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3화
펜던트 (2)
기사의 나라 에스테반.
초대에 그 나라를 건설했던 것은, 기사왕이라 불리던 한 남자였다.
‘리하르트 에스테반.’
만연하던 전쟁의 혼란을 정리하고 북부 대륙을 안정시켰던 위인.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초인의 경지마저 뛰어넘었다고 알려진 절대자.
하나 으레 드워프의 전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에 와서 오랜 건국 전설을 믿는 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전설을 그대로 믿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 분명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허구일걸세.
-혼돈의 시대 이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기록조차 얼마 남지 않았으니 꾸며 내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겠지.
오히려 그것을 떠드는 음유시인에게 과장된 것이라며 핀잔을 주는 사람만이 늘어났고, 이제는 전설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왕족들 역시 마찬가지.
-일격에 바다를 가르고 십만의 병력을 베어 냈다고?
-정말로 그만한 힘을 가졌다면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누구보다 깊은 연관을 가진 왕족들조차 전설을 믿지 않은 지 오래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이들만은 전설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서고 사이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지하 공간.
그 속에 한낱 과장이라 치부했던 건국왕이 남긴 편린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저벅-
“…….”
드러난 통로의 끝.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앞으로 솟아 있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8미터 남짓의 탑.
마치 수정처럼 찬란하게 조각된 이것을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으레 기념비란 누군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만, 이것은 명백한 ‘경고’를 띠고 있었다.
[세상은 혼돈으로 휩싸이고 있다.]
[군주를 자처하는 숱한 필부들이 쓰러져 갔고, 그보다 많은 수의 광대가 생겨났으니.]
[만연한 혼란을 잠재우는 것은 오직 절대자의 무력뿐이리라.]
[그러니 기사의 왕을 자처하는 자, 필히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하나의 이름.
-리하르트 에스테반.
그것은, 건국왕이 남긴 과제이자 시련이었다.
나는 점차 저릿해지는 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슬슬 왕가의 피가 반응하기 시작하는군.”
오직 국왕의 이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이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감각.
이 나라가 기사의 왕국, 기사왕의 나라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
건국왕이 요구하는 것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힘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증명하면 될 뿐이다.
“그때는 아쉽게도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오벨리스크 위에 손을 뻗으며 차갑게 눈을 번뜩였다.
그 끝에 남아 있을 건국왕 리하르트의 유산.
회귀 전과는 달리, 그것을 손에 넣을 마지막 열쇠는 이미 준비되었으니…….
“때가 되었으니 나를 즐겁게 해 보아라.”
이윽고,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시야가 반전했다.
대마법의 산물, 공간이동이었다.
* * *
한편 국왕은 수행원의 보고에 눈매를 좁혔다.
“지금 무어라고 했지?”
“왕세자 전하께서 서고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렇군.”
오직 국왕에게만 허가된 금역.
그곳에 허가받지 않은 왕족이 출입했다는 보고는 짐짓 심각한 사안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국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굳이 제지하지 말고 놔두어도 좋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직 이른 시기이지만 자격은 충분하다.”
암묵적인 허가.
어차피 알렌 에스테반은 이미 국왕이 인정한 사람이었다.
한 달 후에 출입하나 지금 출입하나 변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예,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이해한 수행원은 고개를 조아리며 떠나갔다.
하지만 정작 국왕의 본심은 따로 있었다.
‘어차피 그 안에 숨어 있는 비밀공간을 알아챌 수는 없으니까.’
건국왕에 관련된 이야기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격을 시험받는 과정 역시 선왕인 자신이 지켜봐야 하는 과제였고.
고리타분한 규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발동된 오밸리스크의 마법은 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다시금 발동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지.’
무려 절대자라 불렸던 건국왕의 유산.
이를 얻기 위해 자격도 없는 왕족이 드나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문득, 국왕의 눈이 흐뭇하게 미소 지어졌다.
‘……하지만 녀석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
지금까지 숱한 왕들이 시도해도 얻지 못했던 그것. 자신 역시 끝내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하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녀석은 스물한 살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초인이다. 그 재능만큼은 건국왕에 뒤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언젠가.
정녕 기사들의 왕이라는 이름을 증명하는 이가 탄생한다면. 아마도 그건 자신의 아들인 알렌 에스테반이 유일하리라.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싶구나.’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의 그 언젠가.
그렇게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
쿠당탕!
의자가 힘없이 쓰러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국왕은 몸속으로 끓어오르는 피를 느끼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느끼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이, 이건……!”
왕궁 지하에 잠든 오벨리스크가 발동되는 전조.
심지어 거리가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느껴지다니…… 여태 겪지 못한 규모였다.
그가 직접 시험을 겪었을 때조차도!
그 과거의 산물이 지금 이 순간 왕가의 피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국왕의 표정은 더 없을 정도로 굳어지고 있었다.
‘대체 거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알렌 에스테반……!
* * *
안개 같이 펼쳐진 어둠 속을 지나, 나는 끝없는 심연으로 발길을 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
자칫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가는 영원히 이 세계에 붙잡힐 것만 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을 더 거닐었을 때 사방이 환해지며 주변으로 사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닥. 벽. 관중석에 앉은 수많은 사람. 그리고 태양까지.
이윽고 나타난 광경은 하나의 투기장이었다.
‘역시 회귀 전과 다르지 않나.’
나는 주변을 짧게 살핀 뒤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은 마탑에 방어 마법을 새겼던 그 대마법사가 만든 공간이었다.
기사왕의 후예를 위해 제작된 하나의 차원. 진정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시련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시련의 내용 역시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지.’
여유로운 시선은 여전히 주변을 훑었다.
