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73화
끝내 이루지 못했던 소망 (1)
그 시각, 왕세자의 집무실.
조지는 로엘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 이 녀석 이거 답답하네.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
답지 않은 진지한 분위기.
가슴까지 퍽퍽 두드려 가며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이, 오죽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맡긴 업무가 크게 탈이 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윽고 조지의 손가락이 로엘이 들고 온 물건으로 다다랐다.
“보리차가 아니라 보리 향 맥주라고 맥주!”
“…….”
“아이고, 이 답답아!”
로엘이 조지의 삿대질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게다가 녀석의 품 안에서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그리폰의 모습이라니…….
“저, 저 살찐 닭 주제에……!”
그 황당한 표정에 조지의 인내심이 깎여 나간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치만 맥주는 안 주던걸?”
“왜!”
“어린아이한테는 못 준대.”
“…….”
말로 해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답답함이란 이런 것일까?
조지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후, 아니, 왕세자가 달라고 했다고 하면 되잖아. 보좌관의 인장을 괜히 준 줄 알아?”
“…….”
“……아니다. 내가 말을 말지.”
결국 조지는 포기하며 로엘의 손에 들린 보리차를 냉큼 뺏어 들었다.
씁쓸하게 병에 담긴 것을 마시는 모습은 퍽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철컥-!
“캑!”
그 순간,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크흡…… 잉? 후작님?”
“아, 조지 군. 전하께서 출타하신 사이에 로엘을 교육하고 있었는가?”
“예, 뭐.”
조지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방문에 사례가 들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집무실로 들어온 곧장 후작은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살폈고 이내 턱까지 쓰다듬으며 책장을 노려보는 그 모습에, 결국 조지는 궁금한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 찾습니까?”
“음…… 그게. 혹시 자네, 이전에 전하께 도착했던 보석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는가?”
“갑자기 뭔 보석이요.”
“호박 말일세, 호박.”
“아아.”
도착했던 보석이라 하니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조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 구석에 있는 왕세자의 개인 금고로 다가가더니, 이내 능숙한 손길로 그것을 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따기’ 시작했다.
“…….”
귀족 인장에 달린 작은 핀 하나로 금고를 어루만지는 그것은, 영락없는 도둑놈의 모습이었다.
후작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애써 참아 내며 금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금고가 환영한다는 듯 활짝 열리고.
철컥-
“아마 여기에 있을 겁니다.”
“……고맙네.”
도둑놈 같은 것은 도둑놈 같은 것이고, 일단은 목적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못해 감사 인사를 남긴 후작이 금고 내부를 살폈다.
“허어.”
그러고는 발견할 수 있었다.
마기아에서 온 서신과 똑같은 색의 보석이 그곳에 있었다.
후작의 눈에 이채가 띄어졌다.
‘그렇다면 호박을 보내왔던 것은 정말로 마기아란 말인가?’
이유도 의도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1왕자였던 왕세자께서는 이 보석의 의미를 이해한 듯 보였다는 점이었다.
마기아.
대체 에스테반과 무슨 관계가 있었단 말인가…….
그 이름을 되뇌는 후작의 미간은 점차 작은 골짜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음? 그 보석을 가져가서 팔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
조심스레 금고를 닫으려던 후작은 움직임을 멈추고 눈치 없이 지껄이는 조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분노한 상태에서만 나오던 ‘악귀’의 얼굴이,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
짹짹!
그리폰이 꼴좋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 * *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왕국 상단의 관리자 벨더렛은 왕세자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왕세자가 ‘필요하다’ 말했던 것들은 모두 중요한 물자들이었다.
나비산호부터 시작하여 흑철까지, 에스테반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것들이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 지시는 그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가장 빠른 품종의 말 두 필이 필요하다.”
“예…… 말 두 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음.”
“그, 그렇군요.”
벨더렛은 왕세자의 진의를 파악해 보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말? 전하께서는 새로운 전마를 원하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생각나는 품종이 여럿 있기는 하다만…….
그러나 갑자기 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으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의문을 품은 채로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면, 원하시는 조건은 단순히 빠른 말의 품종뿐이십니까?”
“아니, 정확히는 ‘레버넌트’라고 불리는 말이다.”
“흐음…… 레버넌트라면.”
상행 경험이 풍부한 그조차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
그렇다면 적어도 흔한 말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후우, 일단은 조사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그렇게 벨더렛이 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아, 혹시 유령마라 불리는 품종이 아닐까요?”
“……유령마?”
