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9화
기사 (1)
초목이 찢겨 나간 그곳은 더 이상 숲이라 부를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도적들이 머물기 위해 만들어 두었던 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만 드문드문 보이는 터만이 이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홍염처럼 거침없이 휘두르며 그것을 폭사시킨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치 자연을 검술에 녹여낸 듯한 장면에 브롬은 저도 모르게 꿇린 무릎을 일으켜 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용병들조차 멍하니 경외했다.
“맙소사……!”
“이, 이게 대체…….”
저벅- 저벅-
그 폐허 속에서 왕세자의 나직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그에게서 무언가가 내던져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팅!
데구루루르-
“이건…….”
단출한 무늬의 배지 하나.
가까스로 왕세자의 검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여기저기가 망가진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나 연방제국을 상국으로 모시던 레스피엘의 후계라면 더욱.
‘이게 어째서 여기에……!’
오직 연방제국에서만 제조할 수 있는 초소형 단거리 통신기.
기술력을 숨기기 위해 일부 제후국에만 비밀스럽게 지급하는 물건이었던가?
적어도 이런 곳에서 발견될 정도로 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설마!’
그때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린 브롬의 눈으로, 팔랑거리며 흩날리는 천 조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찢긴 검은색 두건.
하지만 그에겐 잊을 수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제야 브롬은 닫아 두고 있었던 무의식의 저편을 열어, 선명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의 암살자.”
“비밀 암살부대 ‘심판’의 일원들이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왕세자의 설명이 뒤따랐다.
심판, 실로 오만한 이름이었다.
신도 아닌 인간 따위가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퍼즐 조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의문.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연방제국 황제 직속 암살부대 ‘심판’.”
“정답이다.”
“그렇다면 놈들이 나를 쫓고 있었다는 말은…….”
“현 상황에서 레스피엘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면 귀찮아질 테니까.”
“역시 그랬군!”
그리고 그 순간 브롬의 눈에 분노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모종의 이유로 모든 것을 잃었던 남자의 회한이었다.
“놈들은 처음부터 레스피엘과의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나!”
쿵!
두 주먹이 폐허가 된 땅을 짓누르며 굉음이 울렸다.
대체 누가 제 아버지를 죽이고 레스피엘을 압박하여 멸망으로 몰고 갔는가?
마음속 한편에서는 레스피엘의 재건을 부르짖으면서도, 늘 그 땅의 멸망에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의혹이 향했던 곳은 놀랍게도 레스피엘의 상국인 연방제국이었다.
공국에서 발견된 하나의 광산.
연방제국은 그것을 얻기 위해 레스피엘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협의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연방제국은 그들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하고 광산의 소유권을 얻기를 포기했다.
마치 그간의 열기가 가짜였다는 듯 갑자기 식어 버린 탓에 미처 생각지도 못했지만…….
인제 와서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체를 직접 확인하라고 그랬지, 에스테반의 왕세자여! 그대는 처음부터 연방제국이 레스피엘의 멸망을 바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이까!”
“당연한 소리를.”
부르짖는 목소리에 왕세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브롬의 눈에서 불길이 인 것은 당연했다.
“레스피엘에서 발견된 것은 고작 흑철의 광산이었다! 놈들은 고작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제후국을 무너뜨리려 했는가!”
“고작?”
순간 왕세자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놈들이 가진 정복전쟁의 야욕은 고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개 광산이라 부를 것이 아니었다.
놈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전쟁을 위한 장비를 제조할 수 있는 발판.
즉, 대륙정복의 야망을 충족시킬 물자였다.
“그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레스피엘이라는 제후국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테지.”
“그렇다면 단순히 협상에 응하면 될 일이었다!”
“어째서 그래야 하지.”
“……뭐라?!”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레스피엘의 땅을 구태여 협상으로 받아 올 필요는 없을 터인데.”
“크윽!”
왕세자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아직도 놈들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
어차피 대륙의 모든 것은 연방제국의 것이 된다. 자신들만이 유일한 패자이며, 대륙의 지배자이다.
그것이 바로 놈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조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론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놈들은 협상 따위에 응하지 않고도 손쉽게 레스피엘을 병합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으드득-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브롬의 이가 갈리며 섬뜩한 비명을 질러 댔다.
“……내게 복수할 기회를 준다 하셨소?”
“그렇다.”
“그렇다면 말씀해 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복종한다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그리고 그 복수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이에, 왕세자는 시원하게 답했다.
“간단한 이야기지.”
서걱-
바람에 흩날리던 검은 천 자락이 검날에 찢긴다.
그리고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그것을 왕세자는 자비 없이 짓밟았다.
“연방제국은 대륙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레스피엘은 다시금 부활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브롬의 주먹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진 채였다.
***
겨우 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대장의 선언에 눈을 부릅떴다.
“요, 용병단을 해체하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장!”
믿을 수 없다는 듯 브롬에게 달려든 용병들이 대답을 요구했다.
평생을 함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
하지만 그들은 오직 브롬만을 믿고 수년간을 달려온 이들이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용병단을 해체한다고 하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황한 것이다.
반대로 브롬은 칼 한 자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에스테반의 왕세자를 따르기로 했다.”
“그, 그게 무슨…….”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왕세자의 아래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면서…….”
“……미안하다.”
“허.”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죄에, 허탈한 용병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실망감보다는 절망감이 더욱 컸다.
