수 있겠지.
다만…… 무예의 자질이 부족하지만 않았다면, 아버지를 따라 용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행에 나선 이들이 으레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상인이라는 존재가 대륙을 자유롭게 누비는 일은 손에 꼽았다.
리스크, 그리고 그에 따르는 리턴.
이미 금전이라는 것을 움직이는 존재가 된 이후로는, 모순적이게도 더 이상 처음의 목적이었던 ‘낭만’이라는 것만을 좇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왕국 상단의 관리자라는 황송한 자리에 오르게 된 이후였다.
왕실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상단. 정해진 길 외에는 움직일 수 없는 도로 위의 마차…….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는, 그 스스로도 대륙을 누비겠다는 꿈을 마음속에서 깔끔하게 지워 냈으리라.
그것은 이제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현실에 순응하게 된 남자의 마지막 낭만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1왕자가 왕국 상단을 관리하게 된 이후로는 상황이 다소 달랐다.
“흐음……!”
벨더렛은 짐마차의 내부를 살피며 까슬하게 자라난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내부를 꼼꼼하게 살피던 눈은, 어느새 환하게 펴진 상태였다.
“하얀 모피 옷감 천이백오십 개. 확실하구려.”
딱 주문했던 물량이 맞았다. 그것도 원했던 대로의 품질이었다.
벨더렛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내밀어져 있는 상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짐마차를 인계받으며 흔쾌히 거래의 대금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모피를 판매한 상인이 벨더렛이 건넨 금화를 싣고 떠나가자, 여태까지 다른 마차에서 짐을 올리고 있던 소녀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피를 이렇게 많이 구매할 필요가 있을까요? 벌써 마차 두 대 분량이에요.”
“허허…… 조금 많기는 하구나.”
왕국 상단의 새로운 일원이자 중계 무역을 담당하게 된 레이카였다.
타국에서 서점을 운영했던 아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상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경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야무진 모습들을 보여 주곤 했는데, 때문에 벨더렛의 입장에서는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라서 무역에 관한 여러 지식들을 전수해 주는 일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하지만 괜찮단다. 모피는 남부 대륙의 귀족 여식들 사이에서 꾸준히 소모되고 있는 물품이란다. 신년의 파티가 연달아 열리는 이 시기에는 그 수요가 제법 존재하지.”
“예? 어째서요?”
“하하, 신이 아닌 이상에야 한낱 상인이 그들의 생각까지 읽을 방법은 없단다.”
그럼에도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동경 같은 것이리라. 북부에서 나오는 눈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모피는, 남부 대륙에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그 부분이 조금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랬으나, 기껏 해 봐야 ‘제법’ 존재하는 수준이거늘…….
“한데 전하께서는 유독 올해에 수요가 폭증할 것이라 예상하시더구나.”
“1왕자 전하께서요?”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라고 말씀하셨단다. 덕분에 우리야 북부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말끝을 흐린 벨더렛이 마차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갑자기 그렇게 수요가 급증할지는 잘 모르겠구나.”
“이 많은 양이 전부 팔릴까요?”
“글쎄다. 상하는 물건은 아니니 최악의 경우, 유행이 끝났다 해도 시간을 두고 판다면 어떻게든 될 게다.”
……조금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될 테지만 말이다.
그 뒷말을 삼킨 벨더렛은 애써 소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밝은 웃음을 보였다.
그래, 새로이 왕국 상단의 운용을 맡은 1왕자는 그대도 자신들에게 대륙 곳곳을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 덕에 정해진 길로 나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선택지의 폭을 무척이나 넓게 제시해 준 것이다.
그것이 중계 무역이 되었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아즈란을 목적지로 정하고 나아가는 벨더렛과 레이카에게 주어진 명령은, 모피의 물량을 최대한 모아서 남부 대륙으로 향하라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현재, 북부 대륙을 쏘다니며 모피를 사들이고 있었다.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불안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단은 전하께서 말씀하신 기한이 끝나기 전에 남부 대륙으로 가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먼 상행 끝에 목적지인 아즈란으로 발길을 들인 순간.
그 불안감은 조금 다른 것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저, 정말로 북부에서 모피를 가지고 왔다는 말이오? 그것도 하얀 모피?”
“그, 그렇소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국 상단 일행은 1왕자가 점지해 준 부티크에 들렸다. 그리고 딱 한마디.
용건을 묻는 직원의 말에, ‘모피가 필요하지 않으냐’는 그 한마디를 남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무척 극적이었다.
직원은 마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더니, 이윽고 내부로 들어가 신분이 높아 보이는 귀족 부인 한 명을 모시고 나왔다.
아마도 부티크를 관리하는 주인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부티크니만큼 귀족이 운영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녀는 대하는 직원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특히나 유별나 보였다.