마침 상단 본부 내부를 정리하던 레이카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곰곰이 떠올리고는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아마 연방제국의 서부에서 처음 발견된 품종으로 알고 있어요. 밝은 잿빛의 털과 그 움직임이 유령같이 신묘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그, 그래? 그런 것이 있었던가?”
“네! 아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워낙 성격이 까탈스러운 말이어서 그럴 거예요. 빠르긴 해도 길들이고 타는 것조차 어려워서 아무도 안 찾는 품종이거든요.”
“잘 알고 있군.”
“헤헤…….”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것이 정답임을 시사했다.
이에 벨더렛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확실히 연방제국의 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쪽은 잘 알고 있구나.’
고대학을 공부하던 아버지와 함께 왕세자를 따라온 레이카.
본인이 자유로운 상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왕국 상단으로 배치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처음 상행을 데리고 다닐 때만 하더라도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로 풍부한 상행 지식과 여러 정보 덕에 간혹 왕국 상단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고, 이는 주로 연방제국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방제국 쪽은 아무래도 정보가 적을 수밖에 없었는데…….’
에스테반쯤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땅덩어리가 넓은 연방제국이었기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에스테반 왕실의 상인인 그들에게 많은 정보가 들어올 리도 없었고…….
하지만 레이카는 연방제국 출신이었던데다 아버지를 대신해 서점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가진 지식은 그만큼 넓은 편!
적어도 그 분야에 한해서는 베테랑인 자신보다도 아는 것이 많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정보를 찾아보느라 시간을 소요할 필요는 없겠구나.’
벨더렛은 다행이라는 듯이 웃으며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전하께서 지시하신 것을 구해 오겠습니다. 서부에서 나는 것이라면 에스테반에 들어온 것이 제법 있을 테니 무역 제재에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음.”
“다만 어느 정도 길들인 것을 찾으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는데…… 기한은 언제까지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군.”
기한이라…….
왕세자는 말끝을 잠시 흐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
“기왕이면 아버님의 탄생 기념 축제가 끝나기 전이 좋겠군.”
“예?”
“정확히 말하자면 보름쯤이 되려나.”
“…….”
벨더렛의 눈빛이 흐려지며, 표정이 서서히 멍해져 갔다.
보름.
지금 당장 왕복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늦을 거리였다.
* * *
“……마기아.”
그 이름을 떠올리는 비도르 후작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빚어도 할 말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이쪽에서는 말한 대로 주었으니 켕기는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결국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런 와중에 사절을 보내며 국왕의 탄생일과 대관을 축하한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관계가 있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분명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다시금 탄생일의 준비 현장으로 향하던 후작의 눈에 문득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 공작 각하?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아아, 비도르 후작.”
발테르 공작은 후작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후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혹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탄생 축제의 일부 예산 책정과 관련해서 자네에게 할 말이 있었네. 수상인 자네와 상의하지 않고서야 안 될 일이지.”
“이, 이런! 언질이라도 주셨다면 즉시 달려갔을 터인데…….”
“허허,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요즈음에는 바쁜 일도 없으니까.”
“그래도…….”
공작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후작의 걱정을 털어 주었다.
하지만 이내 후작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되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가?”
“그게…….”
후작은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 망설였다.
마기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공작에게 꺼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작께서도 대륙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계시니 상관은 없을 터지만.’
호박과 관련된 내용은 왕세자 개인의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신하 된 자로서 섣불리 꺼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았다.
결국 후작의 선택은 에둘러 말하기였다.
“혹 각하께서는 마기아와 에스테반의 관계를 알고 계십니까?”
“……음? 마기아 말인가?”
“그렇습니다.”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공작은 오히려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찌 자네가 그것을 모르는가?”
“예?”
“……아아, 자네가 귀족위를 물려받았던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지. 게다가 중앙 출신이 아닌 변방의 자재라면 더욱. 그렇다면 두 국가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를 만도 하겠군.”
“그게 무슨…….”
공작은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고개를 가까이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기아와 에스테반은 상호 친화 정책을 펼친 관계였네.”
“…….”
“정확히는 비공식적으로, 그것도 짧은 시간에 불과한 관계였지만.”
후작은 그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친화 정책을 ‘펼쳤던’ 관계라고? 게다가 비공식적으로? 짧은 시간?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이…….
그리고 공작은 그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곧장 설명했다.
“별세하신 왕후께서 마기아의 공주이셨네.”
“……!”
후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제야 후작은 머릿속으로 일련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기아의 상징인 호박빛의 여명!’
그리고 왕세자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보내졌던 그 보석.
마지막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일관적인 그들의 태도까지…….
너무도 사랑했기에 에스테반의 기록 속에서도 감추어졌던 왕후의 죽음이 이십일 년의 세월을 걸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