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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203화 (203/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03화

운명을 가르는 선택 (3)

그렇게 하룻밤이 순식간에 지나고, 마침내 예고한 당일이 찾아왔다.

금빛 갑옷을 챙겨 입고 나온 루크 공작은 성벽 너머에 보이는 병력을 지켜보며 낮게 물었다.

“놈들이 병력을 움직인 동향은 없겠지?”

“그렇습니다. 저들의 국왕 역시 움직이지 못했을 터입니다.”

“좋아.”

20여 년 만이던가?

그가 갑옷을 입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적어도 이 전투에서 그 의미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리라.

“전군은 들어라!”

척-!

루크 공작이 외치자, 그 앞으로 정렬한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올렸다.

“날이 밝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제국령을 침범한 저 무지렁이들에게 연방제국의 위엄을 알려 주도록 하겠다!”

“충!”

“진격하라!”

“진격!”

뿌우우우우-!

쿵-! 쿵-! 쿵-!

전투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연방제국의 병사들이 성벽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

전의에 불탄 그 모습은 고작 5천의 병력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매서웠다.

공작은 진격이 시작된 것을 확인하고는 크렐 자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진군의 피로를 녹이는 것도 좋지만 놈들이 대비할 시간을 줄 필요는 없겠지.”

“예, 각하. 그렇습니다.”

“다른 두 성에도 즉시 공성을 시작하라 알리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럇!”

두두두두-!

지시를 받은 크렐 자작이 말을 달려 떠나갔다.

그러는 사이, 오천의 병력이 떠난 뒤에도 남아 있던 지휘관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각하. 전단 운용의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모든 준비는 끝난 셈.

슬슬 자신도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 *

뿌우우우-!

“놈들이 몰려온다!”

누군가가 소리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성벽의 위쪽까지 닿는 진동이, 그들의 발치에 느껴졌으니까.

물론 고작 그딴 일에 당황할 에스테반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사거리의 이점을 이용한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벽의 위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원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성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기관 석궁이었다.

하지만 이 병기의 진가는 바로 수성을 할 때 있었다.

“좋아! 놈들이 사정거리에 들었다!”

“화약을 장전하라!”

“장전이 끝났습니다!”

“쏴라!”

퓨퓨퓨퓨퓩-!

하늘을 수놓는 은빛 꼬리들.

돌연 쏘아진 자그마한 화살들은 성벽의 높이를 더해 더욱 멀리 뻗어 나갔다.

사거리로만 비교하면 거의 기존 화살의 세 배 수준이었다.

“뭐야!’

“으아아악!”

“아직 성벽에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컥!”

졸지에 화살 세례에 당한 연방제국의 병사들이 공포에 질렸다.

다행히 거리가 거리인지라 죽은 병사는 적었으나, 문제는 부상자의 숫자였다.

“큭, 이게 놈들이 지닌 비장의 수인가?”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역정을 내던 한 지휘관이 바닥에 나뒹구는 병사를 보며 차갑게 뇌까렸다.

“이번 전략의 중요 포인트를 모르나? 이미 다른 두 곳도 진군을 시작했다. 그대로 진군해! 한 번에 끝내는 거다.”

“……알겠습니다.”

“쯧.”

전장에서 부상자는 동료의 발목을 잡는 변수였다. 실제로 일부 진형이 눈에 띄게 흐트러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때. 지휘관들은 그리 판단했다.

그래서 연방제국은 그들을 포기하고 빠른 진격을 택하였다.

“허.”

“……그냥 밀고 들어오는군요.”

이에 질린 것은 오히려 에스테반의 병력이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에 나타난 것은 혐오감이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당황하지 마라! 이렇게 움직일 것도 예상하고 훈련하지 않았나!”

“예상 범주 내다!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라!”

이쯤 되면 놈들 역시 깨달았으리라. 분당 수십 발의 화살을 쏘아내는 기관 석궁의 유일한 단점.

바로, 한 번 쏘아낸 원통은 장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을.

“정해진 순서대로 장전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슬슬 화살이 부족해지겠군. 나머지 인원들은 화살을 성벽 위로 이송하라!”

“예!”

기사들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을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연방제국의 병력은 순풍을 단 돛단배처럼 빠르게 진격해 왔다.

그렇게 놈들은 빠른 진군으로 이미 통상적인 화살의 사거리까지 접근하고는.

“이제 화살을 쏘아대는 궁수들을 노려라! 저쪽도 마음대로 견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퓨퓨퓨퓨퓩-!

장전을 마친 기관 석궁들이 차례로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 역시도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단!”

우우우웅-

팅팅팅팅!

“……!”

하늘에 나타난 반투명한 우윳빛의 막에 가로막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들.

그와 동시에 놈들의 후방에서 수십의 인영이 날아올랐다.

“마법사다!”

“놈들의 마법 전단이 나타났다!”

마땅한 마법사가 없었던 이전 공성전들과 다르게, 공작의 군대는 마법 전단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훈련된 마법사들이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작지 않은 수준.

“역시 놈들이 마법 전력을 숨기고 있었군.”

그 증거로 저들이 개입한 이후부터 기관 석궁은 마땅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도 마나가 무한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을 터다.”

“과연, 자신할 만했다는 소리군요. 그럼 저희도 대응을……!”

“됐습니다. 그냥 오는 거 냅두시죠.”

“……!”

