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5화
펜던트 (4)
[그렇다면 증명해 보아라.]
흐릿한 형상의 손이 움직였다.
곧 리하르트로부터 방출되었던 기운이 그 손짓에 따라 파도치기 시작했고.
[자네가 나, 기사왕 리하르트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쿠구구궁!
마치 압박하듯 내게로 뻗어 오며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나는 다가오는 그것을 그저 묵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의지가 머릿속으로 각인했다.
그것은 단순히 기사의 역량을 시험했던 이전의 시련들과는 달랐다.
‘마지막 시험…… 그렇군.’
뻗어져 나온 기운은 그의 정신력 일부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휘감은 지금, 사실상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았고.
즉,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서로 동화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제정신을 유지하던 것조차 능력의 극히 일부였다는 건가.’
나는 몸을 감싼 기운을 느끼며 라하르트를 응시했다.
영혼.
그것도 이제는 아주 조금의 자아밖에 남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그는 그것만으로도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큼의 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이미 느꼈겠지만 자네와 내 영혼은 정신력으로 묶여 있는 상태다.]
“…….”
[서로의 상념은 물론이고 그 진의까지 공유하고 있다는 편이 옳겠군.]
그 말이 맞다고 증명하듯 마주한 형상은 아까보다 더욱 선명했고, 울리던 ‘목소리’ 역시 온전한 형태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것은 리하르트가 품은 의도 역시도 마찬가지.
그는 일전에 보였던 웃음들을 지워 내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 상태에서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자네의 자격을 인정해 주지.]
분명 그는 군주의 자격을 논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에 정면으로 응수해야만 하는 상황.
“재미있겠군.”
결국 자신의 진정한 후계는 본인의 손으로 가려내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있나 보군.]
스르륵-
그 흥미로운 대답이 이어짐과 동시에 리하르트가 발걸음을 떼어 다가왔다.
[먼저 묻겠다, 어린 후손. 자네는 무슨 목적으로 힘을 갈망하고 있지?]
뭇 무력이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이 몸을 지키고 가족을 수호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정의로운 것이고, 개인의 더러운 욕망만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른 것이다.
기사들에게 가장 처음 묻게 될 정도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었다.
비록 위정자들에 의해 퇴색된 지 오래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저것을 묻는 의미는 간단했다.
‘……네 진의는 개인적인 욕망만을 좇고 있는 것이냐.’
말 그대로 힘을 쥐기에 합당한 인물인지를 가리는 질문이었다.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오만하게 응수했다.
“나를 업신여기던 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허.]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살의에 리하르트가 놀란 기색을 표했다.
복수는 가장 원초적인 더러움이다.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악의. 그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응축시킨 것이 바로 복수였으니까.
‘차라리 입바른 말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
적어도 그가 원한 대답과는 정반대의 의도였으리라.
그 당황한 기색을 보면 안다.
그럼에도 난 그 감정을 입에 담길 망설이지 않았다.
복수 외에 다른 목적 따위는 처음부터 내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복수, 그것이 자네의 대답이라면 족하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리하르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착각일까?
어느덧 그 형상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힘과 권력을 가진 군주는 누구보다 위험한 존재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숱하게 쓰러져 간 국가들이 증명하는 것이고,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할 진리와도 같은 것.]
곧 한 발자국을 더 다가온 그는, 예정되었던 두 번째 질문을 남겼다.
[자네는 그것을 누구보다 현명하고 자애롭게 쓰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때였다.
“…….”
[…….]
극히 찰나. 두 시선이 마주하며 입술이 멈추었다.
시험에 드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나를 응시했다.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게 고개를 끄덕이라고 종용하고 있군.’
그리하면 이 시련 또한 마무리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유산을 쟁취하고 왕을 자처하게끔 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다음 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
대답은 ‘아니’ 였다.
내 입꼬리에 머물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현명함과 자애로움을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승자이듯, 결국 결과만이 내 업적을 평가할 뿐이다.”
그래.
자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또한 내 선택은 언제나 한결같을 것이고, 거기에 자애나 현명함 따위의 하찮은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될 것이다.
오로지 나와 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 진흙탕에 발을 들이기를 망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결과 역시 한결같으리라.
“백성들은 나를 칭송하고 만인은 영원히 우러러볼 테지.”
그것만큼은 달라지 않는다.
그 힘이 아둔하고 잔혹하게 이용된다 한들,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군.]
마지막으로 준비된 시련은 거기서 끝이었다.
쿠구구구구궁!
“…….”
커다란 조각상이 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제단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가로막던 앞을 비켜선 리하르트는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시련의 결과를 대신했다.
[광기가 아닌 확고한 신념을 가진 군주는 실패할지언정 틀리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복수심이라는 감정일 뿐이라도.]
“나를 인정하는 건가.”
[그래.]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호기심은 이제 진정한 후계자를 대하듯 존중으로 바꿔 있었다.
[부디 그 마음가짐이 꺾이지 않기만을 바라지.]
이윽고 리하르트의 몸은 천천히 흐릿해졌다.
오랜 시간 이곳에 붙잡아 두었던 자아가 비로소 목적을 이루고 순리의 길로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 조각상이 있던 자리에는 어디론가 향하는 통로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뒤, 사라지는 리하르트의 자아에 다시금 시선을 던졌다.
“사라지는 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응당 있어야 했을 곳으로 떠날 뿐이지.]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전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그는 정말로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모든 미련을 쏟아 낸 그 모습이 후련하기까지 해 보일 정도로.
[하지만 자네의 행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조금 아쉽군.]
몸이 흩어지는 속도는 점차 빨라지며 이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주변을 감싸던 기운 역시 모조리 사라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영겁 같은 세월에서 내 숙원을 이루어 주어서 고맙다. 어린 후계자여.]
