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98화
전초전 (1)
지난 2년간 에스테반이 이루어 낸 것들. 그리고 내가 이루어 낸 것들.
그 모든 것들은 놈들과의 전쟁을 위한 초석이자 무기였다.
그런 미래가 오리라는 진실을 알기에 오직 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고, 또한 언제든지 그렇게 되어도 좋도록 거침없이 행동해 온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에스테반이 전쟁을 준비하던 것이 ‘마지못해서’라고 단정 지은 그 오만함이었다.
……마지못해서.
그 가정은, 자신들이 사냥꾼의 입장이라 확신했을 때나 나오는 자신감이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강자. 그리고 약자는 수비라는 유리한 입장에 기댈 수밖에 없었으므로.
허나 놈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저 놈들이 일으킬 전쟁을 대비하던 것이 아닌, 모든 조각이 모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에스테반이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고 마침내 놈들의 땅을 불사르고, 한 줌의 희망조차 짓밟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를…….
스릉-
맑은소리가 오직 흔들림 없는 마음을 대변하듯 검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먼 훗날. 기만과 후회로 얼룩져 놈들의 손아귀에 희롱당했던 왕실의 검, 에스텔라.
그리고 이제는 내 것이 된 왕국의 기개와 신념.
까가가가각!
“……!”
나는 그것을, 광활한 지도 위로 박아 넣었다.
“들어라.”
조지가 침묵하는 가운데.
투명한 보검의 날은 벽 속으로 완전히 몸을 감추었다.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그러곤 천천히 몸을 돌려,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는 조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 뒤에는 금 간 벽에 박힌 에스텔라가 보였다.
북부 대륙의 중심이 있는 위치를 찢고 들어간 그 찬란한 보검이.
“지금 이 순간부터, 연방제국이 우리의 적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라.”
동부로 집결시킨 본대.
북부 점령지에서 육성 중인 병력들.
마지막으로, 남부에 안배해 놓은 태양기사단의 전력까지.
“그리고 에스테반의 전 병력은 진군을 시작한다.”
이 보검은 언젠가 전쟁이 끝난 뒤에 내 손으로 뽑아낼 것이다.
머지않은 순간에 다가오게 될 영광의 역사에 말이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연방제국의 수도가 될 것이다.”
* * *
연방제국의 레인저 부대는 주로 정찰과 습격에 특화된 병과를 뜻했다.
주무장으로 이용하는 것은 활과 단검.
특히나 그 넓은 땅만큼이나 산지가 많은 연방제국에서는 유용하게 활용되는 고급 병과 중 하나였다.
그런 그들이 전운이 감도는 서부에 배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이봐, 술 가지고 왔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평화에 취해 그 본분을 잊은 지 오래였다.
“음? 술이라니, 그런 것을 이딴 산맥 어디에서…….”
“어디긴 어디야, 마을 쪽으로 잠시 나갔다 왔지.”
“미, 미쳤어?!”
태평하게 손에 든 술통을 보이는 동료의 태도에 병사는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마을 쪽이라니! 그, 그건 탈영이잖아!”
“에이, 호들갑 떨기는. 그게 무슨 탈영이야?”
“우리에게 허락된 행동반경은 이 산맥의 아래쪽까지라고! 마을이라면 여기에서 반나절 거리나 되잖아!”
그들이 지내는 곳은 국경지대를 잇는 산맥에 숨겨 있는 작은 초소.
당연히 서부 너머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는 그들에게, 마을로 나가는 것 따위의 단독 행동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료 병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병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이미 지휘관한테 허락도 받았으니까.”
“그게 정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애초에 마을까지 나가는 것을 지휘관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하, 하기야…… 그랬다면 지금쯤 소란이 벌어졌겠지.”
제아무리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병사였다.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의 활동에 특화된 레인저 부대.
기본적으로 산맥을 오가는 인원을 파악하는 것쯤은 간단하다는 소리였다.
“뭐, 애당초 마을까지 다녀오라 한 것도 지휘관이지만.”
“음?”
“그 대단한 귀족 나으리가 이런 산맥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냐고. 그것도 마땅한 전투 하나 없는 이 지루한 곳에.”
손에 든 술통을 탕탕 두드리던 동료 병사가 입꼬리를 비식 올렸다.
“적당한 즐길 거리 정도는 그쪽에도 필요하다는 뜻이지. 이게 바로 상부상조 아니겠어.”
“아아……!”
꿀꺽-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병사가 내려진 술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동료 병사는 막사 밖의 상황을 잠깐 살피다가, 이내 입구를 닫았다.
“그래도 이건 비밀이다? 일단은 구해 온 것이 이게 전부니까.”
“당연하지. 이런 귀한 것을 다른 녀석들이랑 나눠 마실 리가 없잖아.”
“크흐흐, 그렇긴 하지.”
어느덧 그들의 손에는 욕망을 대변하듯 거대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곳에 술이 가득 채워지기까지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 오늘은 순찰 일정도 없으니까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시자고!”
“그래!”
챙!
콰과과과광!
두 잔이 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정적이었던 산맥에 거짓말처럼 폭음이 몰아쳤다.
“……!”
“뭐야!”
