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15화
준비된 일, 잊힌 땅 (2)
“출정식이 다가오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훈련에 임하도록!”
“충!”
“봄이 찾아왔다 하더라도 북부의 추위는 그치지 않았을 터다! 혹한의 대비도 잊지 않고 철저히 준비해라!”
“예! 알겠습니다!”
북부에 드리운 전운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출정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보급 마차들. 이미 북부의 사람들은 다가올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그 1왕자가 북부에 도착했을뿐더러, 국경지대 수호의 역군이었던 이들 역시 속속히 집결하고 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1왕자 전하.”
“오랜만이군.”
“태양기사단의 전원은 북부 원정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하달 받고 이곳에 도착했음을 보고합니다.”
“음.”
태양기사단의 부단장, 로데르 캘버.
나는 그의 인사를 받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기사단은 갈데르드 평야 수호라는 긴 임무를 마치고 북부로 발길을 들였다.
성벽의 건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데다 주변의 몬스터들 역시 꽤 토벌해 두었으니, 더 이상 그들을 그곳에 배치해 둘 필요가 없던 것이다.
전원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태양기사단의 인력은, 낭비하기에는 너무도 큰 전력이었으므로.
……한데.
“보다 성장한 것 같군.”
“하하, 그렇습니까?”
오랜만에 마주한 로데르는 느껴지는 기도부터가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보며 말했다.
“오러를 다루는 것 외에도 기본적인 검술에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군.”
“역시 전하께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산맥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나?”
“정확히는 전하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을 염두에 둔 덕분입니다.”
로데르는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답했다.
그럴 수밖에. 제아무리 짧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검왕이라 불리던 내게 가르침을 시사 받은 태양기사단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들이 미래에 최종적으로 가게 될, 더욱 옳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조언해 주었으니 그 실력이 느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물론 직접 그 결과물을 보니 흡족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당연했다.
‘……나쁘지 않군.’
전쟁은 결코 기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차별적으로 오러를 남발하는 일 대 일의 전투도 아니었으며, 적들이 오러의 회복을 기다려 주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라 하더라도 검술을 중요시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저들은 연방제국과의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인재들이었으니, 이 성장은 에스테반에 있어서 뜻깊은 일이라는 소리였다.
‘모든 계획에 어긋남은 없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설계였다.
그렇게 나와의 대화를 끝낸 로데르는, 우릴 기다리고 있던 변경백과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변경백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소.”
야만족의 습격으로부터 북부를 지키는 데에 일조했던 태양기사단은 변경백에게 은인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원정 참가는 더욱 믿음직스러웠을 터다.
“태양기사단의 합류 덕에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이번에도 나와 함께 북부의 병사들을 이끌어 주시오.”
“아닙니다. 그게 어찌 저희의 덕분이겠습니까?”
로데르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왕자 전하께서 국왕 전하를 설득하시어 저희를 보내셨으니, 그것은 온전히 전하께서 이루신 일일 것입니다.”
“그렇구려.”
로메르트 변경백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바쁜 일정을 그들이 소화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출정을 앞둔 지금, 시시콜콜한 겸손으로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전하, 슬슬 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빠르게 불러오도록.”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변경백의 가신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전쟁이 가까워진 탓인지, 아니면 1왕자와 마주하게 된 탓일지. 긴장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들었겠지만 에스테반의 군대는 북부 야만족의 땅을 점령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다.”
“예, 전하.”
변경백의 가신들이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 포인트에 집어져 있는 깃발들은 그들이 앞으로 소화해야 할 지역을 명확히 보였다.
‘과연 아직도 손에 닿지 못했던 금지…… 넓긴 하군.’
‘이번 일이 끝난다면, 정령 저 많은 영토를 얻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표시된 그 넓이는 비록 개활지긴 했으나, 무려 현 에스테반 영토의 오 분지 일에 달하는 크기였다.
나는 가장 먼저 물자의 관리를 맡은 이에게 말을 걸었다.
“주요 포인트에만 관문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족히 수십 킬로미터에 걸친 방어선이 될 것이다. 그것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물자들은 준비되었나?”
“예, 그렇습니다.”
“좋아. 그 과정에서 조금의 애로 사항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돌린 순간, 물자 관리를 맡은 가신의 표정이 눈에 보일 정도로 조심스러워졌다.
“전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북부 땅을 점령하는 이유는 야만족의 공격을 보다 수월하게 막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넓은 지역을 점령하려 하십니까?”
그 말에 다른 가신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야만족의 습격을 막는 것은 북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되는 이상 북부의 피해는 지속적으로 누적될 터.
때문에 나는 전쟁 그 자체를 외부 야만족의 땅에서 벌이는 것으로 그것을 해소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피해를 복구한다 해도 전쟁이 벌어진 땅은 쇠약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단지 그런 것뿐이라면, 가신의 말대로 그 넓은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관리하기만 어려워질 따름이고, 방어가 취약해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신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었다.
“지도를 확인해 보도록.”
“예?”
“여기, 방어선 구축 예정 지역으로 표시된 곳에는 뭐가 있을 것 같지?”
나는 손가락으로 어느 한 지점을 짚었다. 그러자 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야만족의 땅은 대륙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장소다 보니 알려진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지도에도 당연히 표시된 것이 없다 보니…….”
결국 그렇게 가신들은 모른다는 답을 내놓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 위로 손가락을 그었다.
“이쪽부터 이쪽까지는 거대한 협곡이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상 병력이 투입하지 않아도 되는 구역이지.”
