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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106화 (106/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06화

소동 (2)

특색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귀족 가문들이 있다지만, 비도르 남작가는 의외로 명확한 특색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렴. 그리고 절제.

비록 남작가라 해도 귀족의 일원이었고, 엄연히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영지가 있었다.

심지어 비도르 남작가는 그 역사가 건국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꽤나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역사가 긴 만큼, 몇 대에 걸쳐 올바른 품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올바른 관리로 영지민들과의 화합을 유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고.

물론 혹자는 비도르 남작가의 행보를 비웃기도 했다.

힘이 없으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며. 결국 저들도 권력이 주어진다면 여느 귀족과 다르지 않을 거라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작은 하루가 멀다고 들어오는 청탁 속에서도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압박에는 무시로, 그리고 불의에는 정론으로 대응할 뿐이다.

1왕자파의 실세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지금에도, 청렴이라는 원칙을 기조로 1왕자의 뜻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조지는 명쾌한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나물에 그 밥.’

좋게 말하면 바른 교육을 받은 것이요, 나쁘게 말하면 이미 유전자 단계부터 착해 빠졌다는 소리.

다만, 그런 남작에게도 이 같은 상황은 무던히도 당혹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전하, 이쪽은 제 딸아이인 엘리입니다. 어서 인사를 드리려무나.”

“아, 안녕하세요.”

“얘, 얘야. 이분은 1왕자 전하시란다. 조금 더 공손하게 예를…….”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는 어색한 인사.

남작은 아찔함에 어쩔지 몰라 하며 손을 내저었다.

조지를 쥐잡듯 휘어잡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남작의 말을 끊어 냈다.

“필요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놔두도록.”

“……예, 전하.”

그런 내 시선은 계속 남작의 여식을 향해 있었다.

‘의외로 성격이 닮지는 않았군.’

상황은 이미 조지에게 들은 지 오래였다. 남작이 두고 간 서류를 전해 주기 위해 찾아왔다던가?

그 순수한 천성만큼은 제 아비와 닮았다 할 수 있었으나, 확실히 막무가내식의 행동은 닮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엘리라고 했나?”

“네…… 네.”

“들고 왔다는 서류를 가지고 오도록.”

“앗, 여기요.”

이번에도 역시 왕실의 예법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하지만 한 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 것에는 남작 역시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 명령이 곧 집무실의 질서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스르륵-

나는 남작의 딸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고 그것을 확인해 나갔다.

스륵-

“…….”

집무실 내부에는 숨 막히는 침묵과 함께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심산인지, 옷깃 스치는 소리 또한 내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질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탁-

어느새 책상 위로 서류 봉투가 내려졌다.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산의 초안을 작성하던 것이었군. 이미 결재된 사안이니 쓸모없는 것이다.”

“……휴우. 역시나.”

남작이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곳에 두고 온 서류가 중요한 것이었다면, 철저한 보안을 요구하는 보좌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되었을 테니까.

“아마 서류를 분류하는 작업에서 미처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물론 반대로 말하면 영애의 발걸음이 헛된 일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남기고 찾아오려무나.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서 망정이었지, 자칫했다가는 만나지 못할 뻔하지 않았니?”

“사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사용인들이 다들 바빠 보여서…….”

“후우.”

남작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숨에 그 말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런 남작의 반응을 확인한 엘리는 재빨리 작전을 바꾸었다.

“음.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허허, 그래.”

그 모습은 영락없는 아비와 딸이 맞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애틋한.

나는 그 해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턱 끝을 까닥였다.

“하루의 휴식을 주지. 그 이후에 업무로 복귀하도록.”

“저, 전하?! 지금같이 바쁜 시기에 어찌 휴식을 명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딸을 저대로 방치해 둘 셈인가?”

“……그건.”

남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와 제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이 가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정말로 인력의 공백으로 인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다녀와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민폐일 터다.”

“……아,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그때, 남작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표정을 피며 말했다.

“제 딸아이가 수도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당분간 로엘과 함께 수도 구경을 시켜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로엘을?”

“예, 그렇습니다. 이 또한 로엘의 적응을 도와주는 계기가 되어 줄 것입니다.”

로엘은 주변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점차 적응을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또래 여자아이가 만들어 주는 영향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지.

“나쁘지 않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허가했다.

“마음대로 하도록.”

“허허, 마침 잘 되었습니다. 슬슬 그 아이의 옷을 사야 하기도 했으니까요.”

“……옷? 그런 것이 왜 필요하지?”

옷이라면 많다. 당장 왕성에만 해도 남는 사용인의 옷이 수백 벌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생각에, 남작은 기겁하며 말했다.

“전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 나이대의 아이한테는 필요한 것이 많은 법입니다!”

“…….”

“게다가 전하께서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 아이가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은 크롬웰 그자의 구박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부분은 저희가 가장 먼저 신경 써서라도…….”

“그만.”

“…….”

좁혀진 내 미간에 작은 골이 생겼다.

고작 옷 하나 필요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남작의 딸 엘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엘이라면…… 그 금색 머리의 여자아이인가요?”

“음? 아아, 그래 맞단다. 이미 만났으니 알고 있겠구나.”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여자아이?”

