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13화
자그마한 균열 (2)
“……뭐지?”
병력을 점검하던 연방제국의 한 귀족이 이상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북부의 최전선. 이곳의 분위기는 언제나 무겁고 진중해야 마땅하거늘, 오늘따라 유별나게 어수선했던 탓이다.
정확히는 어수선이라 부르기에도 묘한 것이었다.
“병사들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귀족이 그를 보필하던 기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기사 역시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래?”
귀족은 기사의 말에 여전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본국에서 보내온 물자들이 슬슬 도착했을 시기가 아닙니까? 아마도 그 소식이 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 그렇군.”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귀족은 평소와 다른 병사들의 모습에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어지는 전쟁에 지쳤을 테니 이런 일이 있는 것쯤은 나쁘지 않겠지.”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 이런 사소한 분위기라 하더라도 병사들의 사기와 연관될 터이니, 더 나은 전황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제국의 병사들이라면 응당 그리해야겠지.”
다만 그렇게 답하는 그의 눈에는 작은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병력을 점검하러 온 귀족을 보고도 여전히 어수선한 그 분위기.
마치 그것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 것만 같았다.
‘……뭐, 아무렴 어떠할까.’
귀족은 그 장면을 흘려 넘기며 지나쳤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도움이 되기만 하면 그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러면 또 모를까 어수선한 것은 한 개 부대가 전부였다. 저 정도면 군 기강을 흐릴 일도 없으니 문제는 없으리라.
‘윗선에는 점검 결과를 이대로 보고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 안일한 생각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다음 전투가 벌어진 직후였다.
“피해는.”
“이, 일만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귀족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작 한 번의 접전으로 생겼다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요 근래 전쟁이 유독 힘겨워졌다고는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경과들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리고 추궁은 이어졌다.
“그 외에도 추가적인 피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소, 송구하오나 방어선을 물리는 과정에서 일부 전쟁물자를 놈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자세히.”
“예…… 옙!”
주름진 얼굴과 빛바랜 머리카락.
하지만 그와 반대로 노년의 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근육과 한 눈에도 느껴지는 웅장한 기개.
대연방제국 총사령관 벨리알 공작.
귀족은 지금, 눈빛에서부터 드러난 무척이나 거대한 분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흘분의 식량과 요새에 남아 있던 무구들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사흘분의 식량.”
가뜩이나 전쟁이 길어진 탓에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북부에 있는 칠만의, 이제는 육만이 된 대군이 먹을 사흘 치의 식량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물자였다.
그것을 빼앗겼다는 말은…….
“자네가 이 책임을 어떻게 지게 될지 궁금하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았겠다만.”
“…….”
귀족은 이제 납작 엎드릴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벨리알 공작은 그것을 보며 분노를 삭였다. 어차피 그를 심판하는 일은 자신이 아닌 그분께서 하게 되실 것이었으므로.
어차피 곧 죽을 자에게 분노를 표출해 봐야 의미는 없었다.
“회수한 마약을 내놓아라.”
“예, 각하. 여기 있습니다.”
귀족은 공작에게 꼼꼼하게 접힌 종이들을 내밀었다. 공작은 그것의 내부를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
“……많군.”
“그, 그렇습니다. 일부가 몰래 반입했다기에는 너무도 많은 양입니다. 당장 발견된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니, 병사들의 짐을 수색한다면 보다 많이…….”
“그런 뜻이 아니니 닥쳐라.”
“……예, 각하.”
공작은 나직이 으르렁거리고는 종이에 담긴 마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최소 10그램.’
마약이 제아무리 금지 물품이라고는 해도 전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의와 살육. 그 격한 감정의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해 병사들이 사용하고는 했으니까.
우습게도, 말하자면 일종의 버팀목과 같은 역할이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이 양은 너무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적어도 연방제국 내부의 사정을 알고 있는 공작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4황자께서 이리도 많은 물량을 푸셨을 리가 없다.’
……그래.
연방제국의 4황자는, 병사들로 하여금 몰래 마약을 유통해 왔다.
그것이 설사 비인도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효과가 있었으니. 가장 효율적인 전쟁을 위해서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양은 절대로 이렇게 많지 않았다.
얼추 계산해 봐도 30배 수준이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목적처럼 전쟁을 수월하게 하는 역할이 아닌, 거의 병사들을 중독시키는 수준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
그는 잠시 여러 인물을 용의선상에 올려서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딱 와 닿지 못했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것은…….
“후, 잘못하다간 파벌 싸움에 개입되겠군.”
어느새 정말 섣불리 행할 수 없는 일이 돼 버린 것이다.
‘병사들의 이상을 보고받았을 때 진즉 조사를 시켜야 했거늘…….’
……당했다.
공작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지금 바로 병사들의 소지품을 수색해서 마약을 찾아내라.”
“예, 각하.”
“그리고 병사들을 심문할 터이니 마약상의 정보를 아는 이들을 불러 모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하사받은 귀족은 조금이라도 실책을 만회하고 싶었는지 최대한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들이 총사령관의 막사로 들어왔다.
“이 마약은 어디서 구했지? 순순히 말하는 것이 좋을 거다.”
“저, 저는 보급관이라는 자에게서 구매하였습니다.”