앉은 엉덩이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폭음. 이 산맥에 그럴 만한 일이 생겼단 말인가!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막사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들의 눈으로 화염에 휩싸이고 있는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비추어졌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전방에 신원 미상의 기사 오십여 명이 다가오고 있다!”
“저, 적습이다!”
땡땡땡땡-!
다급히 울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퍼지기 무섭게, 적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초소에 울렸다.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말만 기다렸수다, 대장!”
“오랜만에 해 보는 인간사냥이냐!”
“오, 온다!”
번져나가는 화염.
그리고 그들의 몸을 두른 온통 붉은빛의 갑옷은 마치 사신의 방문을 연상케 했다.
물론 단순한 ‘연상’ 따위는 아니었다.
“막아!”
“오호라, 네놈은 단검이냐?”
“크윽…… 뭐, 뭐라고?”
“나도 단검인데, 마침 재미있겠네.”
“……!”
슈우우우욱!
서걱-
순식간에 쇄도한 기사의 손에서 섬광이 번뜩였다고 생각한 순간, 단검을 들고 저항하려던 레인저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공포에 질려 물러서는 동료 병사들.
반대로 기사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역수로 쥔 채,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실력이 이게 뭐냐? 정말로 ‘레인저’ 맞아?”
“네, 네놈들은 대체…….”
“음, 우리? 붉은 매 기사단이라고 하면 알려나?”
“……!”
붉은 매 기사단.
에스테반에서 신설되었다고 알려진 네 번째 왕실의 기사단이자, 용병 출신의 실력자들이 뭉친 전투집단……!
그 정체를 들은 레인저들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과연 기사들의 손에는 검 따위가 아닌 저마다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마, 맙소사! 설마 에스테반의 습격이었나!”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으아악!”
“살려 줘!”
“……!”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레인저들.
반대로 삽시간에 초소로 진입한 붉은 매 기사단은, 마치 학살하듯 그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 순간 중앙에 있는 막사에서 멋드러진 갑옷을 입은 귀족이 나타났다.
“끄윽…… 이게 무슨 소란이냐 대체!”
술에 취해 사리 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꼴이었지만, 명백히 그는 레인저들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보였다.
무기를 휘두르던 붉은 매 기사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호라, 저기 있었군.”
“얼씨구? 술을 잔뜩 퍼마신 것 같은데?”
“뭐, 뭐야 네놈들은!”
“우리? 우리는…….”
문득, 정체를 밝히려던 한 기사가 말을 멈추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말해 줘도 소용없으려나?”
“그게 무슨 뜻이…….”
“어차피 이 자리에서 죽을 놈들에게는 입만 아플 뿐이니까.”
“이, 이 새끼들이……!”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상황을 파악하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만연한 살기에 질려 술이 깬 지도 오래였다.
지휘관은 옆에 서 있던 병사를 바라보며 다급히 명령했다.
“지금 당장 본대와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해라! 초소와 가까운 거리이니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소용없을걸?”
“뭐라?”
여유롭게 조소를 자아내는 적 기사의 말에 지휘관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기사는 지시를 받은 병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도 비릿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
“아니지. 그쪽에는 그분께서 직접 가셨으니까 오히려 이쪽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이익……!”
그 조롱에 입술을 깨무는 지휘관.
그때, 명령을 받았던 병사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통신을 보냈다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지휘관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어서 지원 요청을 보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그, 그게…… 통신 마법구가 완전히 먹통입니다!”
“뭐라고!”
“아, 맞다. 애초에 주변의 통신을 장악했다 그랬었지?”
“…….”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깨달은 지휘관이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몸이 무언가에 막힌 듯 움직이질 않았다. 기세에 짓눌려 그랬다는 것이 아닌, 물리적으로 무언가에 막혔다는 뜻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가로막은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제기랄.”
시체.
그것은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병사의 몸뚱어리였다.
그의 낯빛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질려 있었다.
* * *
고오오-
싸늘한 적막과 살기가 흐르는 대전.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에스테반에서 무얼 했다고?”
“노, 놈들이 본국에서 행했던 작전들을 읊으며 공개적인 선전 포고를 걸어왔습니다.”
“그 후에.”
“서, 서부 국경지대에 배치했던 레인저들이 뚫리고 놈들의 본대가 제국으로 진입했습니다.”
“하.”
문득 황제는 궁금해졌다.
지금, 자신이 황당함에 웃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사태에 분노하고 있을까.
대전에 나열한 귀족들의 얼굴을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웃고 있는 동시에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군. 선전 포고를 걸어왔다고.”
연방제국에서 행한 작전들.
그것은 에스테반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것이나 내란을 조장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명분을 내세우고 선제타격의 정당함을 알리려는 의도였을 테지.
“물론 그 이상으로 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함도 있을 테고.”
“…….”
움찔-
그 차가운 음성에 귀족들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어진 찰나의 침묵이 마치 영겁 같다 느껴질 정도로.
“레인저들을 지휘하던 귀족은 분명 레세크 자작이었지.”
“그렇습니다.”
“놈의 일가족을 포함해서 그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뒷말을 잇지는 않았으나, 지시를 받은 귀족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하겠습니다.”
수색을 담당한 레인저들의 괴멸과 선전 포고. 그것은 연방제국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래이자.
“그리고 북부에 모아두었던 병력들을 즉시 이동시키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본격적인 전쟁을 알리는 최후의 전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