“…….”
[……아니, 무저갱 속에서 실패를 딛고 성장한 군주여.]
스륵-
그렇게 리하르트는 마침내 의미심장한 문장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영혼이 동화되었을 때 눈치챈 것이었을까.
나는 상념을 거두며 드러난 통로로 시선을 옮겼다.
그 속에는 펜던트의 크기와 딱 맞는 홈이 새겨진 문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아티팩트엔 더 이상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뚜벅- 뚜벅-
나는 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펜던트를 들어, 열쇠를 움직이듯 그것을 집어넣었다.
끼이익-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문의 너머로 타오르는 그것이 보였다.
초인을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 리하르트의 힘의 원천이었던.
[불같은 검격은 일격에 바다를 가르고 십만의 병력을 베어 내리라.]
순수한 화염의 원소.
태고의 염화(炎火)가.
* * *
우우웅!
“…….”
눈을 떠 보니, 어느덧 처음 시련으로 입장했던 서고 안 비밀의 방에 있었다.
대략 적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경악한 표정의 아버님께서 내 모습을 보며 입을 떠듬거리고 계셨으니까.
“아버님.”
“너, 너…… 대체 무엇을…….”
어찌나 급히 달려오셨는지 옷매무새가 꽤 흐트러져 있으셨다.
손에는 아예 놓고 오는 것도 깜빡하셨는지 만년필 하나가 쥐여 있다.
하지만 이토록 놀라시는 것은 어째서일까?
‘음?’
그때, 문득 아버님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련으로 인도하는 오벨리스크가 있는 위치였다. 정확히는 ‘있었던’ 위치였지만…….
‘……없군.’
눈썹이 꿈틀거렸다.
건국왕의 숙원을 맺은 오벨리스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텅 빈 공간만이 남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의외라고 해야 할지…….
이 정도라면 즉각 눈치채도 달려오신 것도 경악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왕족의 피가 반응했던 건가.’
당연히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만큼 나 역시도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들킬 거라는 사실은 상정하지 않았으니까.
‘쯧, 곤란하군.’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생각해 두었던 핑계를 지껄였다.
“오, 오벨리스크는 대체 어디에…… 그보다 네가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온 게냐?!”
“알베도가 가지고 있던 펜던트가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더군요.”
“펜던트?”
“예, 그렇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펜던트를 건네 드렸다.
이제는 그 역할을 다하고 ‘펜던트’로의 기능만이 남은 골동품이었다.
“이건…….”
“그것이 이곳에 있던 시련의 마지막 열쇠였습니다.”
“시련!”
아버님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 이름에 번뜩 정신을 차리셨다.
건국왕의 유산이 남은 오벨리스크.
그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직접 확인하셨을 테니까.
“마지막 열쇠라면…… 설마 네가 시련의 마지막에 도전한 것이냐?”
“예, 아버님.”
“그, 그렇다면 오벨리스크가 사라진 것은…….”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지요. 제가 모든 시련을 넘어섰으니까요.”
“……!”
떡 벌어진 아버님의 입이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놀란 탓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오른팔의 소매를 살짝 걷으며 그곳에 드러난 마법각인의 문신을 드러내 보였다.
이제는 옅은 붉은색으로 물든 그 각인을.
“건국왕이 남긴 유산은 화염을 다루는 방법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화염과 같은 파괴력을 오러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이었지요.”
“그, 그건…….”
“흡수한 건국왕의 힘입니다. 아마 전설 속의 구절들은 이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겁니다.”
혼돈의 시대 이전에 살았던 리하르트에게는 마법각인이라는 아티팩트가 익숙했을 터다.
그리고 순수한 원소를 담아내는 진정한 능력 또한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러니 그는 내가 바람의 원소를 검술에 녹여냈던 것처럼, 화염의 원소가 가진 성질을 스스로의 검에 접합시켰을 것이다.
‘그것이 초인마저 뛰어넘을 수 있었던 힘의 근간.’
즉, 다음 경지를 향한 실마리였다.
그건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내 오른팔과 오벨리스크가 있던 자리를 번갈아 쳐다보시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그렇구나. 그나저나 국왕에게만 전승되는 것을 네가 찾아냈을 줄은…….”
“어차피 때가 되면 제게 일러 주셨을 것이니 문제는 없을 터입니다.”
“그, 그렇지.”
그럼에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하고 계시는 아버님을 뒤로하고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그런 내 입술은 흡족하게 미소 짓고 있는 채였다.
‘물론 그곳에서 얻은 것은 원소의 힘뿐만이 아니었지만.’
건국왕의 자아가 남은 공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멸할 자아를 붙잡기 위해 건국왕이 한 것은, 그 공간에 흐르는 시간을 영구적으로 붙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자아가 소멸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
단지 외부보다 수만 배. 아니, 수억 배는 느리게 흐르는 그 시간 속에서라면 미치광이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영겁 같은 세월이라고 말한 리하르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곳의 시간은 오벨리스크를 제작한 대마법사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을 이용했지.’
바로, 새로이 얻은 힘을 이용할 방법을 수련한 것이다.
무한히 고정된 시간은 다른 말로 하면 의식이 가속되었다는 뜻!
비록 그곳에서 직접적으로 오러를 수련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기억 속에 경험을 새기는 것쯤은 가능하다는 소리다.
이는 회귀 전의 내 실력이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히 늘어난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때에는 검술을 연마했던가.’
이 사용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스윽-
나는 그렇게 옅은 붉은색이 더해진 마법각인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산을 예정보다 빠르게 손에 넣었으니 슬슬 움직일 시간이군.’
또다시 일신의 힘을 강화하게 된 지금.
이제는 생각했던 다음 단계로 나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