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49화
수도 공방전 (4)
‘달라진 것이 없군.’
그 말대로다.
숱한 전쟁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깨어 내고 초인의 반열에 우뚝 섰을 무렵.
그때도 녀석이 보인 반응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부정이었으므로.
그러니 새삼스러울 필요가 없다.
왕실 직할 제1 기사단장 아놀드.
놈이 품고 있는 추악한 자격지심과 질투심은 이미 훤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기대했던 내 실수군.’
그것이 이 시기에 남아 있을 정의와 용기일 거라고…….
앞을 가로막은 그 모습에 잠시나마 흥미가 일었던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래서, 결론은?”
냉정한 시선이 마주했다.
“이곳에서 네 힘이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아라.”
그러자 녀석은 입술을 비식대며 확신했다.
그 가공할 초인의 힘은 모두 꾸며진 것이라고. 자신에게 들통 난 이상 진실을 파훼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어리석군.
“…….”
스윽-
나는 핏물이 밴 엘베른의 검신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그렇게 청록빛의 날이 투명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지 따위를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 검을 익힌 것이 아니다. 하물며 네놈에게는 그것을 언급할 자격조차 없지.”
“큭! 그 허상의 실체가 드러날까 언급을 피하는 것이냐?!”
“아니.”
이로써 확실해졌다.
……사람이라는 것은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 그 인생에 큰 충격을 주는 일이 아닌 이상, 안락하게 흘러가는 한 절대로.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뭐?”
우우우웅-
잠시 꺼졌던 살의의 파도가 다시금 칼날의 위로 넘실댔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닌, 검왕이라고 불리던 절대자의 힘이었다.
“……!”
공포는 억센 피부를 뚫고 심장을 억죌 정도였다.
지금만큼은 내 앞을 가로막은 아놀드 역시도 세포 하나하나에 두려움을 각인할 수 있으리라.
“이, 이 살기는…….”
“덕분에 고민하고 있던 것이 풀린 기분이군.”
나는 그저, 무심히 말했다.
현시점에서 나를 배신한 것이 확정적인 이들을 모조리 죽인 이후로.
남은 2왕자파를 어찌할 것이냐는 아버님의 질문에 머릿속으로 작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먼 미래.
나를 업신여겼던 귀족들까지 죽이는 것은 사사로운 복수일까 라는 어리석은 고민을.
지금이라면 내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이들이지 않을까, 라는 황당한 자문자답을…….
그 답은 ‘아니’였다.
현시점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 비록 당시의 상황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엄연히 ‘일어났었던’ 현실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놈이 내게 심어 준 확신은 그러했고, 비로소 나는 짧았던 고민의 답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래.
“역시 모조리 죽이는 것이 나았다.”
감정의 편린조차 없어 보이는 무표정.
놈은 내가 다가가자 증명이니 뭐니 지껄였던 일이 무색할 정도로 경악하며 물러났다.
“그럴 리가 없…… 아, 아니…… 하지만 이 살기는 정녕…….”
“뭐가 두렵지? 네놈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만?”
“허…… 허억……!”
놈은 숨을 몰아쉬며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허상이 아니다. 기사단장의 직위는 그것까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 같은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리석음은 언제나 뒤늦은 깨달음을 선택하게 된다.
“커억……!”
어느새 녀석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물러서기만을 반복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작이 빠져나간 지금 상황을 대체할 귀족들도. 병력을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할 기사들도. 모조리 도망간 뒤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오직 자신과 1왕자 둘 뿐.
“사, 살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기만 다를 뿐 모조리 곁으로 보내 줄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슈우욱-!
녀석이 그 의미를 곱씹는 동안, 핏빛의 기운을 머금은 내 검은 허공 위로 새겨졌다.
허공마저 찢어발기고 상처입히며, 그곳에 닿은 모든 것들을 지워 냈다.
“……아.”
서걱-!
더는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도 없었다.
죽음.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모두 등진 이에게 선사하는 마지막 판결이었다.
“먼저 간 이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도록.”
스릉-
나는 시체가 된 기사단장을 내려다보며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맹수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설 뿐이었다.
공포에 질린 채로 자리를 도망치기에 급급한 사냥감에게로.