“어? 아니었나요?”

“아, 아니…… 맞긴 하다만…….”

역시 같은 여자아이라 그런지, 그런 것을 금세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알아보지 못한 여럿 남정네들과는 다르게…….

“……크흠!”

남작은 민망함을 감추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자네의 여식에게 맡기지.”

나는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그 위를 만년필로 쓱쓱 끄적였다.

그러고는 그것을 책상 위로 밀며 엘리에게 눈짓했다.

“가져가도록.”

“이건…….”

엘리는 까치발을 들며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지켜보던 남작이 경악하는 것이 빨랐다.

“저, 전하!”

하얀색 종이 위에 마법으로 인쇄한 왕가의 문양. 위조를 차단하는 복잡한 방지 장치들. 그리고 그 아래로 적혀 있는 1왕자의 친필 서명.

그것의 정체를 남작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배, 백지 수표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 * *

“와아.”

엘리는 로엘의 손을 잡고 수도의 거리로 나왔다.

미아 취급을 받으며 끌려왔을 때와는 반대로 엘리가 이끄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로엘은 호기심 가득한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버거울 지경이었다.

“어머나, 옷가게가 어쩜 저리 크담?”

“…….”

“이거 봐! 거리에 보석상이 있어! 여기는 상단을 부르지 않아도 보석을 살 수 있구나?”

“……응.”

엘리의 시선이 휙휙 돌아갔다.

남작령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 거의 평민처럼 살다시피 하며 자라온 그녀에게는 이곳에서 겪는 온갖 문물들이 새로웠다.

그건,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명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실의 호위는 생각보다 밀착해서 경호하는구나.’

엘리는 등 뒤를 힐끔거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갑옷과 펄럭이는 왕가의 망토. 고작 길거리를 거닐고 있음에도 경계를 유지하는 든든한 태도.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 준 남작령의 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수준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괜히 왕성의 기사들을 붙여 준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기사님들은 잘 쉬고 계시겠지?”

일개 가문의 기사들이 왕성에 발을 붙일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엘리는 당분간 수도에서 머물고 있을 남작가의 기사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자그마한 손길이 느껴졌다.

“저기…….”

“응? 왜? 사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안 사는 거야?”

“뭘?”

엘리는 로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금방 로엘이 말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혹시 저 보석들 말이야?”

“응.”

“아…… 응, 그러네.”

무언가 묘하게 말꼬리를 뭉개는 엘리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윽고 엘리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 그다지 사고 싶지는 않아서.”

“……왜?”

로엘은 자신들을 보내던 조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작 영애께서도 마음껏 고르십시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물건이라도 괜찮으니 사 와도 좋다는 그 말을.

그러니 이토록 뛰어다니기만 하고, 정작 구경에서 그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잖아.”

“……그치만 좋아했잖아.”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은 동경하지만 사치를 부리는 거라면 싫어. 저런 것은 손에 닿기 어려우니까 이쁜 거잖니?”

그리고 엘리는 그렇게 답하며 로엘의 작은 손을 쓰다듬었다.

“이상하지? 분명 소설에 나오는 귀족 영애들은 서민의 문물을 보고 놀라는 편인데, 나는 그 반대잖아.”

“……이상해?”

“응…… 아, 소설을 별로 보지 않는 편인가 보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실제로 주변 영지의 영애들에게도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가난한 탓에 씀씀이가 작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겠으나, 다만 그녀는 그것이 틀리지 않다 믿었다.

날 때부터 고귀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간의 기품을 만드는 것은, 결코 허영심의 충족이 아닐 것이라고.

엘리는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구매할 것은 네게 필요한 물건 들이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고 있자.”

“응. 알았어.”

……어쩌면 정말로 남작가에 전해지는 천성일지도 몰랐다.

그 후로 엘리와 로엘은 수도의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구매해 나가기 시작했다.

옷은 물론이고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들까지. 참으로 다양하고, 또한 그만큼 많은 양이었다.

그중 엘리가 구매한 것은 신기하게 생긴 먹을거리 몇 개가 전부였다.

“절반은 엄마한테 가져다 드릴 것. 나머지는 저녁에 우리가 먹자?”

“응.”

그러는 사이, 어느새 하늘은 노을 진 오렌지색 구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쉽게도 수도 구경의 첫날은 여기서 끝이었다. 더 늦어지면 밤이 오고 말 테니까.

엘리는 조금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노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슬슬 돌아가자. 아직 다음이 남았으니까. 기사님들도…… 응?”

엘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따라오던 기사들은 온데간데없고, 알 수 없는 서늘함만이 문득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로엘의 팔을 슬며시 잡아끌며 말했다.

“기, 길을 엇갈린 건가? 일단 거리 쪽으로 돌아가자, 여기는 인적이 너무 드무네.”

하지만 로엘의 몸은 그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아무리 당겨봐도 마찬가지였다.

“……로엘?”

“…….”

그 순간, 로엘의 가라앉은 눈이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가오는 다섯의 사내들이었다.

“크흐, 저기에 있군.”

찐득한 그 목소리에 로엘의 눈은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욕망이 향하는 목표. 그것이 자신들이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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