그 순간, 상황을 정리하던 기사들 사이로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기사들이 고개를 돌리자,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오는 조지가 보였다.

“자작님……!”

“저들을 가만히 놔두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가 어때서요? 어차피 우리의 무기는 석궁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적들이 다가오기 전까지 최대한 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전략이다.

이를 진즉 포기해 버린다면, 그 숫자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

하지만 조지는 여전히 태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용도 없는 공격에 인력을 낭비하느니, 미리 적들과의 백병전을 준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석궁을 물리고 사다리를 견제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전장의 열기 속에서 조지의 외투가 펄럭였다.

“지금부터 전장의 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각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태함을 유지하던 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이상하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국왕만을 찾던 공작의 눈이 어느덧 성벽의 위쪽을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적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어째서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곁에 있던 기사가 묻자, 공작이 눈매를 좁히며 설명했다.

“전투가 벌어진 지 두 시간. 이 정도라면 제법 죽거나 다쳐야 정상이거늘, 놈들은 아직도 멀쩡해.”

“그거야 죽은 자리를 새로운 병력이 채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다. 저길 봐라.”

공작의 손가락이 성벽의 한편으로 닿았다.

그곳에는 사다리 아래로 끓는 기름을 뿌리는 에스테반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노리고 쏘아지는 누군가의 화살……!

기사는 오러를 끌어올리며 시력을 강화시켰다.

“……어깨에 맞았군요.”

“음.”

하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전투를 즉시 속행해도 괜찮을 수준의 스침.

그러나 그때, 병사는 돌연 뒤로 물러서더니 어딘가를 향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작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놈들은 부상을 입은 즉시 후방과 교대한다. 그때 동안 전선이 잠시 무너질 터인데,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가 있겠나?”

“그건…….”

“애초에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저 성에 있는 병력은 무척이나 적어. 구태여 작은 부상만으로 교대를 반복하는 것은 이상해.”

그건, 공작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비효율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공작은 손가락을 까닥여, 곁에 있던 마법사를 불러냈다.

“하늘로 날아올라서 내부를 살펴라.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예?”

“내 명령이 들리지 않았나?”

“아, 아닙니다!”

제아무리 숙련된 마법사라 하더라도, 동시에 여러 개의 마법을 사용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리고 공작이 내린 명령은 분명 탐지 마법을 쓰라는 것.

한데 하늘로 날아올라 탐지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신을 지켜 줄 방어막을 소환하지 못하게 된다.

즉, 공작의 지시는 죽을 각오로라도 수행하라는 자살 명령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아마 내가 죽는다면 다음 목표를 찾아 나설 것이다……!’

물론 일개 마법사로서는 그런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슈우우욱-!

마지못해 하늘로 날아오른 마법사가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노리고 쏘아진 에스테반의 화살.

놈들은 이 상황마저도 대비하고 있었다.

“흐어억!”

팅!

“……읏!”

하지만 다행히 동료 마법사가 이를 눈치채고 방어막을 걸어 주었다.

마법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에 공작의 곁으로 내려왔다.

“휴우,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의 부상병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말해 보도록.”

“……부상병들 말씀이십니까?”

마법사는 자신이 보았던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성벽의 위쪽으로 몰려 있었고, 부상병들은 성벽 아래의 막사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막사? 확실한가.”

“그, 그렇습니다.”

“…….”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구태여 성벽 위에서 응급처치하지 않고 내려갈 이유가 있나?’

그것도 교대한 부상병이…….

잠깐…… 부상병?

그 순간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사제였군.”

“예?”

“놈들이 사제를 이용해 치료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아……!”

전투가 벌어진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멀쩡해 보이는 병사들.

그리고 잦은 교대와 이해할 수 없는 부상병들의 이동 동선까지!

그거라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놈들은 동맹국인 신성제국에게 빌린 사제를 이곳까지 끌고 왔던 것이었다!

발칙한 놈들!

공작의 두 눈이 번뜩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놈들에게 지속력에서 밀리게 된다. 작전을 바꿔야겠군.’

지금까지는 녀석들의 국왕을 상대하기 위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으나.

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끌어내면 될 일이었다.

자신이 합류해서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분명 놈도 가만히 있지 못할 테지.

“따라와라. 놈들을 직접 상대하겠다.”

“알겠습니다.”

“이럇!”

공작이 선두에서 말을 달리자, 그 뒤를 이어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비켜라!”

“헛!”

전장을 가로지르는 십여 기의 말.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다급히 비켜나자 말이 달릴 만한 공간이 충분히 마련되었다.

그 순간, 루크 공작이 외쳤다.

“삼켜라!”

“충!”

그리고 기사들은 물론이고 루크 공작까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삼켜 냈다.

츠즈즈즈즈-!

그러자 그들의 갑옷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방제국의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알약!

개량의 개량을 거쳐 만들어 낸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일종의 각성제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으나, 상관없다.

‘……역시 대단하군. 이 힘이라면.’

공작은 자신의 안에서 요동치는 오러를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적이라곤 하나 소드마스터를 능가한 힘.

이 힘이라면 분명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놈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성벽을 넘는다! 놈들의 사제를 최우선적으로 척살하라!”

“충!”

콰직!

쐐애애액!

“뭐, 뭐야!”

“저건……!”

에스테반의 병사들이 이상을 느낀 찰나.

십여 명의 기사들은 이미 성벽을 도약해서 내부에 진입한 상태였다.

바닥에서부터 수십 미터를 날아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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