‘부디 멀리 도망가 주었으면 좋겠군.’
희망과 절망이 뒤바뀌는 시간.
그 영겁 같은 간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 *
푸슈슈슉!
“커억!”
“큭!”
“물러서지 말고 사다리를 올라라! 성벽만 장악하면 놈들이 숫자의 우위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와아아아!”
“궁수들을 견제해! 사다리를 오르는 병사들을 쏘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전장의 최전방.
막고 막히는 두 진영은 아직까지도 아비규환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기사들은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면서도 무언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것이지?’
아까 신호탄이 오르고 성문이 열리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그러나 이후의 움직임은 굼떴고 종국에는 지휘부에서 어떠한 지시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작게는 병력의 이동부터 크게는 전장 내부의 상황을 조율하기까지. 가장 먼저 나섰어야 할 지휘부가 말 그대로 증발한 듯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쪽의 상황은 계속해서 나아지고 있었다.
“마탑에서의 지원이 도착했다!”
“방어계열의 아티팩트다! 어서 병사들에게 전달해!”
마법사들의 지원은 물론이고 병사 개개인의 안전을 책임질 아티팩트까지.
가뜩이나 성벽이라는 전략적 환경으로 이쪽에 부담이 걸린 상황이었는데, 지금 그 이상으로 막강한 이점이 추가되었다.
당연히 그게 끝은 아니었다.
“다친 병사들을 이송하라!”
“중상자는 즉각적으로 이송하고 치료를 받게 하라!”
수도에 남아 있던 신성제국의 치료 사제들이 배치되었다.
그것은 앞선 마법사들의 증원보다도 더욱 큰 의미를 지녔다. 처치할 수 없기에 죽어 가야만 했던 부상자들이 멀쩡히 나은 채로 다시금 힘을 보태고 있었다.
심지어 사기까지 올려 준다.
“좋아! 막을 수 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렇게 수성 측에는 하늘이 돕는 것처럼 호재만이.
반대로 공성 측에는 숨길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체 지원은 언제쯤 오는 거지?’
* * *
성벽의 인원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소모되고 있을 때, 공작은 움직임을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었지만.
“……제기랄!”
꾸욱-
삐걱대는 마차의 창문틀을 부여잡은 공작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방심했다. 아니,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대체 뭐냐, 뭐냔 말이다!’
그런 위력의 대마법이라고? 게다가 소드마스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실질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당연히 그것들은 치밀했던 반란군의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또한 계획에 없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패배를 뜻했다. 애초에 그런 일들을 상상할 수 있었더라면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리라.
“대체 어떻게 놈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단 말이냐!”
쾅!
창문틀을 내리찍은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이미 반쯤 망가진 그것으로부터 가시가 틀어박혔으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이를 어쩌지…….’
이윽고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모습에서 공작의 불안감이 엿보이는 듯했다. 만약 이 일련의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그마저도 확실치 않았다. 전장을 휘젓는 소드마스터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위협적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일개 공작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 돌격하는 소드마스터로부터 지휘부를 지킬 전력이 이쪽에 없는 이상. 패배는 기정사실과도 같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연방 제국과 손을 잡…….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덜컥!!
“무, 무슨…… 커헉!”
쿵! 콰당탕!
달리던 마차가 기우뚱하더니, 이윽고 무너지듯 옆으로 엎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작의 머리가 벽면으로 강하게 부딪혔다.
퍽!
“끄윽……!”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공작은 문을 향해 몸을 기어갔다. 지금은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무려 공작가의 마차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초월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든지…….
“아쉽게도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군.”
“……1왕자.”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채로 기어 나오는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물겨운 모습이 우스워 입술 가득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있으니 정말로 뱀처럼 보이는군.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네놈!”
“이왕이면 조금 더 열심히 기어 보는 게 어떤지?”
꽈악!
“끄으윽!”
“…….”
등 뒤로 몰래 다가온 마부의 목을 쳐다보지도 않고 사로잡았다.
그와 동시에 윌리엄 공작의 입이 다물어지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숨겨 두고 있던 수였나? 대충 경지를 보니 숨겨 놓은 기사였나 본데…….”
