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75화
끝내 이루지 못했던 소망 (3)
아렌델의 왕세자가 너스레를 떨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반갑네. 자네가 대마법사와 함께 아렌델에 방문했을 때 잠깐이지만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었지. 생각나는가?”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때는 남작에 불과했거늘, 순식간에 후작위에 오르다니 감회가 새로운 느낌이야. 정말 축하하네.”
“화, 황송합니다.”
후작은 주변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목례했다.
그러던 문득 그가 언질도 없이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 그런데 이곳까지는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지금은 한참 관계를 숨기고 타국의 시선을 피해야 할 시기이거늘…….”
“아아, 걱정하지 마시게.”
왕세자는 자그마한 반지 하나를 슬며시 꺼내 들었다.
그러자 왕세자의 외형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확히는, 본디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을 사절단 일행 중 한 명의 모습이었다.
“변장용 아티팩트네. 자네와 인사하기 위해 잠깐 발동을 해제시켰지.”
“그, 그렇다고 해도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어쩔 수 있겠는가? 은인인 에스테반의 경사를 쉬이 넘어가기엔 그렇지 아니한가.”
“…….”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후작을 본 왕세자가 작게 웃었다.
언뜻 보기에 철없는 도련님의 행동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마냥 무작정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최근 연방제국의 동향이 이상하네.”
“……!”
순식간에 굳어진 왕세자의 표정에 비도르 후작의 얼굴 역시 급격하게 굳어 갔다.
왕세자는 시선을 돌려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동부와 남부. 그리고 동맹국을 통해 물자를 비축하면서 비밀스럽게 병력을 움직이고 있네. 최근에 움직인 숫자만 하더라도 오만에 달할 정도지.”
“전하, 그게 사실입니까?”
“아렌델을 통하는 동부의 국가들과 내부의 정보를 취합한 것이니 확실할 걸세.”
비도르 후작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렇다면 왕세자가 직접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외부로 드러날 정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필시 이전에 은밀히 비축해 놓은 것까지 합한다면 더욱 많을 것입니다.”
“추측하기로는 정말로 대륙 정벌을 논할 수 있을 정도라 하더군.”
“……역시 그렇군요.”
놈들로서는 이번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제일 껄끄러워하는 신성제국, 그 심부를 타격한다면 제대로 대응할 국가는 극히 일부일 테니까.
그리고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길목을 지키고 있는 에스테반이었다.
‘정말로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예측하고 있던 시나리오.
머지 않아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돌연 왕세자의 굳어 있던 표정이 차차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걱정은 없어 보이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긴박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별달리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
아렌델의 왕세자는 후작을 지나쳐 가며 의뭉스럽게 말했다.
그 뜻을 이해하고자 머리를 굴리던 후작의 뒤로 또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만큼이나 에스테반의 왕세자께서 준비하신 것이 확실하다는 소리겠지. 연방제국과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아…….”
“존재만으로도 타인에게 확신과 믿음을 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가.”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군.”
그제야 후작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세자께 내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렌델의 왕세자는 먼저 떠나갔다.
곧 그 일행의 모습은 무수한 사절단의 인파 속에 가려져 흐릿해져 갔다.
***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왕실에서는 국왕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런 연회장은 우스갯소리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붐비는 상태였다.
아직 연회의 주인공인 국왕과 왕세자가 입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워우, 이 정도 숫자가 모이는 것은 본국의 세미나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인데.”
동상이몽.
뜻은 달랐으나, 모두가 새로이 탄생할 왕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물론 상대가 그 화두의 왕세자라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외부 테라스에 걸터앉아 잔을 기울이던 남자는 건너편에 일말의 기척도 없이 앉아 있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로드 헤임달.”
“…….”
탁-
대마법사는 남자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읽고 있던 책을 닫았다.
그제야 노인의 몸에서는 처음으로 인기척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연과 동화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굳어 있었다.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재미없는 화법은 여전하시군요.”
“왕자께서는 제게 어떤 대답을 바라시는 것입니까.”
그 되돌아온 딱딱한 질문에 남자, 마기아의 왕자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는 다만 대마법사의 눈으로 보기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쭈었을 뿐입니다.”
“제게 저 숫자를 헤아려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고 왕자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에스테반의 1왕자…… 분명 누구보다 유약한 성격과 좁은 시야를 가진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십 년의 세월이 증명해 주는 사실이지요.”
