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1화
책봉식 (3)
“이건 또 뭐야.”
조지가 왈칵 얼굴을 구겼다.
오늘 아침 그에게 전달된 한 장의 황금빛 서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어디 가짜 서신 따위가 그의 눈을 피해 갈 수나 있을까?
-귀공의 작위 수여 역시 책봉식 이후 진행될 예정입니다.
-미리 대비하여 수여식에 차질이 없게 하십시오.
아무리 봐도 그 황금빛 서신은 진짜가 맞았다.
남작에게 전해 주었어야 했을 서신과 같은 종류의 것.
즉, 예고장이었다.
조지가 황당함에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던 그때, 국왕의 수하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조지 헤그메스는 무릎을 꿇고 지엄하신 국왕 전하의 명을 받으십시오.”
“……이런.”
황금빛 양피지를 들고 거침없이 들어오는 사신들.
조지는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조지의 눈빛은 이 일을 꾸몄을 남자를 향해 일그러져 있었다.
‘이 양반이 진짜…….’
1왕자.
이런 일을 꾸밀 사람은 1왕자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으니 그 의도 역시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조지는 쓴 눈물을 애써 삼키며 왕실의 명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강제였다.
* * *
수도의 정상화가 완료된 것은 책봉식을 나흘가량 앞둔 무렵이었다.
드디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던 수도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단순하게 평상시의 모습이라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정리가 끝난 그 모습은 한눈에 봐도 과거와는 차이가 있었으니까.
“맙소사!”
성벽에서부터 수도까지 길게 이어졌던 출입 제한 구역.
거기에는 어느덧 완벽하게 포장된 길목과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구식이었던 바닥은 더 이상의 유지보수가 필요 없을 만큼 튼튼한 벽돌이 깔려 있었고, 성 밖에는 통행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뿐만이랴?
더욱 넓어진 도로를 따라 설치된 무수한 아티팩트들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 즈음이 되면 자동으로 주변을 밝혀 주었고, 그에 맞추어 경비대의 초소들이 우뚝 솟았다.
말 그대로 보수를 명목으로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듣자 하니 도로가 인근 영지들까지 뻗어 나가 있다고 하더군!”
“아예 전국 곳곳에 도로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하던데?!”
“이전보다도 물자의 유동이 안정되겠어.”
도로의 설치는 상업 부흥의 시초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에스테반이 그다지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뜸 핏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도로가 잔뜩 깔렸다.
그것도 치안까지 강화하겠다며 경비 초소를 늘리기까지 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현 왕실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허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1왕자께서 노력해 주신 덕분이지.”
“1왕자…… 하지만 그분께서는 잔혹한데 아둔하기까지 하다고…….”
“예끼! 그것은 반란군의 선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그 작자들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일세!”
“그, 그랬는가?”
“생각해 보게, 1왕자께서 없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드워프를 구출함과 동시에 미스릴을 발견했다.
그런 미스릴을 신성제국에 판매하는 것으로 막대한 차익을 벌어들이고 있었으며, 더욱 저렴해진 무역 원가로 이전보다 생필품의 가격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연방제국에서 사들이던 원자재의 국산화 덕에 이제는 평민들이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화 되기도 했고…….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거늘, 최근에는 거기에 이어서 막대한 양의 금화를 수주해 왔다.
당연히 왕실의 예산이 남아돌게 되었으니 세율도 점차 떨어지는 추세가 되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그것만큼이나 와닿는 것이 있을까?
소식의 전달이 느린 평민들에게는 윌리엄 공작이 남긴 선동이 남아는 있었으나, 안락함은 그 모든 것을 상회하고도 남는다.
이제 그런 것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 그 작자들은 자기네들 배만 불릴 줄 알지, 퍽퍽한 서민들의 삶을 신경 쓰기나 했겠는가?”
“확실히……!”
이제는 아예 왕실에 대한 신뢰도가 맹신에 가까운 수준이 될 정도!
“명심하게. 삶이 윤택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그분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네.”
“오오! 과연!”
“아마 왕세자가 되신다면 우리들의 삶도 지금보다 나아질 걸세.”
그런 사람이 왕세자가 되려 한다.
그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희망을 심어 주는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여론은 당연히 내 귀에도 빠르게 들려왔다.
“성군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뭐라고 생각하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이내 대답은 들려왔다.
“올바른 결단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대답하겠습니다.”
……제2 기사단장, 에드워드였다.
나는 이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검을 회수했다.
그러자 심장을 꿰뚫린 몸뚱어리가 처연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틀렸다.”
“…….”
2왕자파 귀족의 시체들을 바라보는 눈은 한없이 차갑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누구보다도 잔혹하게 번뜩인다.
카펫을 물들인 검붉은 피는 망토 자락을 타고 바지춤을 적셨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성군이란 절대적인 권력과 힘의 아래에서 나온다.”
