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01화
운명을 가르는 선택 (1)
투두두두두-!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달리는 오만의 병력.
북부의 대병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숫자였으나, 그들은 루크 공작의 손으로 직접 육성한 연방제국의 정예병이었다.
“……쯧.”
하나 그럼에도 루크 공작은 구겨진 표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전쟁이 벌어진 탓에 주도권을 휘둘리고 있다.’
본래라면 그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북부에 묶여 있던 병력만 있다면, 가소로운 저들의 땅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당초의 계획.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피해를 낳는 것.
제아무리 놈들의 병력이 연방제국과 비교하여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선제타격을 당한 이상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피해를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여봐라.”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루크 공작이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자, 대기하던 수하가 말을 움직여 마차의 옆으로 붙었다.
“병사들의 진군 속도를 올리라 하도록.”
“여기에서 더 빠르게 말씀이십니까?”
“마법을 이용한다면 지금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얼어붙은 도로와 병사들의 몸.
공작의 말대로. 이 상황이라면 마법사들의 힘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동 과정에서부터 마나를 사용하면 이후의 전투에서 마법사의 힘이 격감할 것입니다. 게다가 병사들의 피로 역시 만만치 않게 누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수하가 최대한 조심스러운 어투로 우려를 표했다.
이에 공작은 손을 휘저으며 불쾌함을 나타냈다.
“상관없다. 명령대로 해라.”
“하, 하지만 상대는 소드마스터를 포함한 3만의 군세인데…….”
“분명 명령대로 하라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즉시 본부를 이행하겠습니다!”
맹수처럼 섬뜩한 그 낮은 목소리에 수하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 전장에서 공작의 명령은 절대적. 그것이 옳은 판단이던 그른 판단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공작 역시 순간의 판단만으로 실책을 자아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검의 극의(極意)를 엿본 초인. 확실히 위협적인 존재지만, 그 한계는 정해져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들이 정녕 전장의 상황을 홀로 바꿀 정도의 저력이 있었다면 필시 전쟁은 초인이라는 존재만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니까.
“일신의 무력만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알렌 에스테반.
놈을 맞이할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한데 서부와의 통신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건가.”
공작은 혼잣말하는 것처럼 허공에 중얼거렸다.
언뜻 누구의 대답도 바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를 제외하면 텅 빈 마차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놈들 역시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방해 공작에도 심혈을 기울였을 테니 쉽사리 통신을 복구시키기는 어려울 테지요.”
“…….”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스스-
구석진 어둠 속에서 솟아난 검은 기운이, 천천히 공작의 앞으로 형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대마법사가 펼친 방해 공작이 아닌 이상에야, 저희 흑마법사들의 힘이라면 통신을 연결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그렇군.”
흑마법사들의 힘.
공작은 그 대답에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어느덧 나타난 형체는 허공으로 흩어진 뒤였다.
* * *
그렇게 서부와의 통신이 복구된 것은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시점.
과연 그 자신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공작 각하. 마법사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당장에라도 통신 연결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법구를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임시로 지어진 막사.
통신을 연결할 마법사가 들어오자, 공작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지시를 내렸다.
“우선 갈트 성에 연결하도록. 주변 성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다행히 아직 놈들이 그곳에 묶여 있다는 소리겠지.”
“예, 각하.”
우우웅!
치지지직- 철컥!
“성공했습니다.”
익숙한 소음.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마법구가 정상적인 신호를 연결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공작은 책상 위로 깍지 낀 양손을 얹은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는 루크 공작이다.”
-토, 통신을 주셔서 영광입니다, 각하! 갈트 성을 지키고 있는 아칸 자작입니다!
들려온 아첨에 불쾌해진 공작의 눈썹이 꿈틀댔다가, 이내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나마 그 목소리가 밝아 보이니 망정이었다.
“한시가 바쁘니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현재 진행 중인 수성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엇, 예? 수성의 상황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곳 갈트 성에서는 에스테반과의 공성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근의 성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하셨습니까?
“……뭐라고?”
갈트 성에서 공성전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놈들의 병력은 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공작은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어 갔다.
“자세히 말해라.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에스테반의 군대가 성을 우회하여 제국령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이에 인접한 세 성으로 파벌을 보내 대비케 하고, 현재 갈트 성의 병력은 후방을 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놈들이…… 갈트 성을 우회했다고?”
-그렇습니다.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맑았다.
마치 이 상황에서 아무런 의구심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공작의 가슴속에 불안감이 차오를 때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틀림없이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마 공성전의 준비 탓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럴 리가 없었다.
놈들이 방해 공작을 펼쳐 통신이 끊기지 않은 이상, 모든 상황은 황실과 공유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뜻이다!
“……파벌을 보낸 것이 언제지?”
-놈들이 우회를 결정한 당일에 즉각 파견하였습니다. 아직 그쪽 인근의 통신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었을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파벌이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스테반 놈들의 움직임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한껏 자신감을 뽐낸 통신 너머의 상대가 안심해도 좋다는 듯 말을 이었다.
