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88화
차단 (2)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군요.”
“음?”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 고요함이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후작의 불안감과는 반대로, 며칠간은 왕실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후작이 말한 사건이란 그런 것이었다.
“허허,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가?”
“그것이…… 아무래도 지금까지 여러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분명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했기에…….”
“음, 많은 일이 있기는 있었지. 이해하네.”
후작은 발테르 공작의 너스레에 머리를 긁적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걱정은 기우에서 그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지금까지 후작이 얼마나 시달려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다소 불안감이 해소된 지금에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마 각하께서 그때의 국왕 전하와 함께하셨다면 저와 같은 반응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어찌나 즐거워 보이셨는지…….”
“그 정도로 불안한 눈빛을 하셨는가?”
“예. 그 순간에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흥미를 보이셨으니까요.”
“……확실히 그건 좀 위험하군.”
국왕이 1왕자였을 시절부터 보였던 행보들은, 분명 효율적이고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늘 위험부담과 무모함이라는 것들이 뒤따랐다.
특히나 순수하게 흥미를 보였다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과도 같았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하면 인제 그만 마음일랑 놓고 안심하는 게 어떤가? 그게 계속된다면, 도리어 자네의 수행원이 불안할 걸세.”
“허허,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결국 비도르 후작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마 이번만큼은 자신들도 편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건 어떤 것입니까?”
“음?”
그 순간 후작의 눈에 띈 것은, 국왕이 직접 결제한 것으로 보이는 서류였다.
하지만 공작은 이를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아, 저건 얼마 전에 내려온 호위 관련 예산안이네.”
“호위 관련이라면…… 혹 드워프입니까?”
“음. 전하께서 드워프들의 손을 빌려야 할 곳이 있다고 하셨기에 급히 편성해 보았네.”
“그렇군요.”
에스테반과 협력하는 드워프들은 누구보다 중요한 인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동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호위 기사를 차출하는 편이었다.
아마, 그에 관한 예산이 분명하리라.
‘……잠시만.’
문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비도르 후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최근에 드워프들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생겼던가?
“혹 예산안이 언제 내려왔는지 알 수 있습니까?”
“아마 이틀 전 즈음에 국왕 전하께서 주셨던 것으로 기억하네.”
“…….”
덜컥-!
“음?”
의자가 끌리는지 심장이 내려앉는지 모를 소리가 재무부에 울렸다.
그렇게 급히 자리에서 일어선 비도르 후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작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잠시 국왕 전하께 다녀오겠습니다.”
“어, 음…… 아, 알겠네.”
어리둥절하던 공작은 그 유령같이 질린 얼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심을 내뱉었다.
“그…… 조, 조심하게?”
“예.”
후작은 재빠르게 재무부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으아아아아악! 전하!”
비도르 후작의 비명이 국왕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어디를 가신 겁니까아아악!”
아무도 없는 공간에 시끄럽다고 핀잔을 놓은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 * *
“어우…… 제법 남부로 내려왔다 생각했는데, 어찌 수도보다 더 춥습니다?”
“겨울 바다니까.”
에스테반 남부의 해안 도시.
칼날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마차에서 내린 조지가 옷을 동여맸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예 마차로 기어들어 가 두꺼운 외투 하나를 더 꺼내왔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저 멀리에 놀고 있는 아이들을 주시하면서였다.
“가만히 있어도 추워 죽겠는데, 저기 보이는 꼬맹이들은 어찌 저렇게 잘 뛰어다닌답니까?”
“허약하고 게으른 네 녀석과 비교할 신체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게 추운 탓이지 제 탓입니까?”
“당연한 것을.”
“…….”
녀석이 삐죽 튀어나온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더 있어 봐야 좋은 말을 듣기 어려울 거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기사와 마차들은 다 도착했네요. 아마 합류하기도 한 드워프들도 며칠 내로 도착할 겁니다.”
“음.”
“그런데 이제 뭘 합니까?”
막상 따라오라니 따라오긴 했다지만, 아직 아무런 계획도 듣지 못한 채였다.
최소한의 호위와 드워프들만을 데리고 와서 무얼 할 수 있겠냐마는…….
“혹시 여기에 드워프들을 이용해서 성채라도 지으려는 생각은 아니죠?”
“그럴 리가.”
“아! 아니면 바다 위를 틀어막으렵니까? 놈들이 상륙할 땅을 남기지 않겠다…… 뭐, 이런 느낌으로.”
“조용히 하고 기다려라.”
“……쩝.”
나는 녀석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일축하며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왕실에서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영주 일행이 있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께서 직접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음.”
까무잡잡한 피부와 깡마른 몸매의 귀족.
그는 어찌나 급히 왔는지, 망토를 고정시키는 것도 잊어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일 정도였다.
물론 기별도 없이 국왕이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방문 자체가 두려운 것이겠지.’
귀족들에게 나는 조금의 불의에도 넘어가지 않는 심판관이나 다름없었다.
아수스를 베어 낸 일부터 이후에 2왕자파를 손수 숙청하기까지.
그러니 행여나 책이라도 잡힐까 두려워 급히 달려 나온 것이리라.
영주는 애써 그러한 기색을 감추며 깊이 몸을 숙였다.
“우, 우선 날도 추운데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럴 필요 없다.”
“예?”
