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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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제국의 사람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라는 말인가?
그 반응을 확인한 레이카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다시금 조용히 속삭였다.
“애써 숨기고는 있지만 저건 연방제국의 말투가 분명해요.”
“……그게 정말이니?”
“억양을 들어 보면 확실해요. 저를 믿어 주세요.”
그렇게 속삭이는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 확신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말이다.
이에 벨더렛은 손바닥을 꽉 쥐며 이 상황을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마드라에서 온 상인들이라 했거늘…….’
하지만 이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다. 어떤 가격이든 1.2배. 고작 흑철 따위에 그런 출혈을 내는 것이 마드라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정답은 ‘아니’였다. 마드라는 그렇게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을뿐더러 흑철을 수입할 이유도 없었다.
처음 마드라의 이름을 들었을 때에 놀란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고.
‘애초에 마드라에서 흑철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이 있었던가?’
그 역시 결단코 아니었다. 오랜 상행의 지식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행동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만약 그 뒤에 흑철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고 치면 상황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래, 이를테면 연방제국처럼.
레이카는 아버지와 함께 연방제국에서 살아오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저들이 연방제국의 억양이라 확신했으니, 정말로 모르긴 몰라도 연방제국의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마드라’의 이름을 뒤집어써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테지.
벨더렛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랬군.”
만약 1왕자께서 이것마저도 예상하셨다고 하면.
정녕 그렇다면 1왕자께서는 이 상황을 보고 무어라고 말씀하셨을까?
벨더렛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나갔다.
그리고 나온 정답은 하나였다.
-놈들을 짓밟아라.
가차 없이 짓밟고 처참히 짓뭉개, 마침내 놈들에게 자신의 주제를 알도록 하라.
그것이 감히 에스테반의 것을 노린 대가다.
아마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리라.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2할을 더 얹겠다 하셨소?”
“그렇소이다.”
“허어……! 한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
벨더렛은 짐짓 곤란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입술은 명백한 조소를 띠었다.
“우리는 무역 단가를 흑철 시세의 세 배를 생각했는데 말이오?”
“뭣이?!”
“……!”
상대 상단의 직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당혹감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광산의 관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서늘한 공기가 회의장을 휩쓸었다. 3배라는 단가가 주는 충격이 그만큼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벨더렛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3.2배 가격에 구매하겠다 말하면 말릴 생각은 없소만.”
“이런 시건방진!”
쿵-!
마드라의 신분을 뒤집어쓴 상인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그의 비점은 한계를 넘어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그러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감추지 않으며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가 어디라고 그런 뻔히 보이는 수법을 쓰는 것이오!”
“수법이라니?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세 배 가격이라는 그딴 허세를 지껄이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앞서 마드라 측에서는 조건을 불문하고 2할을 더 얹겠다는 선언을 한 지 오래였다.
그런 와중에 에스테반 측에서는 세 배의 단가를 생각했다고 하니, 졸지에 3.2배의 단가를 지불하게 된 저들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벨더렛의 조소는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그대들이 말하는 수법이란 것은 통 모르겠구려. 사실이 그런 것을 내가 어쩌겠소?”
“여기가 성 밖 마을의 도떼기시장인 줄 아시오? 내 여태 이런 일은 처음이군. 공갈이나 하지 말고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말만 하란 말이오!”
“그것은 혹 에스테반이 세 배의 단가를 지불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오?”
“당연한 것을! 우리가 입찰을 포기하고 떠나면 그제야 똑바로 된 협상에 나설 심산이겠지!”
조금 있으면 걸쭉한 상욕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이미 얼굴이 시뻘겋게 올라온 것을 보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그렇게 공기가 과열되자 관리인이 혼란스러운 손짓으로 그들을 중재했다.
“그만들 하시오.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소?”
“쯧!”
결국 마드라의 상인들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관리인이, 이번에는 에스테반 측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들이 입찰을 포기한다 해도 그대들이 세 배라고 말한 이상, 우린 그 조건으로 거래를 진행할 거요. 이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저들과 원가에 합의하게 될 것은 당연하고.”
“상관없소. 세 배라는 것은 그저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가격을 읊었을 뿐이니.”
“…….”
벨더렛은 당당하게 말했다.
연방제국과 에스테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분위기를 왕국 상단의 관리인인 벨더렛이 모를 리 없었다.
도리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1왕자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그였다.
무역 분쟁. 그것이 낳을 파장이 어떠한지 역시도 숱한 역사 속에서 배웠기에.
그러니 벨더렛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은 분명 그것의 전초전이다.’
정치는 모르기에 왕자의 큰 그림까지는 읽을 수 없는 그였지만, 평생을 상행위로 돌아다녔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기선 제압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서 얕보이지 않기 위한.
그리고 언제라도 그들이 칼을 빼 들 수 있는, 너희보다 강한 패가 있다는 의지의 표명.
무엇보다.
