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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132화 (132/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32화

압박 (2)

‘……추가적인 조건이라고?’

일순, 대사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성국에서 지원키로 한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성물이었다.

오랜 대륙 역사에 없던 일…… 아니, 어쩌면 이다음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전례가 분명했다.

앞선 치료사제의 파견이나 평화 협정 역시 무척이나 이례적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바라다니?

신성제국과의 관계를 우위의 양면으로 만들어 낸 1왕자가 성물의 위력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1왕자는 현재 계산하에 지원의 조건을 추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하, 이 이상을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라.”

“이미 양국의 관계를 위해 수차례나 양보를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대사제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며 협상의 여지를 일축했다. 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흥미로운 것을 들었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듣고 보니 이상하군, 양보는 분명 에스테반측이 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연방제국과 반목하는 상황을 바랐던 것은 그대들이 아니었던가?”

대사제의 입술이 정곡을 찔린 듯 꿈틀거렸다.

“그에 대한 피해를 대비하기 위해 무역과 관련된 협정 또한 체결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나쁘지 않은 핑계지만 말은 똑바로 해야겠군. 그것은 현재 진행 중인 무역 의존에 대한 보상이다.”

“그건…….”

“내 생각에는 성물이 전쟁의 피해를 완화시킬지언정 차단해 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나는 이죽거리듯 말을 이어 갔다.

“낙장불입을 만든 다음 이제 와서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과하다고 말하는 건가?”

“…….”

두 국가의 반목을 유도한 것은 신성제국. 그리고 이 모든 지원은 처음부터 에스테반의 양보가 없었다면 존재조차 하지 않을 일이었다.

……저들의 양보고 성물 나발이고, 애초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무역분쟁도 전쟁도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물론 신성제국이 없었어도 자연스레 흘러갔을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 사실을 저들이 알 턱이 없었다.

저들이 생각하기에 성국의 비밀을 쥐고 있는 우리가 연방제국에 협력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길 터니까.

하물며 그들에게 신성철이라는 맛있는 먹잇감까지 드러내지 않았던가?

상황이라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 상황은 명백히 에스테반이 손해만을 볼 뿐이라고.’

그렇게 저들에게 상하 관계를 인식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성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들의 입장이다.

이득이 된다면 이쪽에서도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게 아니라면 신성제국에서는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정되었군.”

나는 책상 위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지금껏 없던 진지한 눈빛으로 대사제와 성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쪽에서 추가적인 요구를 건네 올 것을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지.”

“…….”

대사제는 입술을 다물며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곧 강한 긍정이었다. 이윽고 대사제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추가적인 조건은 무엇입니까?”

“호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속내를 들킨 이상 발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저쪽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면 사양할 필요는 없으니까.’

전후 관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이득을 좇아 움직이면 될 뿐.

“에스테반에서는 로에나의 성물, 풍요의 잔을 함께 빌리겠다.”

“푸, 풍요의 잔……!”

이번에는 성녀가 그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지, 지금 다른 것도 아닌. 풍요의 잔을 내어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협상에 관한 대비를 해 온 대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성국의 지도자인 아델 드 로에나.

그는 소식을 들고 온 사제에게 협정의 내용을 전달받으며 놀람을 표했다.

“그가 풍요의 잔을 건넬 것을 추가로 제시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군요.”

지금까지 성국을 대하는 1왕자의 모습들도 놀라웠으나, 풍요의 잔이라는 이름이 주는 놀라움은 더욱 컸다.

“가르덴 대사제께서 전해 온 내용에 의하면, 이미 그것의 효능은 물론이고 용도까지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효능과 용도를 꿰뚫다니…….”

“그것에 관해서는 확신하고 있다 전해 오셨습니다.”

“타국의 왕자가 성물의 기원을 어찌 알고 있단 말입니까?”

풍요의 잔.

그것은 현존하는 성물들의 근간이 되는 물건이자, 인간이 빚은 여느 성물들과는 다르게 신이 내려 주었다 전해지는 최초의 성물 중 하나였다.

그 이름에 걸맞은 신성력은 무한히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았고, 그렇기에 신성제국의 풍요 그 자체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1왕자가 그것의 효능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풍요의 잔의 능력과 관련된 서적들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감추어져 있을 터입니다.”

“예, 대사제 급의 직위가 아니라면 열람이 불가능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에스테반의 1왕자가 알고 있다는 말은…….”

이것은 신성력의 비밀을 아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종교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는 성물이었던 만큼, 먼 과거에 알려져 있던 백마법 원소와 신성력의 관계 이상으로 처음부터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으니까.

“자세한 것은 대사제께서도 알아내지 못하셨다 합니다.”

“아쉬운 이야기군요.”

교황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증이 치솟아 올랐다.

에스테반에 대해. 아니, 1왕자에 대한 모든 것이.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관해 논할 시기가 아니었다.

아직 1왕자가 제안한 사안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분명 효능과 용도를 꿰뚫었다 하였지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1왕자는 어째서 풍요의 잔을 원했을까요?”

