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74화
끝내 이루지 못했던 소망 (2)
다가온 탄생일의 준비로 분주한 왕실.
일개 시종부터 시작해서 귀족들까지, 누구 한 명도 숨 가쁘게 움직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욱 분주해야 정상인 것은 그곳에서 왕위를 이어받게 될 나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한가한 상태였다.
정확히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런데 진짜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나는 석연찮게 물어 오는 조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안경을 치켜올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뭐, 이 시기에는 보통 인수인계 따위로 바쁘지 않습니까? 국왕의 업무가 땅따먹기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조지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간혹 어딘가에 다녀올 때를 제외하고는 훈련장에 다녀오거나, 잠깐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인수인계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애초에 국왕을 만나는 일도 손에 꼽았다.
그러니 녀석으로서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으로 보였을 터다.
‘그것도 왕위 계승을 앞두고 말이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딱 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녀석에게 말했다.
“이미 끝났다.”
“뭐가 끝납니까.”
“인수인계.”
“…….”
그것도 애저녁에 끝난 지 오래였다.
정확히 하루.
필요한 것들을 완벽하게 숙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것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황당한 듯 말문이 막힌 조지를 보며 작게 실소했다.
‘뭐, 당연한 소리겠지.’
과거로 돌아온 내게 있어서 국왕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잠깐의 휴식기를 가지고 업무에 복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세하게 따지자면 2년이 약간 안 되는 시간.
하지만 이미 몸에 밴 국왕의 업무는 그 비어 있는 시간조차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철저하고, 또한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국왕이 되었던 것은 아버님이 독에 의해 급사하신 이후였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홀로 터득해야만 했다.’
누구도 내게 ‘왕’의 가르침을 내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에스테반에 누가 되지 않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왕의 업무를 익혀 나갔다.
결코 타인의 지혜를 빌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뭐, 그때와 비교해 본다면…….
내게 이 시간은 단지 마지막 남은 유예에 불과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남들 다 바쁠 때 혼자 재미를 보고 계셨군요.”
조지가 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보란 듯이 팔랑였다.
말 그대로 ‘나는 무척이나 바쁘다’라는 어필이었다.
나는 그 기가 찬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꼭 모두가 바쁜 것은 아니더군.”
“예?”
“듣자 하니, 로엘 그 녀석에게 맥주 심부름을 시켰다지.”
“…….”
“그러고는 내 개인 금고를 멋대로 열었다고.”
“…….”
“그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조지는 시선을 천장 어딘가로 돌리며 모른 체했다.
곧 있으면 딴청 피우며 휘파람이라도 불 기세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바쁜 것이 뭔지 보여 주지.”
“아오.”
조지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하여간, 매는 알아서 버는 타입이다.
* * *
한데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인수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버님께서 급히 나를 찾는다고 호출하신 것이다. 당장 탄생일을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황급히 국왕 전하를 찾아뵈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아버님의 수행원은 고개를 조아리며 나를 재촉했다.
내 눈매가 작게 좁혀졌다.
마침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때였기에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훈련 중에 호출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그만큼 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럴 만한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검을 회수하며 수행원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찾아뵙겠다. 안내하도록.”
“예, 전하.”
그런데 앞서 움직여야 할 그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표정과 몸짓. 명백히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뭐지?”
“그것이…… 실은, 국왕 전하께서 꼭 목욕재계를 한 뒤에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뭐?”
나는 황당한 그 말에 시선을 내려 행색을 살폈다.
훈련하던 도중이라지만 이미 초인에 다다른 육신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기껏 해 봐야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것이 전부였다.
아버님 역시 상당한 실력의 기사.
이 정도라면 평소 아버님을 뵈러 갈 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뿐더러, 훈련 중 묻은 먼지를 신경 쓰실 이유도 없다는 소리다.
“아버님께서 깔끔한 모습으로 찾아뵈라 하셨다고?”
“그, 그렇습니다.”
수행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위화감 같은 것이 불쑥 솟아올랐다.
‘……뭐지?’
도무지 이유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하물며 빠르게 오라고 지시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님이 아니셨던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기에 더욱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뜻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결국 나는 아버님을 찾아뵙기에 앞서 몸단장을 다시 하였다.
그러고는 수행원에게 안내하라 눈짓하며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 향한 곳은 언제나와 같은 집무실이 아니었다.
“여기는.”
“이 안에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귀 전의 기억 너머로도 아득히 오랜만에 방문한 이곳.
바로, 드레스 룸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애써 수상함을 감추고 내부로 들어가자, 그곳에 계신 아버님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셨다.
그 옆에 대동하고 계신 것은 왕궁의 시녀들이었다.
“크흠! 어서 오거라.”
“…….”
“무얼 하느냐? 어서 들어오거라.”
도무지 인수인계를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알았다.
그리고 저 시녀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 역시도.
그렇기에 좁혀진 내 눈을 보신 아버님께서는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시며 내게 손짓하셨다.