제아무리 올바른 결단력이 있더라도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먹잇감이 될 뿐이라고.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성군이란 결국 제멋대로인 폭군과도 다를 바가 없다고.
성군이란 시체의 위로 세워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마침내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나를 노리는 승냥이들에게는 폭군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백성들에게는 성군의 모습을.
고혈을 쥐어 내기를 일삼는 귀족들의 몸에서 흐른 피는 곧 백성들의 희망이 되어 줄 것이다.
또한 절대적인 권력을 위한 지지기반이 될 테지.
“슬슬 때가 왔군.”
책봉식이 다가왔다.
* * *
드넓게 펼쳐진 백색의 기둥들.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듯 하늘로 치솟은 유리의 천장은 뭇 지켜보는 이들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안겨 줄 뿐이다.
그렇게 대리석과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이곳.
바로 책봉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에스테반의 작은 태양! 알렌 에스테반 1왕자께서 단상 위에 오르고 계십니다!”
둥! 둥! 둥!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맞춰 귀족들의 심장이 뛰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귀족들의 심장마저 제어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에 맞춰 내디뎌지는 1왕자의 발걸음엔 이미 제왕의 위엄이 담긴 기세가 느껴졌다.
이제 그 누가 남자의 위치를 부정하겠는가?
에스테반은 더 이상 주변국의 눈치만 볼 뿐인 약소국이 아니었다.
또한 이제는 기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나날로 늘어가는 강대한 무구와 북부에서 길러지는 전력은 그 기상을 견고히 할 것이며, 나아가서 마침내 대륙에 이름을 떨치게 되리라.
누구도 가지지 못한 고유의 힘과 함께 우뚝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오로지 이 남자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 에스테반.’
어느덧 두려움에 질려 있던 귀족들의 눈에 확신이 머물렀고 이내 남자가 단상 위로 올랐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 국왕의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햇빛이 왕관과 찬란한 은빛 머리칼을 동시에 비추었다.
“뭇 기사들의 이정표이자 에스테반 왕국을 이끄시는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1왕자는 고개를 들라.”
국왕의 허가가 떨어지자 1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스릉-
국왕의 허리춤으로부터 고귀한 보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번영을 상징하는 첫 번째 국보.
에스텔라였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이 떨어졌다.
“1왕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고 항상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에스텔라가 1왕자의 왼쪽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1왕자는 에스테반을 위해 헌신하겠음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마치 온몸에 그 결의를 각인하고 다잡듯이.
이번에는 에스텔라가 오른쪽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1왕자는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겠음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스텔라는 1왕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국왕의 머리 위에서 빛을 내는 왕관처럼.
그 색채가 대비되며 온 귀족들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결의에 찬 눈빛이 교환했고, 국왕은 에스테반의 다음 행보를 천명하듯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들어라!”
“……!”
쿠궁!
귀족들은 북소리보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목소리에 전율했다.
이어지는 목소리를 한 글자라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정신을 다잡았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국왕이 다시금 외쳤다.
“심장은 백성들을 위해! 검을 쥘 팔은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머리는 그 전부를 태워 이 땅에 헌신하리라.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그 모두를 잃을 각오로 임한다.
그것이 에스테반의 차기 지도자가 갖춰야 할 도리였다.
“지금 이 순간! 알렌 에스테반은 짐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되었음을 만인의 앞에서 선포하겠다!”
“충!”
척-!
도열한 기사들이 다음 대의 왕이 될 자를 향해 일제히 몸을 바로잡았다.
두 손으로는 검을 받쳐 들고, 그 위엄을 향해 하늘로 날을 치켜올린다.
비로소 그들이 충성을 바칠 차대의 왕위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순간이었다.
“…….”
무수하게 쏟아지는 찬사와 박수. 그리고 북소리…….
그제야 나는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는 에스텔라의 무게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을 돌려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비도르 남작. 그리고 그 옆에서 비뚠 자세로 박수를 치고 있는 조지.
그 외에도 확고한 신뢰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신하들.
아마도 나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또한, 짐은 마지막 일 개월의 임기를 끝으로 왕위에서 내려와, 왕세자에게 자리를 선양할 것을 공표한다!”
“……!”
“그, 그게 무슨……!”
청천벽력. 혹은 머릿속으로 짓쳐 드는 충격.
정녕 지금 들은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예상치 못한 국왕의 외침에 귀족들은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고, 장내를 휘어잡던 박수갈채는 충격으로 인해 멎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나는 눈매를 좁힌 채로 고개를 들어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님의 결연한 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
“이제 에스테반의 검은 네 것이다. 알렌 에스테반.”
스윽-
에스텔라가 내 손아귀에 쥐어진다.
회귀 전, 그토록 찾아 헤매며 감추어졌던 그 검이.
내 손으로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