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72화
타락하는 영혼 (2)
땅거미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때 동안, 낮부터 이어진 상념은 끊이질 않았다.
암흑가에서 보내온 첩보의 내용 탓이었다.
‘검은 로브의 여인.’
유독 최근 들어서 4황자궁에 자주 출몰한다는 요주의 인물.
당연히 그 정체는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슬슬 녀석이 본격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음.”
나는 조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어루만졌다.
흑마법사가 다루는 음차원의 마나는 특정 분야에 한해서는 여느 마나의 원소보다도 다루기가 용이하다.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으며, 때로는 화전민 마을에서 보였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전력에 가담할 수도 있다.
그러니 놈들로서는 그런 인력을 신성제국의 눈치를 보며 낭비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번 것은 화전민 마을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전과 다르게 흑마법사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말은, 그것을 숨길 여유도 없어졌다는 말이지.”
“더 이상 주변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연방제국을 감싼 혼란이 가중되는 지금. 흑마법사들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놈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흐음.”
턱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우뚝 멎었다.
“급한 것도 그렇지만, 정확히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감춰 두었던 놈의 진정한 야욕.
그것이 실현될 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내 입꼬리가 비릿하게 비틀어졌다.
“뻔한 일이다.”
나는 서랍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물건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섬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은 화전민 마을에서 노획해 왔던 놈들이 지닌 힘의 근원이었다.
“강경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알약이군요.”
“그래.”
살아 있는 인간을 희생시켜 만든 알약.
앞서 말했듯,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처음 흑마법사의 은신처에서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을 다스리고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분노’라는 감정은 성장의 양분이 되어 준다는 소리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막대한 힘을 쥐여 주는 물건이었다.
“놈은 이것을 이용하여 내부를 정리하려 들 것이다.”
“무력으로 혼란을 진압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래.”
“고작 알약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요?”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조지의 말을 즉각 부정했다.
“대비하지 않는다면 놈들은 막지 못한다. 결코.”
이것이 가지고 오게 될 참극.
회귀 전의 전쟁을 겪어 본 나로서는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4황자는 순식간에 내부를 휘어잡고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우뚝 솟아오르리라.
“하지만 그렇게 쉽게 돼서야 재미없지.”
툭-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구태여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1황자를 움직였던 것은 어째서였던가?
바로 놈들의 혼란을 극대화하고 4황자를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 1황자가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1황자를 어떤 식으로 움직이게 만드는지가 관건이겠군요.”
그 순간 조지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놈을 움직이는 일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게다가 녀석도 이쪽에 누구보다 의지하고 있는 상황.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분위기를 고조시켜 두었으니 본격적으로 놈들을 맞붙게 만든다.
어떻게든 내부의 혼란과 피해가 커질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 녀석에게는 쓸모가 남아 있을 것 같군.”
나는 더 없을 정도로 시린 냉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썩 즐거운 상황이었다.
아마, 4황자는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이번엔 약간의 거짓을 섞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벌여 보도록 할까.”
장작.
확실하게 말하자면, 1황자의 가치는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 * *
1황자는 여태껏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여관방을 맴돌고 있었다.
얼핏 상념에 빠진 채로 정처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는 움직임이었다.
‘……까마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은밀함을 고수하고 있었던 첩보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조바심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선물을 가져다 주련지.’
무려 여태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던 놈들이, 돌연 전해 줄 것이 있다며 직접 만나기를 청했다.
그것이 과연 충성의 의미일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일지는 본인도 모를 따름이다.
다만, 놈들이 ‘전해 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는 점 자체가 중요했다.
‘감히 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까지 녀석들이 가져다준 첩보들은 무려 황제의 비호를 받던 4황자의 입지를 조금이나마 무너뜨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야금야금 계속해서 갉아 먹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직접 만나서까지 전해 줘야 할 귀중한 물건이 있다고?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 접선하면서까지 은밀하게 주어야 할 정도로?
그것이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는 것쯤은 그 역시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런데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더욱 이상한 소리였다.
‘겸사겸사 놈들의 목적을 캐내고 충성을 받는다면……!’
스륵-
“……!”
그때, 열린 창문의 틈으로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1황자의 얼굴에 희열과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검은 두건과 옷으로 전신을 가린 정보책의 행색.
필시, 기다리던 ‘까마귀’가 분명했던 것이었다.
“크흐흐!”
어느덧 놈들의 목적과 정체를 캐낸다는 처음의 의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1황자는 즉각 까마귀에게 다가가며 욕망으로 눈을 번뜩였다.