“……예? 이렇게 긴 협곡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곳을 보아라.”
스윽-
내 손가락이 닿은 곳으로 시선이 또다시 집중되었다.
명확한 설명은 없었지만 모두 새로운 정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여기는…….”
“이곳의 고저 차는 야만족의 땅에서도 무척이나 가파른 수준이다. 이 고지를 점령하고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결코 이곳으로 놈들이 오지 못할 터다.”
“허……!”
“그게 정말이라면, 이건…….”
국경지대는 산맥이나 강과 같은 지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는 내가 표시해 둔 방어선 역시 마찬가지.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점령 예정 지역을 선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이 시점에서 북부 오지의 지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다.’
사로잡힌 드워프에 의해 성벽이 건설되고 방어선이 구축된 미래에.
그 힘을 꺾기 위해 편성된 원정군을, 무엇보다도 까다롭게 만들었던 지형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청사진 속에는 협곡이나 험준한 지형과 같은 요소들이 이미 종합되어 있던 것이다.
또한 그곳을 미리 점령하고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의미는 남달랐다.
“장애가 될 지형들을 잘 활용한다면, 놈들을 막는 것은 에스테반의 북부 국경지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할 터다.”
“확실히…… 땅은 넓어진다 해도 그 범위가 무척이나 제한될 테고…….”
“게다가 그만한 점령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넓은 땅와 많은 사람은 곧 국력이다.
이번에는 그 중 땅.
보다 넓은 국토라는 이름의 힘을 에스테반이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한데 이런 정보를 어디에서 가져오신 것인지…….”
“앞선 원정을 통해 확인한 사항들이다.”
“그, 그렇습니까?”
가신들은 고개를 주억이며 납득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용해 먹기 좋은 핑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원정군이 움직인 루트는 드워프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철저하게 비공개되어 있었으니, 그들이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방한에 대비한 대비는 완료되어 있겠지?”
“병사들이 입을 털가죽 옷을 다량으로 입수해 두었습니다.”
“충분하다.”
나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마지막 사항으로 넘어갔다.
“출정은 나흘 뒤가 될 것이다.”
“흠!”
“허……!”
그 말에는 가신들은 물론이고 로메르트 변경백까지 침음을 흘렸다. 일정이 예상보다도 일렀던 탓이다.
하지만 번복은 없었다.
“지체할 이유는 없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으니.”
“…….”
“자신이 없나?”
“…….”
한 명 한 명.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시선과 일일이 마주하며 한 말이었다.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헛된 노력이었다는 불안감이 남아 있나?”
“……아닙니다.”
“그렇겠지.”
이미 우리에게는 원정을 겪은 태양기사단과 수많은 병사. 그리고 이를 보조할 대마법사와 준비된 보급들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는 전력들, 당연히 자신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들이 침음을 흘린 이유라면.
그저 그간 계속되었던 야만족에 대한 공포와, 그 누구도 디딘 적 없던 공간에서 새롭게 시작할 일들에 관한 막연함 따름일 터다.
그러니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
노련한 북부의 병사들은 계획이 엇나가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저곳은 결코 마경이 아니다. 그저 척박한, 살기 조금 힘든 땅일 뿐이지. 저들 역시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아니다.”
쿵!
아래로 내리찍은 손끝에 탁자가 강하게 진동했다. 순간 움찔하는 가신들 나는 나직이 물었다.
“명했던 준비 중 부족한 것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날 이후 나태하게 보냈나?”
“아닙니다!”
방금 내리찍은 손끝, 마치 파인 듯한 지도 위에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내가 미리 명했던 대로만 했다면. 이미 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네!”
필요한 것은 그저 확신, 그것 하나뿐.
그렇기에 단호하게 말한다.
“일정은 바꾸지 않는다. 최소 이틀 사이에 최종적인 점검까지 마쳐 놓도록. 출정식이 시작되기 전에 직접 확인하겠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저마다 준비를 위해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가신들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쿵-!
심장 소리에 맞춰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전장의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북부 영주민들의 표정에는 믿음이라는 감정이 떠올랐으며, 그 꽉 쥐어진 손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쿵-! 쿵-!!
“…….”
그럼에도 나열한 병사들은 북소리가 울리는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작은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개를 드러내며 눈앞에 보이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있을 뿐이었다.
철컥-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갑주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거대한 북소리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을 소음에 불과했지만, 이미 모든 신경을 집중한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야만족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약해져 있다.”
북소리가 멈추고 마법에 증폭된 목소리가 나열한 병사들의 귀로 다다랐다. 쥐 죽은 듯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이제는 정말로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원정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터.”
수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고 셀 수 없을 정도의 피가 오지에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병사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
다만 남자는 그들에게 맹세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피가 결코 가치 없는 죽음이 되게 만들지는 않겠다.”
“그들이 오지에 흘릴 피는 미래의 양분이 될 것이고, 그 시체는 반석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내겠다.”
쿵!
병사들이 일제히 발을 굴려 호응했다.
그 거대한 울림은 귓가를 맴돌던 북소리보다도 웅대하고, 더욱 가슴속으로 와닿았다.
그러니 남자는 검을 들어 올렸다.
챙!
허리춤에서 뻗어져 나간 청록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오늘부터 우리는 야만족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손에 들린 검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방향은 천천히 꺾여 북부로 향했다.
“출진한다.”
핏빛의 눈 속에서 불붙은 투지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