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71화
타락하는 영혼 (1)
철컥-
어두운 방.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모습이 창문에 어렴풋이 비추어졌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는 들어온 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낮게 읊조렸다.
“상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놈들이 북부의 점령지에서 병력의 훈련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남자, 라이덴 델 카롯트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들어온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그 무감각하고 서늘한 눈빛.
수행원은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운 듯 고개를 깊이 숙이며 보고를 이어 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매년 있었던 규모의 훈련이 아닌 대대적인 훈련이옵고, 이는 현 국왕이 즉위한 이래 최대의 훈련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대의 훈련, 자세히는?”
“……명백히 전쟁을 대비하는 수준입니다.”
“그렇군요.”
덤덤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는 수많은 감정을 내포했다.
감히 이 연방제국을 앞에 두고 전쟁에 대비한다고?
4황자의 눈동자가 일순 뱀처럼 길게 찢어졌다.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본디 그런 대규모의 훈련은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에 전쟁과 연관된 물자를 사들이는 것조차도 주변국과의 마찰이 생길진대, 대놓고 전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은 어떠할까?
하지만 놈들은 주변국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대놓고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자신들과의 전쟁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뒤에는, 새로이 얻은 기사단장의 통솔력을 믿은 탓도 있으리라.
“레스피엘의 브라함.”
“…….”
“어린 나이에도 명확한 재능을 보이던 그자를 미연에 처리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습니다.”
“…….”
짐짓 아쉽다는 듯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으나, 수행원으로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치 그 뒤에 숨은 분노를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숨죽이고 이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한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면, 정작 연방제국은 아직 내부의 혼란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루이넬 델 카롯트.’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멍청한 아군이라 했던가?
1황자는 지금도 자신을 노리고 움직이며 그 입지를 공략해 나가고 있었다. 외부의 상황이 어떤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상태로.
그렇기에 담담하게 내뱉는 어조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루이넬, 그자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귀족 세력을 가르고 전하의 실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황자와 3황자 역시 이에 동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추세입니다.”
“한데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
수행원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4황자는 빙긋 웃으며 이를 책잡지 않았다.
“이 모종의 움직임들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 그건…….”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수행원은 공포에 질린 채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물론 그 역시 4황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말이다.
‘역시 익숙해.’
추악한 욕망과 자존심.
인간은 그것을 건들면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된다.
마치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처럼, 감정을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그 움직임까지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혼란과 알력 다툼 속에서 엿보이는 익숙한 향기는 분명 자신에게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틀림없다.
이것은 자신이 주로 이용하는 책략의 향기였다. 타국의 내부부터 좀먹고 혼란을 유도하는 그 계략의 향기.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만든 것은 누구일까?
“알렌 에스테반.”
4황자는 확신하듯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고작 2년, 그사이에 1왕자는 자신의 입지조차 공격해 올 정도로 성장했다.
아수스라는 거대 귀족에게 빌붙어 살아오던 그 모습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게다가 이제는 국왕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지?
그러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작금의 상황.
가소로운 것들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 상황에, 4황자는 처음으로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느꼈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전하, 그러니 사소한 것들은 저희에게 맡겨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삽시간에 공기를 장악하는 매혹적인 향기.
구석진 어둠에서부터 한 검은 로브의 인영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구두의 흔적이 귀를 울렸고, 이에 맞추어 수행원의 안색은 점차 파래지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있을 일들만 생각해 주시면 될 뿐이에요.”
“가소로운 소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이던 특유의 존댓말은 더 이상 없었다.
4황자는 덜덜 떨고 있는 수행원을 내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루이넬, 어차피 그자가 방만하게 날뛸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을 집중하지 못하시다 ‘일’을 그르치시면 어쩌시려고요?”
“네놈들의 역할은 내 발을 핥는 것이지 내게 충언하는 것이 아니다. 패잔병 따위인 네놈의 위치를 착각하지 마라.”
“예, 알고 있어요.”
4황자는 차갑게 일갈하며 오만한 시선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다가온 여성은 4황자에게 눈웃음 지었다.
“힘은.”
“여기에 있어요.”
스르륵-
순간 여성의 검은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그 속에서 혼탁한 빛의 검은 구슬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이끌리듯 4황자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
구슬이 사라지자, 4황자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검은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이제 머지않았다.”
그 말을 내뱉은 4황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방을 나섰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와라. 이 무한한 갈증이 해소될 정도의 힘을.”
“본부대로 할게요.”
단지, 그런 말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었다.
* * *
한편, 1황자파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검은 로브의 여인?”
1황자는 눈가를 씰룩이며 물었다.
4황자 궁에 들락거린다는 그 여인에 관한 소문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놈의 개인실에 아직도 그 여인을 들인다는 말이냐?”
