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04화
운명을 가르는 선택 (4)
슈우우욱-!
“허엇?!”
“이런!”
갑작스레 성벽 위로 도약한 십수 명의 기사들.
일순 기겁한 에스테반의 병사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을 지나쳐 달려가는 공작의 관심사는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어디냐.’
두 눈은 끊임없이 사방을 쫓는다.
마법사가 점지한 위치는 성벽의 아래쪽.
놈들이 보여 준 움직임과 마법사의 보고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곳에 신성제국의 사제들이 있을 터였다.
이 지루한 공성전의 구도를 단박에 바꾸어 줄 열쇠가!
‘……저기 있다!’
공작의 검게 물든 눈빛이 번뜩였다.
시선이 닿은 막사에서 자신의 신체를 강화한 힘과 상극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것을 깨달은 순간, 공작의 몸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죽어라!”
촤좌좌좍!
휘둘러진 롱소드가 벼락과 같은 속도로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불길한 검붉은빛의 오러가 막사를 향해 쇄도했다.
저곳을 그 누가 지키고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이 일격이라면, 그것이 누가 되었던지 형체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소멸시켜 버릴 수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광!!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신성제국의 사제들이 숨어 있던 막사가 힘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됐다! 이제 놈들의 지속력을 끊어 냈……!”
하지만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친 순간이었다.
공작은 묘한 이상을 느끼고 몸을 우뚝 세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그때.
“……뭐야.”
어느덧 자신을 따라오던 기사들의 기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었다.
공작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들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자네들…… 어째서…….”
침묵한 입과 두 눈. 그리고 잘린 목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검은 핏물.
그가 알던 기사들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알약의 개량이 끝난 모양이군.”
“……!”
휙-!
그리고 들려온 나지막한 음성에 공작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 마법사들의 연구거리가 늘어나겠는데.”
얼굴에 튄 오염된 핏물에도 개의치 않은 채. 여유롭게 청록빛의 검을 닦아 내는 남자에게로.
“……알렌 에스테반.”
꿀꺽.
그것은 침착함이었을까 싸늘함이었을까.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은 공작의 콧잔등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언제 기사들을 베어 낸 것이지……!’
인간인 이상 기척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움직임은 으레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그 공기조차 바람이라는 족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놈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말 그대로 기사들을 죽이고 배후까지 다가왔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라고 함은 간단했다.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일시적이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딘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강자라는 소리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공작의 얼굴로 흐르는 땀방울은 그런 이유였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그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 * *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들의 지휘 체계를 망가뜨리는 것. 더 나아가 적들의 수장을 사로잡는 것이다.
총사령관의 생존 여부가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칠뿐더러, 이미 총사령관이 사로잡혔을 정도라면 반전시키기 어려운 전황이라는 뜻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장이 직접 전진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상이 아닌 선택.
하지만 루크 공작이 성벽을 뛰어넘은 순간에도 마법 전단의 지휘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흐흐흐, 드디어 시작되었군.”
후우우웅!
전장의 열기가 얼굴을 가린 로브를 들추자, 공작의 명령에 따라 ‘지휘관’으로 일임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익숙한 이목구비의 형태.
그는 마차 내부에서 공작과 대화를 나누었던 흑마법사였다.
스윽-
흑마법사는 흩날리는 후드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으음, 이 진한 죽음의 기운…… 이래서 전장을 끊을 수 없지.”
그들의 학파는 철저하게 사기와 두려움을 힘으로 삼기를 목표로 해 왔다.
이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목표인 만큼 그들이 연방제국에 붙게 되는 것도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직장은 그만큼의 만족감을 남겨 주었다.
“우리의 비약도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수확만 할 차례군. 언제나 편해서 좋아.”
차곡차곡 쌓아가는 힘만큼 만족스러운 미소.
그런 그에게 후위를 맡은 병사가 다가왔다.
“마법사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화살은 이제 안 날라오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공작이라고 하는 비수가 충분히 먹히고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었다.
혼란과 장악을 유도하는 연방제국 마법 전단의 진정한 본분을.
“더 혼란시켜야겠군. 다른 이들을 모이게 해라. 공작님을 지원하러 간다!”
“알겠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자명했다. 이 짙은 사기(邪氣)를 신선할 때 최대한 흡수해서 경지를 높이는 것.
그래, 말로는 공작을 위했으나 동상이몽이었다.
우우우웅-!
마나를 움직인 마법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성벽의 너머로 다가가며 제각각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압!”
“파이어 볼!”
“흡!”
치지지지직-!
쿠구구궁!
“마법이다!”
성벽 위를 뒤엎는 형형색색의 마법들!
비록 과거와 다르게 그 위력을 발휘할 능력이 줄었다고는 해도, 군중을 제어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진가는 이런 전장 속에서 발휘된다.
하지만 그들이 상정하지 못한 것은, 내부에서 일어난 혼란은 일시에 그쳤다는 사실이었다.
“좋아! 즉각 대응하라!”
“궁수들은 마법사를 노려!”
“충!”
퓨퓨퓨퓽!
“헛?!”
“놈들이 어째서 이곳을 노릴 수 있는 것이냐!”
본래의 계획은 침입한 기사들이 진형을 무너뜨리고 공작이 국왕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사제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이득이었을 뿐.
