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124화 (124/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24화

백야 (1)

성채 사이사이로 어둠을 밝히기 위한 횃불들이 타오른다. 이미 그 주변은 훤히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에스테반의 땅이 된 북부의 점령지.

하지만 그곳은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은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만족의 땅이었다.

눈을 뜨고 코를 베인 야만족들이 이를 가만두고 볼 리가 있겠는가? 아마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병력을 보내올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은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야만족들의 움직임은 어떻지?”

“경계 중 이상은 없습니다!”

“음, 그렇군.”

그런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는 바로 함께 경계에 나서는 태양기사단이었다.

이미 야만족의 성채 하나를 처리한 그들의 위용은 그들에겐 하나의 전설로 여겨지기 충분했으므로.

게다가 태양기사단도 북부의 병사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걱정하지 말도록. 전하께서는 놈들이 섣부르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성채를 세우지 않으셨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만일 놈들이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 성채가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경계에만 집중하도록.”

“옙!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줌과 동시에 팽배하게 자리한 긴장을 완화시켜 주겠지.

‘확실히 그 보좌관이라는 남자의 말대로군.’

조지라고 했던가? 그는 일부러 태양기사단을 움직여 내부의 분위기를 조절해 나갔다.

어찌 보면 선동과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전장에서 와닿는 효과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하루가 멀다고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으니까.

‘부단장께서 그 남자의 명령을 따르라 했을 때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 나쁘지 않은 효과에 기사의 입술 역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괜히 1왕자를 수행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수고하도록. 나는 옆 성채의 병사들에게 가 보겠네.”

“예, 기사님!”

기사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그들을 지나쳐갔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헛!”

“뭐, 뭐야!”

돌연, 머리 위에서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대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소란.

병사들 사이에서 당혹감에 젖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적습인가?!”

“빠, 빨리 종을 울려!”

“당황하지 말고 지휘부에 소식을 전하라!”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잠시 어수선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것은 이내 원상태를 되찾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이해했으며, 조금의 망설임과 주저함도 없이 행동했다.

그들은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

“저, 저길 봐!”

그리고 드러난 현상은 다행히 그들의 우려했던 적습 따위는 아니었다.

대신 보다 황당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더 초현실적인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밤중에 이어진 어마어마한 진동과 마력의 폭주.

그 직후, 은하수가 쏟아지던 밤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태양이 솟아올랐다.

“태, 태양이 나왔다!”

……그래.

거짓말 같았지만, 이는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그 대기의 진동이 성채를 옮겨 왔던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는 없었다.

“이,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이…….”

하늘에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보며 할 수 있는 것이.

한낱 병사인 그들에게 경악 외에 존재할 리 없었으므로.

* * *

북부에서도 최상단에 위치한 도시 알브헤임.

불가침을 상징하는 이곳은, 대륙에 이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단 한 번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야만족의 땅에 발을 딛는 것조차 위험한 일일진대, 그 최심부에 있는 땅에 발길을 들일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니.

그렇기에 야만족들은 이곳을 다른 자들과 다르게 불렀다.

“위대한 전사시여, 에스테반의 잡졸들이 성지의 앞까지 침범하였습니다.”

혹한의 땅.

……그리고 위대한 전사, 칸의 거처.

“크흐흐, 그 개새끼들이 기어코 목을 들이밀었다는 말이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부족의 제사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낮추었다.

야만족의 땅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로지 힘으로 모든 질서가 정해지는 땅이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곳을 대변하는 말은 그토록 섬뜩했고 그만큼이나 알기 쉬웠다.

쉽게 말해서, 힘만 있다면 어떠한 권력이든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있는 ‘칸’은 야만족들의 지도자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절대적인 권위와 카리스마. 뭇 전사들이 우러러보는 압도적인 강함…….

이조차 단지 사내가 가진 힘을 표현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미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제사장들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저, 저희의 불찰입니다. 방비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논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공교로웠다.

전쟁으로 인해 여유가 없는 와중에 쳐들어온 놈들의 병력. 그리고 순식간에 제압당한 봉화와 성채.

때문에 대응도 늦어졌고, 이후에는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놈들은 성채를 빼앗고 그것을 재료로 활용해 순식간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방비에 신경 썼다 한들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칸 역시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였으니.

“두 번이나 이 땅에 치욕을 안기다니, 놈들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

꿀꺽-

거처에 나열한 제사장들의 표정이 굳었다.

주저 없이 지시를 내리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던 탓이다.

“위대한 전사시여, 다행히 놈들은 방어선을 구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놈들의 목적이 땅을 점령하는 것뿐이었다면, 대응은 그 이후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놈들의 행태가 괘씸하긴 해도 어차피 날아다니는 파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흠.”

제사장들의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단순히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서 하는 허튼소리만은 아니었다.

칸이 의자 위로 거만하게 몸을 기대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우선순위를 생각하자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놈들은 쳐들어와 놓고는 그대로 자리 잡고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은 역시 게으른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할 정도.

고작 저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던 것이다.

‘역시 문명의 졸개들. 우습기 그지없군.’

제아무리 성벽을 쌓는다고 해도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들에게 영원한 힘의 원천이 있는 이상, 여느 때처럼 그들을 농락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심지어 에스테반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나라. 약탈을 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거슬리는 벌레 떼가 아닌 제국을 처리할 때였다.