하루아침에 자신들을 이끌던 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어찌 보면 그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를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바로 새로운 일행을 구하려 하거나 서로 제 살길을 찾기 바빴을 테니까.
그렇기에 브롬은 입술을 깨물며 부하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하지만 이런 나를 믿고 따른다면,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해 줄 수 있겠나.”
“뭐?”
“원한다면 왕세자께서 용병단 모두를 휘하의 기사로 거두겠다고 하셨다.”
“……!”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용병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용병 출신의 기사라니?
심지어 왕세자의 직속으로?
저 고고한 핏줄을 가진 사람이?
“……기사.”
“하지만 그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그들도 실력 있는 용병.
왕세자 정도 되는 인물에겐 처음이었으나, 당연히 비슷한 제의는 여러 번 받아 보았다.
그리고 이에 끌리던 이들도 꽤 있었다.
왜 아니 그럴까. 계급이 곧 힘이 되는데.
하지만 그 결말은 다 어땠는가.
‘놈들은 그냥 저렴한 가격에 쓰기 좋은 전투 기계가 필요한 거였지.’
천한 소모품 취급을 당하며 반쪽짜리 작위나 다름없는 취급.
그랬음에도 그들을 이토록 고민케 만든 것은, 오직 브롬이라는 존재 하나 탓이었다.
“……나는 따라갈래.”
“뭐?!”
“그, 그게 정말이야?”
한 용병이 지껄인 말에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이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투에 동원될 거라면 용병이나 기사나 다르지 않잖아? 하지만 대장이 없다면 용병 일이 재미있기나 하겠어?”
“그건…….”
“이대로 지루하게 도적이나 토벌하느니, 차라리 대장의 밑에서 기사 노릇이나 하지 뭐.”
“하긴.”
그것이 시작이었다.
망설이고 있던 용병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전원 모두 브롬을 바라보며 의사를 표명했다.
“우리도 따라갈게.”
“……고맙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눈빛만으로 모든 의사를 확인한 브롬은 멀리서 검을 닦고 있던 왕세자에게로 다가갔다.
“모두 왕세자 그대를 따르기로 했소.”
“나쁘지 않군.”
왕세자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왕성으로 돌아가지.”
“……알겠소.”
“하지만 그 전에.”
“…….”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좁힌 왕세자는 붉은 매 용병단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저 거지 같은 꼬라지는 모두 정리하도록.”
“알겠소.”
기사에는 기사다운 모습이 필요했다.
용병 일을 계속할 거라면 개의치 않았으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자리에 맞는 품행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
그리고 그것은 브롬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브롬을 복종시킨 것은 아직은 방금 보여 주었던, 무엇에게도 지지 않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물론 그것이 어떤 감정으로 변하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
“이곳이 왕궁…….”
외형을 가다듬은 붉은 매 용병단의 단원들은 제법 용병의 티를 벗어났다.
하지만 본디 가지고 있던 야성을 감출 수는 없는 법.
풍기는 기세는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향을 풍겼다.
그런 그들이 왕성에 발을 들이고 가장 놀란 것은 지나가는 누구도 그 모습에 핀잔을 놓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놀라는 기색이긴 하지만 주의를 주지는 않는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니고 왕성에 용병들이 들어온 것이련만, 이건…….’
‘왕실에서 왕세자의 권위가 그토록 강력하다는 말인가?’
특히나 귀족들이 용병 출신의 기사에 학을 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이상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어디론가 안내된 그들은 온화하게 생긴 한 귀족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시게.”
“아, 안녕하십니까.”
마치 옆집의 아저씨처럼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보통 고급진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부드러움 속에는 절로 느껴지는 위엄 또한 존재했다.
그가 업무를 보는 것으로 보이는 이 방의 품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나 높은 사람이길래…….’
용병들은 황급히 곁눈질로 배웠던 예를 올리며 귀족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족은 어색한 그들의 예우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들이 새로이 왕실의 기사가 될 이들이라지?”
“그, 그렇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들었는가?”
“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당황한 탓에 말이 계속 꼬였지만, 그 역시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귀족은 책상 위의 서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현 왕실의 기사 체계는 알고 있는가?”
“대충 왕실의 세 직속 기사단과 왕실에서 근속하는 이들로 나뉘어 있다고는…….”
“음,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되네.”
스윽-
용병들은 제각각 건네진 서류를 받으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서류에 적힌 것을 본 용병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붉은 매 기사단이라고?!’
신설되는 왕실의 새로운 직속 기사단.
그 이름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것과 똑같았다.
귀족은 그런 용병들을 보며 웃었다.
“현재 왕실에는 국왕의 근위대이자 제1 기사단이었던 왕실 수호 기사단이 사라진 상태일세. 그리고 자네들은 그 뒤를 이어서 새로운 기사단의 일원이 될 걸세.”
“그, 그게 대체 무슨…….”
“쉽게 말하면 왕세자 전하의 직속 기사가 된다는 뜻이지.”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병이었던 출신의 기사들.
그런 그들이 배속된 곳이 다른 어디도 아닌 신설되는 직속 기사단이었다니!
‘설마 그 말이 정말이었을 줄이야……!’
어차피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대장 때문, 그렇기에 왕세자의 말은 조금도 신뢰치 않았거늘.
용병들의 손에 들린 서류가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