-놈들의 본대에서 따로 나뉜 병력은 없는데다, 파벌들이 멀쩡하게 장소를 빠져나가는 것 역시 확인해 두었습니다. 게다가 국왕의 움직임은 죽 주시하고 있었으니, 절대 이상이 생겼을 리가 없습니다.
“…….”
-아마 혼란스러운 탓에 그럴 경황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한 번 직접 통신을 연결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하지.”
뚝-!
점차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다급함.
대답조차 듣지 않고 통신을 끊어 낸 공작이 마법사를 노려봤다.
“레넥 성에 통신을 연결해라. 당장.”
“예, 각하.”
우우우웅-!
명령을 받은 마법사가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갈트 성과 인접한 성은 모두 세 군데. 아마도 한 곳이 전투 중이라면, 나머지 두 곳은 정상적으로 통신이 연결되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첫 번째는 불발이었을까?
치지지지직-!
“…….”
아무리 기다려도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고, 루크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우회한 놈들의 본대는 아무래도 레넥 성을 타격한 모양이었다.
“다음.”
“……예, 각하.”
마법사가 눈치껏 인접한 다른 성으로 통신의 연결을 시도했다.
치지지지직-!
“…….”
“가, 각하…….”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마법구에 통신이 연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공작의 입술이 잘근 씹어졌고, 마법사는 황급히 마지막 세 번째 성으로의 통신을 연결했다.
그리고.
치지지직-
철컥-!
“……!”
기적과 같이 통신이 연결되었다.
통신이 연결된 것을 확인한 공작의 표정이 반색했다.
“여기는 루크 공작이다. 즉각 신분과 소속을 밝히고 상황을 보고하라.”
-어라…… 이거 뭔가 잘못 누른 것 같은데요?
-또 무슨 일입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통신용 마법구 같은데요? 진동 같은 것이 울리길래 봤더니…….
-통신?
“……어이, 거기. 지금 통신을 받는 것은 누구지?”
문득 통신의 내용에 위화감을 느낀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통신구의 너머에서는 조소가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라, 연방제국이 벌써 통신 방해를 뚫고 연락을 보냈다고? 제법인데?
“…….”
-게다가 방금 루크 공작이라 했던가? 이거, 영광스럽게도 거물이 연락을 주셨네.
“……너.”
-반갑수다. 나는 국왕의 직속 노예쯤 되는 헤그메스 자작이요. 아, 작위를 받기 이전에는 조지라 불렀지. 그쪽이 더 익숙하니까 그렇게 불러 주쇼.
아주 재미있네.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
마치 장난을 치는 듯한, 천박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까드득-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루크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점령당한 것은 레넥 성만이 아니었다.
인접한 세 개의 성 모두. 놈들은 우회의 소식이 전달되기 전에 이미 세 개의 성을 모두 점령한 것이다!
‘……파발이 움직였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가!
공작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세 개의 성부터 시작해서, 상황도 모르게 미련하게 실실 쪼개던 갈트 성주의 모습까지.
어느 하나 화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세 개의 성을 동시에 점령했지? 제아무리 소드마스터가 있다 해도 하루아침에 세 군데를 한꺼번에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불가능한 일? 아아, 아무래도 수성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도 아니었을 테고.
“그렇다면.”
-근데 미안하지만, 공작 양반. 자세한 건 나도 모릅디다.
“……뭐라고?”
-뭐, 나야 국왕이 내리는 지시에 따를 뿐이고. 명령을 내리는 입장 쪽은 생각해 본 적 없달까…….
“…….”
공작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음에도 상대는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대충 아는 것은 점령한 성들을 기점으로 가지처럼 뻗어 나가 서부를 먹어 치운다는 계획쯤이려나.
“거짓말이다. 감히 나를 상대로 뻔히 보이는 심리전을 하고 있군.”
-아니 뭐,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상대의 입꼬리가 웃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그쪽에서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 아닌지?
“…….”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분하지만 조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놈의 말대로였다.
한 곳도 아니고 세 곳을 동시에 잡아먹힌 이상, 뒤늦게 맞붙는다고 하여도 필연적으로 다른 두 곳은 자유롭게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두 병력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럴 리가.
오히려 방금 말했던 것처럼 공성전에 한 눈이 팔린 틈을 타서 서부의 다른 성을 타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야말로 미끼 작전. 말 그대로 알고도 당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 세 군데 모두를 동시에 습격하여 힘으로 제압하는 것뿐.
예상컨대, 그것은 놈들이 가장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 분명하리라.
“감히 이 나를 도발하려 드는가.”
-아니, 뭐,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니깐…….
“하지만 좋다. 원하는 대로 그 가소로운 도발에 응해 주지.”
-엥?
콰직-!
순수한 악력만으로 통신 마법구를 깨부순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수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병력을 세 그룹으로 나눈다.”
“……각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나 모조리 동등하게 나누는 것은 아니다.”
공작은 주머니 속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자그마한 크기의 알약을.
“놈들의 국왕이 있는 곳은 내가 직접 맡도록 하지.”
그것이 유일한 답이라면 놈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겠다.
“오천의 병력이면 충분하다.”
물론 그 결과는 놈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분노에 일그러진 공작의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