교황은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실제로 풍요의 잔이 가진 효능은 그 상징성과 신성력에 비해 무척이나 초라한 수준이었다.

잔 속에 담긴 물을 성수로 바꾸어 주는 것.

오히려 여느 성물보다 못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활용만 따지자면 다른 성물을 원했으면 원했지, 풍요의 잔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하,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짐작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 시선을 받은 사제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리고 풍요의 잔을 건네는 것은 그런 내용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제께서는 그 제안을 반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만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해서라도 재협상의 여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상징적인 의미라…….

사제의 말을 들은 교황이 뒷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추가적인 성물의 지원까지는 충분히 예상하던바, 에스테반의 요구를 수용토록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것이 성하의 뜻이라면.”

“이유를 여쭙지는 않으시는 것입니까?”

사제는 방금까지 재협상이 필요하다며 반대하던 것과 다르게, 즉각 그 의견을 납득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태세 변환이었다.

교황이 이에 대해 묻자, 사제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말했다.

“성하께서는 저따위의 일개 로에나의 종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이 모든 것도 역시 로에나의 뜻대로 이루어질 터이니, 이견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신의 뜻.

그것은 마찬가지로 교황을 납득시킬 단어로는 충분했다.

“하루빨리 성국의 뜻을 가르덴 대사제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이로써 두 국가는 공식적인 협력국이 될 것입니다.”

오랜 줄다리기의 끝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 * *

나는 집무실로 도착한 소식을 확인하며 무감하게 말했다.

“이쪽의 의견을 모두 수용해 주겠다 하는군.”

“성물 하나를 추가로 지원하게 생겼는데 시원시원한 결정이군요.”

그 대꾸에 어깨가 절로 으쓱여졌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테지.”

조지는 추가적인 성물의 지원이 크나큰 출혈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상을 알고 있는 내게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것을 요구한 것에 안도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풍요의 잔은, 가장 필요 없고 가장 악용하기 어려운 성물이었을 테니까.’

신성제국의 반응을 짐작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간단했다.

실제로 서신이 도착할 시기에 맞춰 일정들을 미리 조절해 놓았을 정도로.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치들이 어떻게 생각하던지,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다만 그쪽에서도 불안했던지 조건을 덧붙인 모양이군.”

나는 서신의 내용을 읽어나가다가 웃음을 흘렸다.

저들이 못 박은 조건은 두 가지.

하나는 풍요의 잔이 가지는 상징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말 것.

다른 하나는 풍요의 잔의 대여 기간을 반년으로 제한하는 것.

말 그대로 필요한 데에만 사용하고 즉각 반납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 역시도 예상에 있었고, 달리 상관없는 조건이었다.

“마탑주의 인공 태양 연구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그것을 보낸다.”

“이미 연구가 막바지에 치달았다고 하니 지체될 일은 없을 겁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잠든 성배. 그리고 인공 태양.

두 기적과 같은 마법의 산물은, 다르지만 무척이나 비슷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담긴 그 내부를 연구해 본다면?

아마 서로 다른 대조군인 둘을 비교하다 보면 인공 태양에 관한 이해도 역시도 증가할 수 있겠지.

거기에 풍요의 잔 그 자체도 연구할 수 있으니 반년의 시간이라면 족하고도 남았다.

“빨리 이것을 이용할 수 있을 때가 다가왔으면 좋겠군.”

내 시선이 마지막으로 상자 안에 담긴 무언가로 향했다.

그것은, 명령을 받은 남작이 구해 왔던 물건이었다.

에스테반의 미래가 될 거라며 자신했던 그것…….

“……슬슬 시간이 되었군.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한산하게 느껴지는 왕궁의 복도를 지나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전의 앞으로 다다랐다.

문 너머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주둔하는 장소처럼.

뭐, 전투라고 해야 할지.

비슷한 느낌이 될 테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끼익-

“…….”

대전의 문이 열리고, 내부에 도열한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흐르는 침묵.

그중에는 이질적인 복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은색의 성복을 입고 있는 두 남녀, 가르덴 대사제와 성녀였다.

“알렌 에스테반.”

“뭇 기사들의 이정표이자 에스테반 왕국을 이끄시는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나는 아버님의 목소리에 맞추어 예의를 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몸을 바로 했다.

저 높은 왕좌에서 나를 굽어보시는 아버님. 그리고 대전으로 나열한 귀족들과 낯선 손님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본격적인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국무회의에 그대들을 불러낸 것은,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다.”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란스러워지려는 내부의 전경을 눈동자 속으로 담았다.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절대로 느긋하지 않은.

“하지만 아쉽게도 관중들이 모두 모이지는 않은 모양이군.”

“…….”

“뭐, 두셋 정도야 상관없겠지.”

딱-!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중얼거림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내 손가락이 침묵 속에서 자그마한 파문을 만들었다.

그러자.

끼이익-!

철컥-

……대전의 문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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