‘이상함’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적어도 같은 혈육인 그가 알기에 라이덴 델 카롯트가 여인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거슬리는 것을 죽이면 죽였지, 데리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군.’
그렇게 턱을 쓰다듬으며 공격할 틈을 찾던 1황자에게 수행원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것이 뒤를 캐게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할까요?”
“음? 아아, 일단은 섣불리 나서서 경각심을 가지게 하지는 말도록.”
“예? 그게 대체 무슨…….”
“우선은 그 놈들과 상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 말에 수행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런 수행원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1황자는 그저 기쁜 듯 히죽 웃으며 지껄였다.
“놈들이라면 여인의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뒤를 캐는 것은 그 이후가 되어도 늦지 않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통신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음.”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나선 수행원의 표정은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가려진 그늘 뒤에서 1황자를 의존케 만들고 있는 세력.
그것이 의도도 정체도 모를 ‘까마귀’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탓이다.
‘대체 누구냐.’
……까마귀.
* * *
병과의 전면 개편과 전략의 확립을 목표로 시작된 대규모 훈련.
그 속에는 연방제국과의 전쟁을 대비한다는 진의가 있었기에 훈련은 어느 때보다 성대하고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북부에서 진행 중인 훈련에 대한 경과보고입니다.”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보고서들을 책상 위로 내밀었다.
말 그대로 군사 특구 훈련의 상황을 담은 보고서였다.
하지만 아버님은 이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흘겨보시고는 그대로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어찌 이것을 내게 가지고 왔느냐?”
“모든 병력의 훈련 상황은 통수권자인 국왕께서 확인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영 관리의 전권은 네게 일임했다.”
“하지만 아직 아버님께서는 국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쯧.”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혀를 차시며 보고서가 덩그러니 올려진 책상 위를 바라보셨다.
그간 서류로 가득했던 책상은 깔끔하게 비워진 지 오래다.
이미 대부분의 권한과 업무가 내게로 일임된 탓이다.
하지만 지금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보고서는 그것이 무색하게도 족히 수십 장은 넘어 보였다.
아버님의 못마땅한 시선이 마냥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너는 꼭 마지막까지 나를 귀찮게 만들어야겠느냐?”
“왕실의 제도입니다.”
“허 참.”
결국 아버님께서는 혀를 내두르시며 보고서를 집어 드셨다.
그러나 그것이 꼭 마지막을 장식하고 가려는 것처럼.
어쩌면 홀가분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흐뭇한 눈치셨다.
스륵- 스륵-
“…….”
그렇게 보고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리던 그때, 아버님께서 나직이 말씀하셨다.
“한데 이 훈련이 네 의도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않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연방제국의 공격을 무효화 할 비책을 모두 꺼내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다.”
아버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훑었다.
두서없이 막연한 질의였다.
하지만 나는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실제로 연방제국의 전략은 오로지 군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의 예기치 못한 상황 탓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
분명 현재 북부의 병력을 훈련 시키는 방향은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배제한 전략이었으니까.
‘……흑마법사.’
놈들이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을 그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 역시도 이미 염두에 둔 상황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이 가진 흑마법의 힘은 자연스럽게 무력화될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뜻이냐?”
“아직 대비의 때가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 너라면 알아서 잘할 테지.”
이윽고 모든 보고서를 확인하신 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 아버님의 시선은 벽면 한편을 장식한 달력에 다다라 있었다.
“…….”
그곳에 붉게 표시된 하나의 날짜.
바로, 대관식을 겸하게 될 현왕의 탄생일이 기록된 달력이었다.
***
“슬슬 그날이 다가오고 있군요.”
비도르 후작은 여행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웃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었으리라.
엉겁결에 충성하게 된 사람이 순식간에 왕세자가 되고, 국왕이 되는 것을 직접 옆에서 지켜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반대로 조지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일그러지고 있었다.
“일거리만 잔뜩 추가될 텐데 뭐가 그리 좋습니까? 일 중독이라도 걸린 것도 아니고.”
“어허! 이보게 헤그메스 자작! 내가 분명 전하의 보좌관과 귀족으로서 맡은 바를 다 해야 한다고…….”
“또 무슨 이럴 때만 자작 취급입니까.”
“……크흠.”
그 퉁명스러운 말에 후작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조지가 얼마나 귀족 작위를 받기 싫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결국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국왕 전하의 탄생일 전까지 어찌하실 예정이십니까?”
“예정은 변함없다.”
“후우,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현재 왕세자의 예정이라 하면, 병력의 훈련을 점검하고 지휘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예정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딱딱한 일정들.
조금 더 ‘나 자신’을 위한 일정을 바라던 후작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때였다.
우우웅-!
“…….”
조지의 품속에 있던 통신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조지와 시선이 마주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존 헤드윅.’
암흑가에서의 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