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08화
소동 (4)
세계를 이루는 요소. 굳이 마도학을 연구한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마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없었다.
대륙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마나’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은 정론을 넘어서 하나의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괴한들의 앞에서 벌어지는 이 현상은 아니었다.
응집된 마나의 칼날. 그 자그마한 몸을 감싸는 마력. 그것을 설명할 이론은 없었고, 그것을 납득시킬 지식도 없었다.
……돌연변이(突然變異).
다만,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로는 더없이 어울리는 울림이었으리라.
적어도 이 참상을 지켜보던 엘리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로빈!”
방금 쓰러진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괴한들의 표정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단 일격에, 그것도 가볍게 흩뿌린 일격에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초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 할 수 있으리라.
우우웅-!
“……이, 이런!”
“피해!”
하지만 상황은 여유롭게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선명한 푸른빛으로 뭉친 마나가, 다음 공격이 다가올 거라는 사실을 알리듯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그마한 몸은 마치 폭사하듯 그들을 향해 쏘아져 왔다.
슈우욱!
“큭!”
공기를 베어 내며 휘둘러지는 거대한 기운은 패도적이었지만 아직 미숙했다.
때문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괴한들은 죽을힘을 다해 피해 낼 수 있었다. 거의 억지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피해가 없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뿌드득-!
“끄아아악!”
기운에 스친 괴한의 다리가 뒤틀리며 돌아갔다. 그 막대한 기의 흐름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일지 다행일지, 차라리 다리가 부러진 그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다.
“오, 오지 마!”
점차 깊어지는 마력.
더없이 선명해지는 칼날의 기운은 이전과 다르게 고요했고, 잠시 후에는 누군가의 모습을 ‘표방하듯’ 재빠르게 전방으로 내질러졌다.
그리고 비명과도 같은 괴한들의 외침은 그 흐름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쿠구구구구궁!
“……!”
가장 먼저 ‘결과’가 드러나고.
후우우웅-!
그리고 그 후로 뒤늦은 여파가 뒤따랐다.
살을 베어 내는 칼바람. 그리고 옷깃을 저미는 파동.
고속을 아우르는 찌르기 속에서, 그 남자의 검술이 이 자리에 재현된 것이다.
“……아아.”
어느덧 노을 진 길목 위로 어둠이 찾아왔다.
더 이상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동료는 없었고, 주위에는 온통 검격의 흔적만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이다.
다리가 부러진 괴한은 고통도 잊은 채로 그 전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사라진. 아니, 소멸한 나머지 두 명의 동료.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다는 듯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온기를 떠올리면 그것이 얼마나 섬뜩한 결과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득해지는 길목의 불빛 사이로 수많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철컥-
스치는 갑주의 마찰음이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이게 울려 퍼졌고, 이윽고 땅이 울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왕실 직할 제3 기사단, 아르곤 기사단.
그 사이로 권태로운 듯 심드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산 놈들만 체포합시다.”
“알겠소.”
괴한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구속구의 서늘한 감촉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몸은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친 다리를 억센 힘으로 붙드는 손길에도 그러했다.
오히려 그 힘에 안도감까지 느꼈을 정도였으니.
“사망자는 셋. 기절한 인원 하나를 포함하여 나머지 둘을 심문하겠습니다.”
“음.”
그런 자신의 몸을 포박하던 기사들이 누군가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며 보고했다.
괴한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들의 각반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검은 제복과 화려한 금빛의 장식들, 그리고 고귀함을 상징하는 은빛의 머릿결.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번뜩이는 핏빛 안광까지…….
그것이 기절한 괴한이 볼 수 있는 최후의 광경이었다.
과연 삶을 이어 갈 수 있게 된 것이 저주일지 행운일지는, 다가올 미래만이 알 뿐이리라.
* * *
기절한 이들의 몸뚱어리를 지나쳐 애써 두 다리를 버티고 서 있는 로엘에게 다가간다.
로엘은 마지막으로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안심했는지 제풀에 지쳤는지 털썩 허물어졌다.
……잠들었군.
나는 그것을 받아 들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다.”
그 말을 들었을는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설핏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을 보면 아마도 들은 것 같았다.
“…….”
이윽고 내 시선이 남작의 딸, 엘리에게 닿았다.
“다친 곳은?”
“……어, 없어요. 하지만 로엘, 그 아이가 다쳤을 거예요.”
그녀는 곧장 자신에게 다가와 담요를 덮어 주는 기사들의 행동에 경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당혹할 만한 일은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을 본다면, 역시나 그 정신력 역시 남작을 닮은 것처럼 보였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말이겠지.
“보면 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불러 남작 영애를 왕성까지 모시도록. 충격을 받았을 것이니 곧장 남작에게 데려갈 수 있게 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기사들은 아직까지도 멍하니 있는 엘리를 데리고 떠났다.
그건 생존자들을 포박하여 호송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전투의 흔적이 남은 길목을 정리하는 아르곤 기사단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기감으로 느껴졌던 마력의 파장. 그것은 마치 기사의 오러처럼 무척이나 날카롭고 거칠었다.
