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4화
펜던트 (3)
비정상적으로 강한 상대를 시험하기 위한 장치.
회귀 전에는 두 번째 시련에 다다르고서야 이상함을 감지했던가?
그 역시도 놈들이 보기에 경악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에서 바로 발동했다.
그리고 고작 일 검을 나누었을 뿐.
그럼에도 오벨리스크의 마법은 내 위험성을 인지하고 시련을 조정하기에 나섰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대로는 도무지 맞붙을 도리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재미있군.”
그러나 그것마저도 나의 자질을 온전히 감당해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털썩-!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무너지는 영혼의 편린.
찢긴 기사의 몸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경악으로 떨고 있었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武)를 이루는 것은 비단 본신의 검술뿐만이 아니다.
상황을 괄목하는 판단력과 재치. 상대방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눈썰미와 침착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경험이 뒷받침해 주어야, 비로소 진정한 실력이 완성된다.
검을 휘두르는 것 하나에도 수많은 묘리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에게서는 그 어떤 것조차 엿보지 못했다.
단지 검을 휘둘렀고, 자신은 쓰러졌다.
……그뿐이었다.
그것이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련의 규율 속에서 본래보다 강해진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묘리를 드러내야 정상이거늘, 이를 비웃듯 상대는 검술만으로 자신을 쓰러뜨렸다.
차라리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오러로 짓이겨졌다면.
오러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실력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그 정도가 아니라면 애초에 시련이 조정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의 상황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현실 도피에 가까웠다.
-네, 네놈은 대체……!
압도.
너무도 압도적이었기에, 감히 그 경지를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기사의 상식과 자긍심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툭-!
힘없이 쓰러진 육신.
기사의 투구가 벗겨지며 그 속에 감추어진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마침내 드러난 눈은,
-대체 어째서 네놈에게 그분과 같은 기세가 느껴지는 것이냐……!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는 몸에 더 이상의 판단력이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다.
츠즈즈즈-
“마지막까지 시끄럽군.”
나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는 기사의 육신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고는 투기장의 한 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호오?”
본래 시련이란 놈의 설명대로 여러 번에 걸친 시험이었다.
자신을 세 번째 기사라고 설명했으니, 최소한의 자격을 판단할 두 번째와 첫 번째 기사도 존재한다는 소리.
당연히 회귀한 내게는 놈들의 시련을 이겨 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뭘까?
“이건 정말로 의외인데.”
츠즈즈즈-
내 앞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시련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둘 모두.
첫 번째 기사와 두 번째 기사가 함께 투지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짐작할 필요조차 없을 테지.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둘을 동시에 불러냈다고?
시련의 재조정.
겪은 적 없는 결과에 오벨리스크의 마법이 또다시 변화한 것이다.
말 그대로 초유의 사태였다.
척-!
스윽-
마법으로 극한까지 강화된.
그럼에도 둘이 함께 소환된 그 모습은 명백히 회귀 전과는 달랐다.
두 기사 역시 무기를 겨누며 차분하게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강자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향이 없군. 그런데도 이 정도의 힘을 부여받다니……
그 자신들에게 느껴지는 힘은 소드마스터에 이를 정도.
오벨리스크의 마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힘이 그 이상은 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상대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오류가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침착하게 자세를 낮추던 기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를 부정했다.
-아서라. 그분의 설계 하에 만들어진 시련에 착오가 있을 리 없다.
-……그렇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건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놈들이 지껄이는 말들은 내게도 들려왔다.
그것은 침착함을 가장한 경계였다.
마치 미지의 힘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나타나는 두려움과 같은…….
내 어깨가 으쓱여졌다.
‘뭐, 아무렴 상관없는 일인가.’
놈들의 시련은 내게 있어 단지 과정에 불과했다.
한낱 의미조차 없는 대련. 이 끝에 있을 과실을 얻기까지의 연결고리.
그러니까 이 상황은 의외였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굳이 다음 시련을 기다리기 위해 지체할 필요도 없다는 소리겠지.”
-……뭣?!
두 시련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단지 그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우우우웅!
-……!
엘베른을 태우는 핏빛의 오러.
반응할 새도 없이 칼날 위로 넘실대기 시작한 그것은, 이윽고 채찍처럼 놈들을 향해 길게 뻗어 나갔다.
촤좌좌좍!
-이런!
-막아!
시선을 나누던 두 기사가 위협을 느끼고 물러섰지만, 그 또한 늦었다.
살기를 감지했다는 말은 이미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으므로.
그건, 놈들이 제아무리 공간의 힘을 빌렸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라.”
초인을 논하는 힘은 진정한 강자의 앞에서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걱-!
-커헉!
-큭!
허공에 수 놓인 붉은빛 실선은 두 기사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자 마법으로 만들어진 육신은 흩뿌려지며 허공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간단하군.”
촤륵!
나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습관적으로 털어 낸 뒤, 검집으로 회수했다.
무척이나 간결한 마무리였다.
물론 단순히 간단하다고 치부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건국왕의 근위 기사.’
놈들은 그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깝지 않은 명실상부 검술의 대가들이었다.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고 농락하듯 다가오는 칼날들.