그렇기에 마기아는 그에게서 관심을 끊어 냈다.
정확히는 에스테반이라는 나라에서 관심을 떠나보냈다.
당대의 국왕이 무척이나 사랑했던 딸.
그녀를 허무하게 잃어버리면서 낳은 결과가 고작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마치 수많은 연구 속에서 당연하게 버려지는 부산물처럼 그저 필부의 운명에 불과한 사내였지요.”
“…….”
“하지만 지금 저 사람들은 그런 남자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남자는 역사 속에 없을 대기록을 갈아 치우며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혜안으로 에스테반을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마법사들의 왕국인 마기아에서도 포기했던 고대 마법의 부활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녕 남자의 ‘능력’으로 만든 일이었을까?
그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정말 ‘실패작’이 설계한 것들이었을까?
왕자는 그것이 궁금했다.
“왕위에 오르신 아버님께서는 여동생을 타국에서 죽게 만든 에스테반에게 다시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로드 헤임달,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왕자의 냉정한 시선이 대마법사에게 닿았다.
그는 저 인파와 자신들을 맞이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필부에 불과한 사람입니까?
그 눈빛은 그리 묻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대마법사는 드물게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더니 잠시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남자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하다?”
왕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와 에스테반이 가지고 있는 고대의 마법이 위험하다는 의미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대륙회의에서 만난 그 남자에게서는 찰나였지만 짙은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죽음입니다.”
“……허.”
확고한 말투와 시선.
대마법사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남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몰고 올 재앙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죽음이 따를 것이고, 그 자신조차도 죽음이라는 존재에게서 자유롭지 않을 테지요.”
“그것이 당신의 의견이군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몰고 올 재앙.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대륙회의에서 본 그 모습에서는 그 죽음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연방제국.’
일부러 그들을 꾀어냈을 때 보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냉혹했다.
마치 그 모든 것들이 한때의 상황을 위해 짜인 것처럼.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차가운 적의는 연방제국을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대마법사는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거래’에 참여했다.
과연 그 적의가 자신의 마법을 노린 이들을 향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오롯이 연방제국과 그 동맹국만을 향한 것인지.
그리고 그 정답은 명백히 후자였다.
‘연방제국과 에스테반. 그 사이에서 죽음이 몰아칠 것이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현자에 오른 그조차도 감히 보지 못했던 참극이 그곳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 주인공이 누가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으나, 적어도 그 사실만은 확실했다.
“과연 아버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왕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였다.
철컥-
테라스와 연회장을 잇는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부의 강한 조명을 등진 탓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왕자의 눈썹이 눈에 보일 정도로 꿈틀거렸다.
‘이곳에 스스럼없이 찾아왔다고?’
타국의 왕성이었기에 따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것은 현존하는 대마법사 중에도 가장 강한 마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로드 헤임달의 영역.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새어 나오는 마력에 무의식적으로 질겁하며 자리를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여유롭게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깟 마력쯤에는 영향조차 받지 않는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누구지.’
왕자의 의문이 이어진 그때였다.
“에스테반의 왕세자 전하께서 마기아의 손님들을 찾으십니다.”
“…….”
에스테반의 왕세자.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의 보좌관!’
왕자의 눈에 흥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
뚜벅- 뚜벅-
왕세자의 보좌관을 따라 움직인 그곳은 연회장과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였다.
아직 왕세자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초대의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세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기아의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마주 앉아 있는 왕세자와 두 사람이었다.
‘복권(復權)된 아렌델의 자이트 공작…… 그리고 왕세자군.’
역시 그랬나.
왕자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 두 국가 사이에서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겠네.’
기실 아렌델의 일은 마기아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에스테반의 대마법사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던 곳이 바로 거기였으니까.
물론 그러면서 야만족의 위기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고…….
‘상황을 생각하면 에스테반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가.’
결과적으로 귀결해 보자면 그런 이야기가 된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이거, 방심할 수가 없겠는데.’
불과 얼마 전에 귀족위에 올랐다고 알려진 남자. 고작 그런 평범한 보좌관 따위가 대마법사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것도 모자라, 이런 거물만 모여 있는 자리에 그대로 시립해 있다니.
마기아의 왕자는 흥미가 증폭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