‘흑철을 그렇게 쉽게 줄 순 없지.’
저들이 마드라를 내세워 흑철을 구하려는 이유는, 그만큼 비밀리에 무언가를 진행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짐작할 수 있는 이유라면 단 하나.
아마 전쟁을 위해 물자를 쌓는 일이리라.
만약 저것이 연방제국의 손에 들어간다면, 에스테반의 군대는 흑철로 만들어졌거나 그것을 통해 개발된 무언가와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구든, 아니면 용품이든.
그러니 그에게 세 배의 가격은 합리적인 투자일지 언정, 결단코 공갈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천천히 관리인의 입이 열렸다.
“흠, 저희야 좋소. 그렇다고 하는데 마드라 측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3.2배. 그래, 정녕 거래하지 못할 가격은 아니지.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증명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소?”
“증명이라면?”
“정녕 에스테반의 왕국 상단이 그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건을 낙찰받으려 했다면, 당연히 그만한 재량권이 있다는 소리겠지.”
끝까지 믿지 못하는 건가.
마드라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연방제국의 상인은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고 오만하게 지껄였다.
정말로 벨더렛 측의 제안이 무조건 거짓일 거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큰 문제는 없다.
그 증명이라는 것은 무척 간단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가지고 와 주시오. 최대한 많이.”
“알겠소.”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온 관리인의 손에는 흑철 무역에 관한 내용이 담긴 계약서들이 들려 있었다.
이윽고 두 왕국 상인의 앞으로 계약서가 한 장씩 배부되었다. 당연히 가격과 서명은 공란이었다.
“훗.”
그러자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한 연방제국 상인의 눈에 비웃음이 깃들었다.
그것은 이제 어쩔 것이냐는 도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쪽이 먼저 작성하시오. 3배.”
“…….”
그러니까, 에스테반 측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면, 자신들이 그다음에 2할을 더한 계약서에 서명하겠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낙장불입.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탈락시키기 위한 허세가 완전히 차단된 셈이었다.
하지만.
슥슥-
“……!”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모든 것이 ‘공갈’일 경우에 한하는 제약이었다.
벨더렛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서류를 작성했다.
이윽고 에스테반의 직인이 담긴 도장까지 찍은 뒤, 이를 관리인에게 넘겼다.
……3배.
내용을 모두 확인한 관리인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 맞소. 정녕 말했던 대로 3배가 맞소.”
“…….”
그에 덩달아 당황하게 된 것은 연방제국의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설마 정말로 미쳤다고 현 시세의 세 배에 달하는 가격을 적었다는 말인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저들은 정령 상행위에 있어서 그런 기본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여태까지의 대화가 그저 허세라고 단정 지었던 그들로서는 당황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다.
“젠장!”
이윽고 한 사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상인들이 하는 수 없이 3.2배의 시세가 적힌 계약서를 작성했다.
상대는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아무래도 돈지랄을 하려고 작정한 듯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연방제국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감히 에스테반 따위의 소국이 맞먹으려 하는 것이 가소로울 뿐인 것이다.
출혈이 심하지만 하는 수 없…….
그 순간이었다.
슥슥-
“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오!”
연방제국의 상인들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에스테반 측의 왕국 상단이,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가격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네, 네 배……!”
경악이 흘렀다.
그래. 벨더렛이 작성한 새로운 계약서는 무려 시세의 4배가 적혀 있는 계약서였다.
그리고 말없이 이를 관리인에게 밀어 건넨 벨더렛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마치, 이제 어찌할 것이냐는 말하는 것처럼.
이후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서늘하고도 침착했다.
“4.2배, 이번에는 그대들이 지불할 수 있겠소?”
“이런 말도 안 되는……!”
미쳤다. 이건 단단히 미치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연방제국의 상인들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이게, 겨우 이까짓 게 무어라고 4배의 돈을 태운단 말인가?
심지어 그들은 이를 낙찰받으려면 꼼짝없이 4.2배의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 가격에 흑철을 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길! 우리는 포기하겠소.”
그리고 녀석들은 결국 입찰의 포기를 선언했다.
돈을 무기로 휘두르는 자는 이길 수 있다 한들, 미친놈들을 상대로는 어쩔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 상대가 도무지 이길 수 있는 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벨더렛의 입가에는 조소가 번졌다.
‘돈지랄이라고?’
그것은 연방제국의 전유물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미스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벨더렛은 그것을 돈지랄이라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는 돈지랄 측에 속하지도 못했다.
‘진정한 돈지랄이 뭔지 보여 주려 했거늘.’
열 배가 된다면 열 배로. 스무 배가 된다면 스무 배로 갚을 생각이었다.
한시라도 빠른 무역을 진행하기 위해 시간을 샀다기에는.
그리고 놈들의 수작을 막는 대가로 사용되었다기에는, 무척이나 싼 금액이었으므로.
다만 그 역시도 이 상황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거 버릇이 될지도 모르겠군.’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즐거운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