“…….”
“그렇다면 참으로 아쉽게 되었군.”
푹!
“끄…… 끄윽…….”
마부의 몸으로 청록색의 칼날이 비집고 들어갔다.
심장을 꿰뚫리자 이내, 약간의 몸부림을 치던 움직임조차 멎었다.
제법 상위의 기사였는지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만…… 일격에 죽어 버리는 것은 결국 일개 병사와 다를 바가 없으리라.
털썩-
나는 손에 들린 것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어깨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납작 엎드린 녀석과 시선을 맞추었다.
“반란을 일으켰을 때만 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했겠지. 실제로 수 배 이상의 병력이니만큼 주변 영지의 지원이 오기 전에 왕성을 장악할 수 있었을 터다.”
“…….”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내 질문에 공작의 얼굴은 더 없을 정도의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유를 덧붙이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오히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딱 짚어서 판단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간단하다. 운이 나쁘게도 네 상대가 나였을 뿐이지.”
그래.
녀석과 내가 이루어 둔 것들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이 이 무대를 위해 어떻게 이용되었느냐가, 수많은 이점을 손에 쥐고도 패배한 놈과 나의 차이였다.
하물며 회귀 전에서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패배자라면 나를 이길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웃기지 마라!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 성문을 장악당했다면 일만의 군세를 막아 낼 수 없었을 터다! 그 머저리 같은 아놀드만 아니었다면……!”
으드득-
이 상황에서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갈며 분노를 태우는 것밖에 없었다.
패배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아닌, 마지막까지 와서도 이 실패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은 것이다.
그래,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시끄럽군.”
스윽-
“커억…… 머, 머슨 지슬…….”
놈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간 손.
이내 장난감을 찾듯 녀석의 아래턱을 천천히 주무르다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열댓 개의 이빨이 뭉텅이로 부러져 나왔다.
뿌드드득!
“끄어어어어!”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를 도와줄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단 한 명도.
어쩐지 그 모습이 지금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끄…… 끄어어…….”
“아까보다는 조용해진 것 같군.”
나는 핏물이 잔뜩 묻어 나온 손을 녀석의 옷에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윌리엄 공작. 그 신변이 내게로 들어왔으니,
“그 뱀 같은 목숨은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으니, 이곳에서 죽이지는 않으마.”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몸뚱어리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 * *
“저, 저길 봐!”
혼란스러웠던 전장이 고요하게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 고함과 비명이 오가던 그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침묵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내가 있었고, 보다 정확히는 그 손에 붙잡혀 오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윌리엄 공작.
“마, 맙소사……!”
쨍그랑-!
손아귀에 힘이 빠졌는지.
한참 명령을 내리던 한 공작가의 기사는 검을 놓치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일국의 왕자가 적진에서 상대 진영의 수장을 사로잡았다.
그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명명백백했다.
패배.
반란군의 지주가 되어 줘야 할 기둥이 바닥부터 무너져 내린 것이다.
“흠.”
“끄윽……!”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모두가 볼 수 있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오러를 끌어올리며 눈을 번뜩였다.
“반란군은 들어라!”
쿠구구궁!
“으아악!”
마치 천둥이 머릿속으로 내리치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에.
전장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자세를 낮추며 벌벌 떨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너희들의 수장은 사로잡혔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 이런……!”
신화 속 형벌의 신을 눈앞에 두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병사들이 동요하지 말도록 해야 하는 것.
그것이 병력을 맡은 기사와 귀족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검을 내던진 것은 기사들이었다.
쨍그랑-!
“투, 투항하겠습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싸움.
싸움을 이어봤자 남은 것은 개죽음일 뿐이었다.
그것은 1왕자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몰랐음에도 철저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무력하게 딸려 오는 공작과 은연중 풍기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러자 여기저기서 무기를 내던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쨍그랑!
철그럭!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는 그저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공포는 전염되는 것처럼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고, 모든 병사들이 병장기를 내던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납작 엎드린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그사이에 숨어서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 귀족들.
전장은 더 없을 정도로 고요했고, 또한 정적이었다.
“……끝이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윌리엄 공작이 품어 왔던 그 야망이, 마침내 완전히 제압당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