마나를 오러처럼 사용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다는 말이겠지. 실제로 흔적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여 주었던 검술을 따라 한 건가?’
보면 알았다.
앞선 수련 동안 가르쳐 준 지식들, 그것이 위기 상황과 맞물려 시너지를 만든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도 목걸이가 벗겨져 마력이 해방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테지만…….
‘뭐, 벗겨지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었을 테지.’
그 대마법사가 직접 만든 아티팩트의 효과가 그것이 전부일 리는 없었으니까.
만에 하나를 대비해 기사들을 대기시켜놨다고는 해도, 확실하게 안배한 구석은 따로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때, 조지가 성수를 들고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음.”
나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검붉은색을 띠고 있는 로브 자락 위로 성수를 뿌렸다.
느껴지는 호흡이 더욱 안정된 것을 보면 상처가 아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품에 안긴 로엘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조지가 말했다.
“놈들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제3 기사단에게 호위를 맡길 걸 그랬습니다.”
“호위 기사들의 배신은 예측할 수 없는 사태였다. 도리어 피해 없이 로엘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었던 것에 고마워해야겠지.”
제3 기사단과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기에 일렀다.
그들의 수장이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쓸 만한 무기가 될 수 있었으므로.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내 눈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헤르그 자작. 녀석은 협박을 통해 내 정보통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2왕자파의 스파이었다.
그런 놈에게 얼마 전 한 정보가 들어왔었다. 바로 2왕자파의 일부 귀족들이 내 주변인을 노릴 거라는 소식.
‘건방지군.’
나는 그것에 맞춰 주변인들의 호위를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운이 나쁘게도, 하필이면 남작의 여식이 왕성에 방문했다.
그리고 호위 기사랍시고 붙여 둔 이들은 배신했고.
물론 안배해 두었으니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웠다.
“두 기사는 어떻게 되었지?”
“진즉에 추적을 명했으니 슬슬 잡혀서 끌려오고 있을 겁니다.”
“배후는 물론이고 놈들의 신상 명세까지 파악하고 있으니 쓸모는 없겠지.”
쨍그랑-!
나는 바닥에 놓여 있던 빈 성수 병을 짓밟았다.
“죽여.”
“알겠습니다.”
나를 배신한다면, 그들에게 남은 미래는 처참한 죽음뿐이리라.
예외는 없었다. 그것은 다른 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신이라.’
나는 로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변인의 위협.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아직 내게는 2왕자파 외에도 연방제국이라는 적이 존재했으니까.
그렇다면 호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그 전에.’
감히 내 심기를 거스르게 만든 이들을 단죄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사로잡은 잡배들은 고문한 뒤에 정보를 알아내라. 놈들이 어떤 루트로 의뢰를 접선해 왔는지.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을 암흑가의 실체까지도 모두.”
“수도에 피바람이 불겠네요.”
“단지 예견된 미래였을 뿐이다.”
내 입술이 비틀어졌다. 또한 마주한 조지의 입에서는 최후의 선택지가 내려졌다.
“그렇다면 정보를 확인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물을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답하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로엘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한없이 시린 분노를 담아내고 있었다.
* * *
“제기랄!”
쾅-!
책상을 내리친 한 귀족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결국 이번에도 놈의 경계심만 자극한 꼴이 되지 않았소?!”
차라리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집을 들쑤신 이상. 놈들이 지금 이상의 대비를 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면 어찌했어야 했다는 말이오? 가만히 그 작태를 보고 있었을 거요?”
“그렇다면 적어도 그딴 잡배들 따위에게 일을 맡기지는 말아야 했지 않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도 납득한 것이 아니오? 인제 와서 잡배 타령이나 한다니 우스울 지경이구려.”
“쯧!”
2왕자파의 귀족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결국 귀족들은 혀를 차는 것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어 내며 말했다.
“그래서, 작전은 왜 실패했다는 말이오?”
“아마도 옆에 있던 1왕자의 시종이 잡배들을 막아 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소.”
“이제 고작 열다섯이라 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오?”
당연한 의문이었다. 고작 열다섯의 나이를 지닌 시종이 성인 남성 다섯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잡배라고는 해도 결국 뒷골목을 주름잡는 건달이었다.
물론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 시종을 마탑에서 데리고 왔다고 하더구려.”
“흐음…….”
“마법사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이야기를 듣던 귀족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시종 하나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 남자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경계는 강화되었을 터인데 문제가 있겠소?”
“…….”
“좋게 생각합시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손해란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물질적인 손해는 거의 없는 편이었고, 당연히 전력 또한 손해는 없었다.
심지어 배신한 기사들에게도 지급된 것은 없었다.
단지, 기사단의 자리 하나를 내주겠다고 약조했을 뿐이었으니까.
철컥-
그런 남자가 자세를 바로 하자,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남자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어차피 처음 목표는 혼란이었지 않소?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었을 테니 충분히 그 가치를 다했을 것이오.”
“그렇군.”
귀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눈빛은, 대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킨 남자에게 닿아 있었다.
“뭐,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는 했지.”
그렇게 말한 귀족의 눈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놀드 기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