하지만 이게 뭔가?
공작가의 기사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병사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진흙 속으로 발길을 들인 것은 마법사들이었던 것이었다.
“다, 다들 캐스팅을 취소하고 방어막을 펼쳐라!”
“시, 실드!”
우우우웅!
퍼퍼퍼퍽!
“끄아아악!”
“제기랄!”
다행히 늦지 않게 방어막을 펼친 마법사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화살 세례에 휘말려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연히 생존의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원체 높은 곳이기도 했거니와, 저 아래에 널린 인파 속에서 멀쩡할 리도 없었던 탓이다.
“큭!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마법 전단의 지휘관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내부에 침입한 기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물러서라!”
우선은 자신의 안전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소득도 없이 돌아가시렵니까?”
“뭣이?! 누구냐!”
“에이, 얼굴을 보면 알 거 아닙니까.”
“……네놈은!”
“자작님!”
그 순간 혼란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있던 조지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기사들의 갑옷은 혼탁한 먼지 속에서도 강렬한 적색으로 빛났다.
“붉은 매 기사단……!”
흑마법사가 이를 악물었다.
침입한 기사들을 상대해야 마땅한 저들이 이곳에 여유롭게 서 있다는 것은 기사들의 습격이 벌써 종식되었다는 뜻.
혹은, 애초에 그들이 움직일 정도로 큰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뜻.
……그리고 예상컨대. 둘 모두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제기랄! 공작이 놈들에게 당했구나!’
다급히 사방을 둘러보자 어느새 설치된 석궁들은 모두 마법사들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무력화됐다고 여겼거늘, 일부러 쏘지 않은 채 함정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당장이야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으니 큰 문제야 없을 터지만, 아마 마력이 떨어지는 즉시 놈들의 먹잇감이 되리라.
‘하지만 이대로 계속 화살을 막아 냈다가는 도망치는 것보다 마력이 소진되는 것이 빠르다!’
후우우웅-!
“지, 지휘관님?”
흑마법사는 위장을 위해 감추었던 흑마법의 힘을 개방하며 뒤로 날아올랐다.
이내 수상한 마력과 움직임을 감지한 마법사들이 당황했지만.
“헉!”
퓨퓨퓨퓽!
채채챙!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 내기 위해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흑마법사에게는 기회였다.
‘제길!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저들은 흔한 마법사고 자신은 명문이 끊기기 직전인 흑마법사!
적어도 한정된 병력인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애써 이 변수를 황제와 자신들의 수장에게 알린다는 변명 아래 움직였다.
“덕분에 놈들의 주력 무기를 알아냈으니 그 희생은 잊지 않아 주겠다.”
“지, 지휘관님?!”
“우리 연방제국과 흑마법사들의 초석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그게 무슨……!”
우우우웅!
또다시 집중된 마력이 검은 날개를 피워 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
화아아아앗-!
사방에서 몰아치는 순백의 빛.
마치 하늘에서 천사의 축복이 내려지는 것만 같은 그 광경에, 흐릿한 겨울의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흑마법사는 자신의 몸이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제기랄……!”
부정의 마력이 축복에 억눌린 채.
끝없이 추락하는 시야 속.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향해 모인 사제들의 두 손과.
“알렌 에스테반……!”
장난감처럼 찢어진 공작의 시신 위에서 여유롭게 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비릿한 웃음이었다.
* * *
길었던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이에 맞춰.
기다렸다는 듯 다른 두 성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제4 기사단장 브롬이 인사드립니다. 국왕 전하, 이쪽도 공성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음.”
공성전이 벌어졌던 세 개의 성 중, 놈들에게 빼앗긴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하물며 피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에서 처리한 마법사는 모두 열 명 남짓입니다.
“역시나 적은 숫자군.”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쪽에서 가지고 있는 기관 석궁을 막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했으나. 정작 그 마법 전단을 공작이 모조리 데려와 버렸기에 놈들에게는 대응 수단이 없었다.
에스테반 측의 승리가 온전히 내 공이라 생각했던 공작이었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이뤄 내지 못한 것이다.
“수고했다. 그쪽은 지금처럼 알아서 지키고 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 복수의 대상인 연방제국과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탓일까?
아니면 이제는 내게 신뢰라는 감정을 품게 된 탓일까.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고분고분해진 브롬이었다.
‘어느 쪽이든 편해서 좋군.’
툭-
나는 통신을 끊은 뒤, 하품을 찍찍 갈기고 있던 조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로써 신성제국도 본격적으로 흑마법사의 개입을 알아차렸겠군.”
“그렇게 대놓고 보여 줬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겠죠.”
“사제들의 반응은 어떻지?”
“뭐, 반응이야 뻔하잖습니까.”
나태하게 끔뻑여지던 조지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연방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태우고 있죠. 그것도 아주 활활.”
놈들에게 있어서 흑마법사는 필시 멸해야 할 절대 악(惡).
게다가 그것이 그들 ‘기에나’의 적인 연방제국과 붙었다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조만간 반가운 연락이 오려나.”
나는 지금쯤 다급하게 회의를 이어 가고 있을 신성제국의 대사제들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해결할 일은 해결해야겠지.
“때아닌 소동에 성녀가 분주하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