풍족한 평야를 가진 제국은 에스테반보다 더 좋은 먹이였으며 위협적인 상대였으니까.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간 양쪽 모두를 놓치는 법.

지금은 더 득이 되는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건방지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부족의 지도자인 칸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놈들을 징벌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으므로.

다만, 놈들이 자리 잡은 위치가 너무나도 거슬렸다.

“감히 성지의 바로 앞까지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다니…….”

성지라는 장소는 그들에게 크나큰 의미를 지녔다.

부족의 아이들이 진정한 전사로 거듭나는 곳. 그리고 이 땅을 더욱 강대하게 만들어 주는 곳.

그러니 만약 놈들이 멋모르고 그곳까지 침범했다면 곧장 징벌의 도끼가 내렸을 터다.

하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잠시 자비를 베풀 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성지 주변에 전사들을 배치하고 놈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만들어라.”

“예, 위대한 전사시여. 알겠습니다.”

“나머지 전사들은 모조리 전선에 투입하겠다. 거처를 지키는 대전사들까지 모두.”

……하지만 그런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미 그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곳은 사라졌으며, 그 힘이 되어 줄 마력의 덩어리는 잡졸로 취급하던 에스테반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 가는 동안.

에스테반의 방비는 걷잡을 수 없이 완벽해질 거라는 사실 역시도.

* * *

“저것은…….”

“뭐, 진짜 태양이었네요.”

조사를 위해 말을 달려 나온 로데르는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반응했으리라.

비록 진정한 태양과 비교하면 한낱 반딧불이와도 같은 크기였으나, 그것은 명백한 태양이었으므로.

“……난 또 보고한 기사가 미치기라도 한 줄 알았네.”

따라온 조지는 그렇게 어깨를 으쓱이다가 눈을 찡그렸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태양 빛이 의외로 밝았던 탓이다.

“그나저나 저런 귀찮은 것을 또 어디에서 주워 온 겁니까? 그것도 한밤중에?”

그 신경질적인 물음이 향한 곳에는 우아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이제 막 도착하여 옷매무새를 다듬던 내 모습이었다.

나는 마저 장갑을 착용한 후에 여유롭게 답했다.

“저것만 주워 온 것이 아니다.”

“뭐요?”

“의외로 쓸 만한 것이 많더군.”

그렇게 말하며 뒤쪽을 눈짓했다.

고대어로 된 연구일지를 포함한 의외의 수확들.

그것을 한 아름 챙겨 들고나온 레이튼의 표정은 하늘에 떠오른 태양만큼이나 밝았다.

“고대의 기록뿐만 아니라 마법에 대한 것들도 잔뜩 적혀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에스테반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니, 뭐 고대 유적이라도 털어 온 겁니까?”

“비슷하다.”

마탑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고대 마법 부활 프로젝트.

이 기록들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면, 필시 그 시기를 무던히도 앞당길 수 있으리라.

‘아마 마탑에 새겨진 방어마법 역시 마찬가지겠지.’

철저하게 검증된 위력!

그 방어 마법진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기에, 새삼 더욱 기대가 되었다.

“곧장 성채로 돌아가 그것을 정리해 두도록. 마탑주가 도착하기 전까지 모조리.”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잔뜩 기대에 부푼 레이튼을 보내며 조지에게 물었다.

“북부 국경지대에서 오기로 한 후발대는?”

“이미 점령지 내부의 야만족들을 쓸어 담으며 오고 있습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이군.”

“아마도 국경지대의 병력까지 모조리 끌고 오는 것 같은데요.”

“시기를 생각해 보면 그렇겠지.”

내가 보아 온 로메르트 변경백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그것이 옳은 판단이라는 사실은 입만 아픈 이야기였고.

“그렇다면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저것을 운용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그런데 대체 저게 뭡니까?”

“고대의 마법사들이 만든 실패작이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내포하고 있지.”

“허.”

고대 마법사들의 잔재.

태양이라는 위용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모습이었으나, 그 한 점에 수없이 많은 마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활용법 역시 무한하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저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당장. 그리고 그 미래에도 꾸준히 이득이 되게끔 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마탑주 엘레이드.”

“예, 전하.”

“저 마력들을 자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겠나?”

“지금이라면 가능합니다.”

마탑주는 그렇게 확언하며 마나를 일으켰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마력의 위로 한 줄기의 마법이 덧씌워졌고, 이윽고 그것에서 흘러나오던 에너지가 완벽하게 차단됐다.

이른바 안전장치를 하나 달아 놓은 것이다.

“본래 이 정도의 마력을 일개 마법사가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것을 옮기시면서 내부의 마나 구조가 흐트러졌습니다.”

“쉽게.”

“한 점에 뭉쳐 있던 구속이 풀리고 제어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뜻이지요.”

“뭐, 그렇군.”

전혀 쉽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떨까.

나는 다음 지시를 기다리던 마탑주의 눈을 바라보았고,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토록 초라하게 빛나서야 태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는 않겠지.”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마력을 더욱 강하게 해방시켜라. 오늘부터 이 땅을 지배하던 혹한은 사라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에 뜬 마력 덩어리가 그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그러곤 마치 한낮에 뜬 태양처럼.

“……백야.”

그 열기와 빛이 얼어붙은 땅과 병사들의 몸을 녹이고, 하늘을 밝게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