츠즈즈즈-
-……새로이 자격을 논하러 온 기사인가.
그리고 내 맞은편에는 하나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의 갑옷을 입은 그것은 얼핏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초인의 감각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영혼.
저것은 이 오벨리스크 속 공간에 붙들린 망령이었다.
철컥-
기사의 손에서 한 자루의 검이 치켜올려 졌다.
2미터에 달하는 묵빛의 대검이다.
-이 공간에 발길을 들였다는 말은, 너 또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겠지.
“핏줄, 인가.”
-그러하다.
갑옷 속에 감추어진 표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권태롭기 그지없었다.
수없이 많았던 도전자들. 이 무한한 굴레 속에서 지내 온 수백 년의 세월.
이미 시련의 기사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세 번째 기사. 그 이름을 이을 자에게 시련을…….
“말이 많군.”
-뭐라?
그런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몸을 경직시킨 채로 나를 노려보는 기사를 향해 조소를 지었다.
“고작 죽은 영혼 주제에 인간의 감정을 표방하는 것이 하찮다는 소리다.”
저것은 오벨리스크의 마법이 만든 환영.
그런 주제에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 가소로울 뿐이다.
마치 흑마법사들의 은신처에서 아수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던 마력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듣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거든.”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은 오랜만이군.
드러난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핏줄을 이어받은 것만으로도 건방을 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자격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분의 핏줄이 아닌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다름없다.
척-!
한 손으로 들린 기사의 대검이 정면으로 겨누어졌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설명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다니 간단하게 말해 주겠다. 네놈이 그분께서 안배하신 네 가지의 시련을 모두 완수한다면, 능히 기사왕의 이름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남기신 힘의 편린을 얻을 수 있겠지.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첫 번째 시련은 그분의 세 번째 기사인 나를 이기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불친절한 방문자에게 하는 설명으로는 이미 충분한 수준이었으니.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네놈이 첫 번째 시련조차 통과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팟!
슈우우욱!
기사는 나태했던 태도와 다르게 재빠른 움직임으로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대검이 휘둘러지며 반달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그 무거운 대검을 휘두른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다.
-한 번 막아 보아라, 건방진 인간!
“…….”
나는 입꼬리를 비트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청록색의 검, 엘베른은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대검을 향해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본 기사는 더욱 빠르게 짓쳐 들며 비웃음을 남겼다.
-그런 얇은 검 따위로 내 일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검날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부수겠다는 듯 다가오는 투지.
그러나 압도적인 크기 차이의 두 검이 맞부딪치며 낳은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챙!
-흡?!
휘둘러지다시피 했던 대검이 튕겨 올라가며 빈틈이 드러났다. 갑옷 속 기사는 당혹감에 물든 채였다.
-이 검격을 오러도 없이 막아 냈다고?!
하물며 대검을 막아 낸 청록색의 날은 상처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반발력으로 물러났어야 정상일 몸은 단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막아 낸 것이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때였다.
-……!
아직 회수되지 않고 있는 엘베른을 바라본 기사의 기세가 변했다.
당혹감이 아닌 철저히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이었다.
-걸렸구나!
촤륵!
대검의 날이 꿈틀거리며, 그 속에서 오십 센티 남짓한 단도가 분리되어 나왔다.
기사는 그것을 반대 손으로 잡아채며 재빠르게 팔을 뻗었다.
슉!
아까보다도 월등히 빠른 속도.
힘을 대부분 감추고 있었을까? 아니, 처음부터 노리던 것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방심하다니! 그딴 판단력으로 시련에 도전하기에는 10년은 이르…… 뭐, 뭣이?!
팟!
하지만 녀석은 이내 경악한 몸짓으로 물러섰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것인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밖에 남지 않은 영혼이 위험을 감지하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바, 방금은 무슨 수를 쓴 것이냐!
그렇게 기사는 물러난 뒤에도 금방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영혼이 두려움을 느끼는 현상 자체를 처음 겪어 보았을 테니까.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아깝군.”
나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그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빠르게 죽일 수 있었는데 말이지.”
-……건방진!
물러섰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납득하지 못한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
-감히 나를 물러서게 하다니!
그렇게 기사는 애써 감정을 떨쳐 내며 다시금 달려들려 했다.
우우웅!
-……!
그 순간 몸을 부들부들 떨던 기사의 기세가 다시금 급변하기 시작했다.
방금보다 더 날카롭고 빠르게.
그 현상은 정작 본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다.
-시, 시련의 난이도를 강제로 바꾸다니…….
자신이 기사왕임을 증명하는 시험.
이 시련이 단순히 무력의 수준만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한 번 겪어 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판단력. 혹은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종합적으로 확인하며, 기사들의 왕을 자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면?
당연히 대련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니 시련이 성립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것은 건국왕과 대마법사가 안배해 둔 최후의 보루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시련이 상대방의 강함을 예측하고, 그에 맞추어 힘을 재배치하는 것.
물론 그것은 수없이 많은 시련을 내렸던 기사조차도 처음 겪은 것이지만.
-겉보기와는 다르게 애송이는 아니었구나.
기사가 내뿜는 기세는 점점 강해지더니 조금씩 공간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이를 자각한 기사 역시 방금과는 다르게 신중한 태도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개방과 동시에 반전된 능력에 나의 진정한 경지를 가늠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윽-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신이 그 목으로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이것만큼은 회귀 전과 다르군.”
-어떻게……!
서걱!
-커억!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에 목이 베여 버린 기사가 바닥으로 쓰러졌고, 나는 여유롭게 검을 회수하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딱히 상황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이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첫 번째 시련부터 난이도를 조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