“지금부터 기사들을 태울 선박과 항해술에 밝은 선장을 데리고 와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내 지시에 한참 머리를 굴리던 영주는 내 용건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반색했다.
적어도 책잡힐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하면 인근 연안을 둘러보시겠습니까? 그거라면 곧장 여객선을 수배해 보겠습니다.”
“항해술에 밝은 선장을 데리고 오라 했다.”
“저…… 항해술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대륙해와 폴른스타 군도의 지리에 밝은 자가 필요하다.”
“헉!”
그 말에 영주는 물론이고 그 뒤에 나열한 수행원들까지 경악을 참지 못했다.
“서, 설마 폴른스타 군도까지 움직이시렵니까?”
“그래.”
“아, 아니 됩니다! 폴른스타 군도는 해적들의 근거지입니다!”
남부 해협.
수백 개의 섬이 뭉친 그곳은 곳곳에 숨은 암초 따위가 위협적이기도 했으나, 선박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해적이었다.
괜히 무역을 위해 움직이는 상선들이 인근을 멀리 돌아가겠는가?
제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나다 해도 그들의 위협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소리다.
그 순간, 서늘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영주의 귓가로 울렸다.
“세 번 말하지 않는다. 데리고 와라.”
“……흡!”
영주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의 앞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즈, 즉시 선박을 수배해 오겠습니다.”
기사의 정점에 오른 소드마스터.
해적들 따위가 제아무리 몰려든다고 하더라도 그 옷깃을 스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리라.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즉시 수배하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영지의 기사들이 항구에서부터 몇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왕 전하. 저희는 전하를 폴른스타 군도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배의 선원입니다.”
“주변의 지리는 꿰뚫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좋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지시를 내렸다.
“기사들은 드워프들을 맞이할 인원만 남기고 배에 탑승한다.”
“충!”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항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곳까지 가는지 모르는 기사들이었지만, 이미 충심이 가득한 그들로서는 되물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그곳에 해적들이 대거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 상황에 납득하지 못한 인물 역시 존재했다.
“아니, 이대로 그냥 갑니까? 드워프들은 어쩌고요?”
“아직 놈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우선은 군도까지 움직이고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작전도 안 세우고 대뜸요? 적어도 뭐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작전이라…….”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녀석에게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으니 의문이 남을 법도 했지만…… 어쨌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전화에 휩싸일 에스테반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는 것이 내 의무니까.’
아까 보았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들. 그것이 적군의 군화에 짓밟히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작전명은 ‘해적’으로 하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게 또 무슨 황당한…….”
그렇게 황당하다는 듯 되물으려던 조지의 눈이 일순 휘어졌다.
“……작전명 ‘해적’, 말이지요?”
“그래, 해적.”
그와 동시에 내 입술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한 두 사람의 눈빛은, 누구 할 것 없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즐거운 노략질이 되겠군요.”
그것으로 모든 의문은 해소되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영주만 제외하고 말이다.
* * *
폴른스타 군도.
척박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수백 개의 섬에 둥지를 튼 해적들이었다.
하지만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마냥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그들도 의외로 잘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모든 해적을 규합하여 다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크흐흐, 이번 달 수입도 짭짤하군.”
황금으로 가득한 방.
곰처럼 커다란 사내가 그 속에서 누워 있다.
군도의 해적왕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있는 해적들이 도열했다.
“케케, 남부 대륙으로 향하던 상선을 노획한 것이 컸습니다.”
“금화를 잔뜩 싣고 있었지. 이번에는 남부 대륙 놈들의 상선이었던가?”
상선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정확히는 다급한 일정 탓에 조금이라도 빠른 길로 움직이려는 상선들이 목표였다.
한 번 털면 금화 백만 개가 우스울 정도로 쏟아지니, 굳이 연안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나갈 이유가 없던 것이다.
하물며 그들에게는 경쟁자나 적수라 할 것도 없었다.
“연방제국은 참 평등해. 적당히 금화를 쥐여 주면 어느 정도의 노략질은 눈감아 주니까.”
“크흐! 평등하기는 합죠.”
세금처럼 황실에 납부하는 금화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행동이 용인받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오히려 타국의 돈을 갈취하여 바치는 그들이 연방제국의 비호 아래에 놓인 형국. 그러니 무서울 게 없을 수밖에.
“그나저나 군도 주변으로 다가오는 배가 있다고 했던가?”
“옙, 에스테반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임다.”
“이왕이면 그것까지 털고 보내 주자고.”
“대장, 이번에도 죽이지는 않는 거죠?”
“당연하지.”
해적왕의 입이 헤벌쭉하게 열리며 금빛의 이빨들이 드러났다.
돈은 털되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인간이란 얼마든지 실수를 반복하는 족속이었으니까.
“급하면 직선 항로를 애용하기 마련이지. 명심해라, 지금의 손님이 또다시 미래의 손님이 될 수도 있다.”
“크흐흐, 역시 대장이십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
그렇게 해적들은 비릿한 미소들을 주고받았다.
덜컥!
그 순간 그들이 있던 방으로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소란이냐!”
“크, 큰일입니다!”
“……큰일?”
이 군도에 큰일이 있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한 그때였다.
콰과과과광!
“……!”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막강한 진동이 금화들을 무너뜨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해적왕은 다급히 누운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