“저도 시세보다 싸게 팔아 주겠다고 하길래 보급관에게서…….”
“저, 저는 친한 병사를 통해 나누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병사가 보급관에게서 구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 있습니다.”
공작의 으름장에 끌려온 병사들이 아는 정보를 죄다 내뱉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온 정보는 보급관에게서 구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연히 보급관 이외에 전시에 물품을 구해 올 이가 있겠느냐? 조금 더 확실한 정보를 말하라는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것까지는…….”
“저, 저도…….”
“……쯧.”
명백한 함정이다.
그들이 말하는 ‘보급관’은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4황자의 명령으로 마약을 유통하는 인물도 있을 테니, 대대적인 추적도 불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마약에 관한 사실과 함께 뒷배가 밝혀진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급감하게 된다.’
공작의 표정이 더욱 깊어졌다.
잘못 공론화됐다간 전 국가적인 지탄을 피하기 힘들 테니까.
그것이 처음 이 일을 실행한 4황자든, 아니면 차후에 추가적인 마약 공급을 하고는 추이를 지켜보는 다른 이든.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두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많은 양의 마약이 풀리게 되면 병사들의 상태는 나날이 나빠지게 되리라.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일단은 일을 덮되, 단속을 강화하여 마약의 추가 판매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살인 멸구까지.
그래, 그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이미 풀린 양이 한 포에 10그램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마약 1회분의 양이 0.03그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지금부터 단속해도 이미 늦은 수준이었다.
“……제기랄.”
내부의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한 공격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썩 꺼져라. 마약을 소지한 죄는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나직이 울리는 분노.
공작은 병사들을 내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내부자가 얼마나 될지를 떠올리면서.
* * *
“연방제국의 북부 전선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렇군.”
나는 조지에게 전달받은 소식을 들으며 은은하게 웃었다.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꾀에 자기가 넘어간 지금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우스웠다.
‘뭐, 그 탓에 회귀 전에는 무척이나 고생했다만.’
잠시 눈을 감고 회귀 전의 일을 회상했다.
각성제를 흡입하듯 마약에 찌든 연방제국 군대는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마약을 직접 공급하는 것이 그들의 ‘황제’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는 그야말로 경악할 지경이었다.
결국 이번 일은 그 사실을 노린 공격이었다.
‘처음부터 마약을 경계하고 엄금했다면 모를 일이었지.’
마약이 암암리에 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대처가 늦었다.
그 방심이 오히려 이 사단을 만든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시기에 일어나는 기묘한 정치적 갈등은 녀석들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겠지.
순간, 감겨 있던 내 눈이 차갑게 뜨여졌다.
‘그리고 그것은 4황자, 네 녀석이 자초한 일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적을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는 자만심, 자국의 병사마저 이용하는 그 잔혹한 성격.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지만, 과연 역겨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약을 유통한 암흑가의 인원들은 어떻게 되었지?”
“이미 그곳을 빠져나왔다 합니다.”
“그렇군.”
“하도 양이 많다 보니 벌이도 쏠쏠했다고 하고…… 뭐, 일단은 혼란을 만들겠다는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되겠군요.”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평소라면 잘난 체를 한다며 거부감을 드러냈을 조지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모든 것이 설계대로였다는 사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 번째 목적에 불과하겠지.’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만드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녀석이 처음으로 제안한 계책.
그것이 성공적으로 완성된다면, 연방제국에 생긴 혼란과 균열은 그 크기를 급격히 불려 나갈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놈들에게서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겠군.”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조지의 눈이 여유롭게 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마저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촤악-!
순식간에 책상 위로 펼쳐진 북부의 지도. 나는 연방제국의 국경지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이제 야만족들의 시선은 한층 더 연방제국으로 향했을 터다.”
“그도 그런 게, 드디어 전선에 구멍이 생겼으니…… 다른 곳에는 없는 그 넓은 곡창지대를 모조리 점령할 기회니까요. 아마 야만족의 땅에 남은 전사까지 모조리 끌고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확하다.”
드디어 놈들을 가로막던 연방제국 북부의 관문이 무너졌다.
길어진 전쟁에 느슨해진 놈들의 병력이 재차 도끼날을 번뜩일 것은 당연한 일.
애초에 연방제국과의 전쟁이 벌어졌던 것도 식량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북부는 텅 비어 있다는 말이 되겠지.”
말 그대로 병력 하나 남지 않은 빈 땅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러자 조지 역시 씩 웃으며 말했다.
“슬슬 움직이실 겁니까?”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까지 기다려 왔으니까.”
이전에 있었던 북부 오지로의 원정.
결과적으로는 회귀 전과 다르게 드워프를 구출하는 것으로 놈들의 잠재적인 힘을 깎아 내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솎아 내기로써는 적절했으나, 정작 ‘전공’이라고 이를 만한 것은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준비해 온 지금은 달랐다.
“마침내 때가 왔다.”
회귀라는 일을 겪고 일 년.
아직 완벽하진 않으나, 그래도 꽤 많은 준비가 끝났다.
약진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춘 셈이다.
이제 에스테반의 힘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가 왔다.
더 이상 타국에게 고개를 조아릴 뿐인 약소국이 아니라고. 그 사실을, 대륙 전역에 증명할 때가 다가왔다.
“계획대로 가지, 우선 그들을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