오죽했으면 숱한 도전 속에서도 다음 시련을 목도한 왕족이 없었을까?
회귀 전에는 그 세 가지 시련을 넘어서기 위해 나조차도 진심을 다해야 했을 정도였다.
‘특히나 첫 번째 기사는 대부분의 공격을 피해 낼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지.’
그야말로 시련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실력.
그러나 난 과거의 그 애송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실전으로 담금질한 실력은 이미 격을 넘어 있었으니, 겨우 이 정도가 통할 리 만무하다.
특히나 회귀 전의 경험과 이후 얻은 힘까지 합쳐 성장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나는 무덤덤하게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슬슬 때가 왔군.”
쿠구구구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투기장의 전경이 흐릿해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련이 동시에 붕괴한 지금.
마지막 시련으로 향하기 위해 또다시 오벨리스크의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 * *
“…….”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세계가 반전하며 드러난 광경은 하나의 제전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빛나는 조명 아래 환히 밝혀져 있는 제단. 그리고 그 뒤로 웅장하게 뻗은 하나의 조각상.
천하를 괄목하는 것처럼 검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초대 건국왕인 리하르트였다.
“그렇군.”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그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각상부터 시작해서 제단 위에 적혀진 글귀까지, 이미 마지막 시련의 앞까지 당도했던 내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던 탓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스윽-
나는 제단 위를 가득 뒤덮은 먼지를 치워 냈다.
그러자 언뜻 보이던 글귀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가진 무예를 증명한 후예여, 비로소 내 앞에 서게 되었으니.]
[최후에는 직접 그 자격을 논하고 시련을 받게 하겠다.]
그것은 마지막 네 번째 시련의 단초였다.
근위 기사를 불러냈던 예의 시련들과 다르게 그 자신이 직접 시련을 내리겠다는 전언.
그 외에는 아무런 실마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기다려도 본인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회귀 전에는 도무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었지.”
그렇게 마지막 한 발자국을 뒤로하고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던가?
퍼즐의 한 조각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씁쓸하게 돌아섰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하지만 그런 내게 예상치도 못했던 수확이 쥐어졌다.
“알베도.”
나는 어느덧 손에 들린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녀석에게서 받은 펜던트.
그런 내 눈이 천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손에 쥔 순간 깨달을 수 있었지.”
펜던트를 만진 순간부터 들끓기 시작했던 왕가의 피.
마치 영혼까지 유혹하는 듯한 강한 울림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것이 회귀를 거치며 남아 있던 본능이 속삭이는 소리라는 사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왕가의 피로 하여금 무언가를 소환하는 아티팩트.
바로, 이 펜던트가 마지막 관문의 시작을 알릴 열쇠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나는 예정보다 빠르게 이곳으로 방문했다.
“그는 초인의 경지조차 넘어섰다 했던가?”
그 힘이 담긴 유산이 이곳에 있다.
기껏 방법이 생겼으니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건국왕이 남긴 힘은 오롯이 제국을 짓밟는 도화선이 되어 줄 것이리라.
당연히 시련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펜던트를 쥔 손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얇게 새겨진 상처.
“먹어라.”
그리고 확신이 가는 대로 그곳에 핏물을 흘려보내자.
우우우우웅!
아티팩트에 내장된 마법이 발동하며 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맞춰서 앞서 기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공으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영혼과 비슷한 것. 혹은 그 자체군.’
일렁이는 형체는 도깨비불처럼 줄어들었다가 다시금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언뜻 보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스펙터와도 닮았다.
그러나 본 즉시 알았다.
저 속에 건국왕 리하르트의 자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팟-!
그렇게 빛무리가 사라지고 소환이 완료되자 비로소 형체는 망각하고 있던 자아를 깨어 냈다.
[……어린 후손이 찾아왔군.]
마치 머릿속으로 직접적으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응시했다.
그러자 일순 흐릿한 형상에 불과할 뿐인 얼굴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미숙해 보이는 외견과는 다르게 어엿한 성숙함이 느껴지는군.]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비록 영혼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질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자질이라면.”
[이미 완성된 군주의 능력이지.]
“…….”
리하르트의 영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조금은 의외였기에 눈매를 살짝 좁혔다.
마법으로 잠시 ‘구현’될 뿐인 기사들과는 다르게, 시간 속에 봉인되어 있었음에도 그 정신을 올곧이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가히…… 초월적인 정신력이군.’
“과연 소드마스터를 넘어섰다고 치부될 만하다는 건가.”
[소드마스터, 생소한 단어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꺼낸 말은 현 상황을 묻는 것이었다.
[어린 후손, 바깥세상의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오백 년이 흘렀다. 건국의 시점으로 따지면 그 이상이 되겠지.”
[그렇군.]
말인즉, 최소 오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도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영겁 같던 세월도 고작 오백 년에 그칠 뿐이었나.]
이번에는 명백한 웃음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 웃음은 아마도 자신을 깨워 낸 후손에 대한 호기심일까?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자네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말은 후대에도 에스테반의 핏줄이 남아 있다는 말이 되겠지.]
“그래.”
[그리고 앞선 시련들을 통과했다는 뜻이 되겠고.]
그 순간 자아밖에 남지 않은 영혼으로부터 막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파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