“크흠! 훈련 중에 바쁜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야 기사답게 꾸밈없는 모습으로 다녔다지만, 왕위를 이어받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저를 급히 이곳으로 부르셨습니까.”
“미, 미리 대비해 두자는 뜻이지. 이 또한 탄생일의 준비가 아니겠느냐.”
굳은 내 목소리에 아버님께서 다급히 옆의 시녀에게 눈짓하셨다.
그러자 시녀는 화들짝 놀라며 대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번 탄생일은 온 국민이 경하하는 축제가 될 날이기도 하며, 또한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을 환영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그렇기에 국왕 전하께서는 이번 탄생일에 만전을 기하시고자 저희를…….”
“그만.”
“……헙.”
차가운 일축에 시녀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이 황당한 상황의 ‘원인’이신 아버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것이 아버님의 본모습이셨나.’
왕위 계승의 문제가 일단락되고 난 뒤부터, 종종 아버님께서는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셨다.
내가 드린 서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셨을 때도 그러했고,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러했다.
생각해 보면 그 이유야 간단했다.
이제는 더 이상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뭐…… 썩 나쁘진 않았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국왕이셨다.’
그리고 그간 보여 주셨던 사적인 모습이나 공적인 모습 역시, 어디까지나 국왕으로서의 품격이 주가 되었다.
결코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내게 그 모습을 보여 주셨다는 말은,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했고.
또한 그만큼이나 지금까지의 자리에 충실하셨다는 뜻이었다.
필시 감추어 두었어야만 했던 인간적인 모습.
오랜 왕관의 무게에서 해방된 그 순간이 더욱 빛나게 보일 정도로…….
“딱 한 시간만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나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혈육의 정.
감히 인간을 넘어섰다 일컫는 초인조차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 * *
삼일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마침내 국왕의 탄생일이자 새로운 왕이 탄생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때문에 수도는 물론이고 지방의 영지까지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흘러넘쳤다.
“와아! 저 장식들 좀 봐! 엄청 이쁘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일행이 있었다.
정확히는 한 소녀와 그를 지키는 왕실의 기사들.
누가 봐도 예사로운 신분이 아니었기에 인파들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비켜나며 그 모습을 눈에 새겼다.
정작 본인은 거리낌 없이 기사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전에도 기품이 넘치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완전히 색다른 느낌이에요!”
“외람되오나 후작 영애, 거리를 구경하시는 것도 좋지만 슬슬 왕실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어어? 벌써요? 하지만 아직 파티의 시작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영애께서는 각하와 함께 미리 입장하셔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기사는 단호하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세자의 보좌관 출신이자 이제는 일국의 수상직을 맡게 된 비도르 후작의 독녀인 엘리였으니까.
엘리의 볼이 뾰로통하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려운 장면인걸요?”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슬슬 왕궁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딱 한 시간만 더 구경하는 것도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수상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네에.”
후작 영애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럴 때는 변방 영지 남작 영애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그리워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는 일.
엘리는 시무룩함을 애써 감추며 기사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저 머리 장식, 로엘에게 잘 어울리겠다. 잠시 저것만 사 올게요!”
“여, 영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성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기사들은 엘리를 따라 십여 분을 더 움직인 뒤에야, 왕실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왕실은 탄생 기념 파티의 손님을 받느라 분주했다.
“타국에서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렇듯 경하드릴 일에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타국에서 찾아온 사절들.
시기가 되자 그들이 마치 밀물이 몰려오듯 왕실로 들이닥쳤던 탓이다.
물론 모두가 ‘축하’라는 감정만을 가지고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혹자는 고대 마법의 비밀을 얻기 위해.
혹자는 미스릴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구해갈 수 있을까 봐.
혹자는 갑자기 비대해진 에스테반의 군사력에 한 발을 얹기 위해서.
그렇게 저마다 내포하는 진의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왕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사절단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마 에스테반이라는 국가가 탄생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후우, 이것을 기뻐해야 할지…… 역시나 바쁘구나. 음?”
하지만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휘하고 있던 비도르 후작의 눈에 익숙한 문양이 들어왔다.
한 사절단 일행이 가슴팍에 달아 놓은 아렌델의 뱃지!
후작은 그들에게 다가가며 반갑게 맞이했다.
“일찍 와 주셨군요. 반갑습니다. 저희 에스테반은 아렌델에서 오신 귀빈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아렌델의 사절 일행 역시 후작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렌델에게 있어서 에스테반은 영원한 혈맹과도 같은 것.
그만큼 반갑게 맞이할 수밖에.
하지만 그때였다.
“이렇듯 늦게 찾아뵙게 된 것이 죄송할 따름이네.”
“음?”
사절단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며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여졌다.
“와, 왕세자 전하?!”
“쉿.”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그 남자는, 바로 이곳에 있으면 곤란해지는 아렌델의 왕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