그리고 벨더렛의 그 짐작은 무척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카르덴 후작가의 안주인, 레리나 님이십니다.”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스테반의 왕국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벨더렛은 그렇게 당혹감을 감춘 채로 예의를 차렸다.
그녀는 무려 후작의 부인이었다. 그것도 아즈란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일컬어지는 재무대신, 카르덴 후작의 부인.
‘전하께서 반드시 이곳에 들리라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벨더렛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러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관심사는 온통 이국의 상인이 가져온 것에 쏠려 있는 듯 보였다.
“모피를 한번 볼 수 있겠는가?”
“아닐 말씀이겠습니까. 마차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레리나는 직원들에게 따라오라 눈짓하며 직접 부티크의 밖으로 나섰다.
거리에 세워진 상인의 짐마차는 모두 셋. 직원들은 다급하게 그곳으로 다가가 마차를 가린 천을 벗겼고, 이윽고 드러난 수많은 하얀 모피의 향연에 입술을 가리며 주저앉을 뻔했다.
“모, 모피……!”
“세상에나! 이렇게나 많은 양을…….”
심지어 마차 내부에는 왕자의 명으로 물건이 충격에 상하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마법진도 부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1등급이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것들만 모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느껴지는 경악은 뒤늦게 모든 것을 확인한 레리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급한 주문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겠구나…….”
당연히 그 반응을 지켜보는 벨더렛과 레이카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정말로 수요가 많은가?’
수요가 없다면 이리도 놀랄 까닭이 무어가 있겠는가?
아니, 심지어 이 반응은 단순히 수요가 많다는 수준이 아닌 듯했다.
정녕 1왕자 전하께서 예상하셨던 대로 물량이 부족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경악할 정도로 놀란다니…….
결국 궁금함을 참아 내지 못한 벨더렛이 은근슬쩍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때마침 모피의 유행이 다가오는 시기이니만큼 물량을 넉넉하게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는 부인께서 운영하시는 부티크에 필요한 양만큼 먼저 판매하고자 합니다만…… 혹시 얼마만큼을 구매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전부.”
“예?”
일순, 벨더렛의 어리둥절함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다급히 직원을 바라보며 그저 그 가치를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최근 수도에서 거래되는 모피의 가격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지?”
“손바닥만 한 모피는 100골드 안팎입니다, 부인. 그리고 순백의 모피는 그보다 세 배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알려져 있습니다.”
“사, 삼백 골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레이카가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그러고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생각했다.
‘여, 열 배의 가격이잖아?’
북부 대륙에서 구매한 모피의 가격이 30골드였다.
아니, 그것마저도 손바닥만 한 크기가 아닌, 제대로 된 모피 한 장에 30골드다.
그 점을 생각하면 열 배가 아니라 스무 배를 넘어, 족히 서른 배에 달하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벨더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차 한 대 분량을 더 준비하기를 잘했구나……!’
자신들을 이끌던 1왕자라는 사람의 그 모습이 너무도 확신으로 가득했기에. 그분의 모습만을 믿고 마차 한 대 분량을 추가적으로 사들였다.
그건, 시간과 돈. 그 모든 리스크를 최대까지 끌어올린 수준이었고.
하지만 수요가 있을 거라고만 들었지, 이렇게 미친 듯이 가격이 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궁금증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한 벨더렛이 입을 열었다.
“하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양을 구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많은 양을 구해 오다니, 그대들은 꽤 상운이 좋은가 보구나.”
……하기야, 그러니 이렇게 많은 양을 구할 수 있던 것이겠지.
후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수도에서 있던 변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에게 대량의 모피를 판매해 줄 상인을 위한 친절함인 모양이었다.
“기존에도 모피로 만든 장신구는 종종 사용되어 오던 편이었다. 하지만 올해에는 왕비님과 왕녀님이 신년 연회에서 하얀 모피로 된 옷을 입으시며, 그와 비슷하게 모피로 만든 옷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네.”
“아아, 그리하여 본래 수요보다 훨씬 많은 모피가 필요하게 된 것이군요.”
하물며 귀족 여식들의 자존심이 좀 센가? 같은 옷을 연달아 입지는 않을 테니 연회에 입고 나갈 모피 의상이 최소 두세 벌은 필요했다.
때문에 모피의 가격이 폭등했다. 예년의 유행만을 생각하고 모피를 많이 준비하지 않은 상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 유행이 연회복에서 그치지 않고 평상복으로까지 번지더구나.”
“허어…….”
연회에서만 사용될 모피 의상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실정이건대, 연회와 평상시의 복장 두 곳 모두에 모피 가죽이 사용되는 상황이 왔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대유행이었다. 그렇기에 남국에서 나지 않는 모피의 희소성은 더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수십 배의 이윤이 된 것이구나!’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안이 벙벙할 수준이다.
하지만 벨더렛이 느낀 놀라움은 레이카보다도 더욱 큰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상행에 대한 재능마저도 출중하다 하시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