“네 녀석이 물건을 전달해 줄 사람이 확실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대체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빨리 꺼내 보도록!”
속이 투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짙은 욕망이었다.
그럼에도 까마귀는 예상한 듯 말없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1황자에게 그걸 그대로 건넬 뿐이었다.
“이건…….”
알약?
1황자가 주머니의 내부를 열어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을 본 까마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흑마법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결정체입니다.”
“……뭐?”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로 만들어진 알약이지요.”
“뭐, 뭣이?!”
촤르륵!
화들짝 놀란 1황자가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주머니를 놓친 까닭에 내용물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1황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이딴 것을 내 손에 들게끔 만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것은 4황자가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뭐, 뭐라고…….”
비인도적인 실험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1황자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
그러나 이내 상황을 깨닫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수상한 남자가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떠올린 탓이었다.
“설마 그 여자가…….”
“예, 그렇습니다.”
4황자의 방에 들락거리던 검은 로브의 여인.
이것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4황자와 그 흑마법사였던 것이다.
“크, 크하하핫!”
1황자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흩어진 알약을 보는 눈은 어느덧 분노가 아닌 번들거리는 욕망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그랬어…… 놈이 부정적인 힘까지 끌어들인 것이었어……!”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황자는 다급히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놈이 흑마법으로 만든 알약…… 분명 인간을 재료로 한 것이 확실하겠지?”
“그렇습니다. 4황자는 자국민을 상대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이 ‘까마귀’가 거짓을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 일은 자신의 몫이었다.
“4황자, 드디어 네놈의 목줄을 쥘 때가 다가왔구나!”
마침내 바라던 것을 찾았다는 듯.
1황자는 희열에 찬 얼굴로 알약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던진 것을 다급히 수습하는 그 모습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진실 속에 거짓을 숨기고, 앉은 자리에서 인간을 조종한다, 라.”
붕대 속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목소리는 푹 눌러쓴 페도라에 가려졌다.
남자는 천천히 앉은 지붕에서 일어서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역시나 적으로 만든다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분이시군요.”
뭐, 그래서 더 믿을 수 있는 분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지금까지 들었던 생각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천천히 사라져 갔다.
* * *
한편, 에스테반의 왕궁은 다가온 현왕의 탄생일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함에 조금도 차질이 없어야 하네.”
“알겠습니다.”
무려 대관식을 겸할 탄생일이었다.
타국의 사신들까지 찾아오는 자리이니만큼 비도르 후작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이는 세세한 요소까지도 반드시 직접 확인할 정도였다.
“각하, 사절을 보내기로 한 국가들의 명단입니다.”
“음, 확인해 보겠네.”
후작은 왕궁의 사용인이 가지고 온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장 처음에 보이는 이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아렌델에서는 사절을 보내기로 하였군.”
사실상 이제는 혈맹이나 다름없는 두 국가의 사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왕족이 방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세간의 인식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나머지 국가는…… 음?”
그 순간, 명단을 살피던 후작의 고개가 갸우뚱하게 기울어졌다.
그 모습을 본 사용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네만.”
후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명단에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마기아에서도 사절을 보낸다는 말인가?’
마법사들의 왕국 마기아.
에스테반과는 별달리 접점이 없는 국가이기도 했거니와 지금까지 사절이 오간 적도 없는 곳이었다.
하물며 그들과의 접점이라고 한다면 대륙회의에서 있었던 대마법사와의 만남이 전부.
‘왕세자 전하께서 고대 마법의 수식을 그들에게 넘겨주셨지.’
오히려 악감정을 가졌으면 가졌지 좋은 이유로 만날 일이 없는 그들이었건만, 사절을 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후작은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로 사용인에게 물었다.
“혹 마기아에서 보내온 서신이 있는가?”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분주하게 달려 나간 왕궁의 사용인은 곧이어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서신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음. 잠시만 기다려 주게.”
후작은 그것을 받아 들고 서신의 내용을 살폈다.
“흐음…….”
하지만 거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존재하지 않았다.
억지에 가까운 강매로 고대 마법의 수식을 떠넘긴 것을 탓하는 내용도. 그리고 마법의 운용과 관련된 내용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평범한 사절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의아해하며 서신을 집어넣는 후작의 눈에 문득 서신을 장식한 익숙한 색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박빛?”
얼핏 주홍빛에 가까워 보일 수 있는 그것.
언젠가, 제 상관에게 도착했던 ‘의문’의 보석과 같은 색깔과 똑같았다.
후작의 미간에 천천히 골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