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06화
최후의 제안 (2)
일국의 지도자인 동시에 로에나의 대리인인 교황.
그가 관리하는 것은 비단 한 국가뿐만이 아닌, 북부 대륙 곳곳에 뻗어 나간 로에나의 교세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교황이 공식적인 석상에 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대사제의 직책에서 그를 돕는 이들이 있다고는 해도, 그 책임과 맡은 소명이 결코 적지 아니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로에나의 성도(聖徒)들은 수도에 몰려들고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 이번 사태에 대한 판결을 직접 내리겠다 하셨다고?!”
이례적으로 공식 석상에 오르는 교황. 그리고 그곳에서 발표될 성국의 방향성까지.
그 소식이 로에나에 속한 모든 신전으로 공표된 탓이다!
“역시나 성하께서 결단을 내리신 것인가!”
“마침내 성전이 벌어지겠구나!”
당연히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스스로의 황제를 신격화하던 배교자들이 드러낸 야욕.
기어코 악의 하수인들과 손을 잡고 사방을 위협하기 시작한 그들을 성국의 신민 모두가 단죄하기를 원했으므로.
……하지만 단 한 사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성녀님.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뗀 가르덴 대사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으려 했을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지 마.”
“…….”
스윽-
대사제는 잡은 문고리에서 말없이 손을 뗐다.
회의가 끝난 이후로 내내 이런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에스테반의 국왕으로부터 통신이 걸려 온 뒤, 선언이 있을 거라 직접 공표한 직후부터.
“……성녀님.”
물론 가르덴 대사제 역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아마 회의에 참여할 정도의 대사제라면, 한 번쯤 성국의 진실을 마주하고 후회나 참회를 안 해 본 이가 없을 것이다.
허나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
그게 성녀의 눈에는 냉정하게 생각될지 몰라도 그 누구도 교황의 뜻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결정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실은 때로 잔혹하다. 그리고 이를 숨겨서라도 지켜 내야 할 무언가가 있다.’
혹자에게는 쌓아 둔 부와 대사제라는 명예. 그리고 그 자신에게는 그것이 성국의 안위와 지금의 성녀일 뿐이었고.
“성녀님. 곧 교황 성하의 선언이 있을 예정입니다. 한데 성녀님께서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신민들이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
“언제든지 준비가 끝나면 움직이실 수 있도록 사제들을 불러 두겠습니다.”
“필요 없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질끈 눈을 감고 있던 대사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고 했다. 하지만 현 상황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비록 성녀와 신도들을 속이고 또다시 부정을 쌓게 되겠지만.
진실을 알리는 대가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힘없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가르덴 대사제. 제가 직접 설득해 보겠습니다.”
“성하?! 어째서 이곳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남자는, 지금쯤 성도들의 앞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대사제는 답지 않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십시오, 성하! 이제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의 성녀님을 설득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직 여유는 많습니다.”
“…….”
여유가 많다기에는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지금부터 다급하게 움직여도 모자랄 수준. 그럼에도 교황은 대사제를 지나쳐 걸어가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성녀님,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전지전능하신 로에나께서는 침묵만으로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허락하신 줄로 알고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익-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열린 문.
교황이 조심스레 내부로 들어가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성녀가 보였다.
어찌나 애처로운 모습인지, 교황은 난처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혹 사춘기의 딸을 둔 아비의 모습이 이럴까요?”
“……예?”
“저 역시도 안쓰러워서 마음이 썩 편치는 않군요.”
당황한 대사제의 표정.
교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녀에게 다가갔다.
“성녀님. 저 역시도 성녀님의 뜻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흑마법사 중에는 필시 무고한 이가 있을 수 있고, 말씀하신 온건파의 대부분은 그런 경우일 터입니다. 그것을 가엾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요.”
“…….”
“하지만 그렇기에 악(惡)은 대륙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더는 무고한 피해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건 궤변이에요!”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성녀가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물든 두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을 죽이겠다……! 어떻게든 희생을 만들지 않고자 하셨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순 없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미 흑마법사의 존재가 밖으로 드러난 이상. 이를 묵인한다면 성국의 위상이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확답한 교황은 지난날에 있었던 ‘그’와의 통신을 떠올렸다.
-온건파를 품고 있기에 멸살을 막아서려 한다…… 그대가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모르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교황께서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신성제국과 동맹이면서도 흑마법사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경악할 고백이었으나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 흑마법사를 남겨 두는 것은 성국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비록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온건파라 하더라도.
그는 분명 대사제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의 당위성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과오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라면 도리어 이전에 쌓아 온 신뢰마저 잃어버린다.
‘어째서 이전까지는 몰아세웠던 흑마법사의 존재를 지금은 묵인하는가.’
‘어째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것인가.’
이에 가장 먼저 의구심을 품는 것은 필시 성국의 신민들이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교황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그들을 놔두는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예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들겠다고?
정녕 허무맹랑하다 못해 헛소리로 치부할 이야기였다.
그것을 말한 상대가 에스테반의 국왕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뭐, 이를테면.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겠군요.
……하지만 통신이 끝난 지금.
“…….”
교황은 그것이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성녀님, 다르게 생각하면. 그들이 ‘악’의 세력이 아니라면 될 일입니다.”
“……네?”
“만일 성국이 악의 하수인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면 어떻겠습니까?”
“……!”
빙그레 웃는 교황의 말에, 성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것은 대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들을…… 로에나의 종으로 교화시켰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요.”
“가, 가정이라 해도 그건…….”
“예. 제아무리 가정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초에 그들이 적대의 대상인 성국에 회유될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충분한 당위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온건파와 강경파? 그들이 알 게 뭔가.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흑마법사는 모두 같은 절대 악이었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그들이 그저 연방제국에 협력하여 위협을 가해 온다는 사실만이 보일 뿐이다.
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정말로 성국이 흑마법사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면?”
설사 꾸며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성국과 로에나의 공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악의 세력을 단죄하기보다 더욱 어려운 일. 신민들은 그 위대한 업적에 감탄할 것이고, 교화에 성공한 흑마법사들은 성국을 돕는 적들의 대척점이 되어 줄 테지요.”
“그 말씀은…….”
“이미 에스테반이 관련된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입니다. 그들은 악을 심판하는 필요악. 단죄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
성녀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것을 돕는 것은 에스테반의 국왕. 그는 성국이 가지게 될 신앙심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들이 품은 온건파를 살리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교황은 빙그레 웃으며 놀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렌 에스테반.’
부쩍 그 이름을 부르는 상황이 많아졌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뿌리부터 썩은 거목을 고쳐낼 수 있는 것은 그 가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든 새로운 바람뿐이라는 사실을…….
“대사제님.”
“……부르셨습니까. 성하.”
교황은 대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서 성녀님께서 나설 준비를 끝마쳐주십시오.”
이 놀라운 소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이제, 결단을 내린 차례였다.
* * *
국왕의 배려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나 다름없던 흑마법사들.
그들은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숨어 지내던 곳은 태양 빛조차 들지 않는 심연 속.
그렇게 수십 년을 버티며 말라 죽어 가고 있었으므로.
그런 달라진 공기를 느낀 것은, 온건파를 이끄는 노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물밑에서 에스테반을 도우며 희망을 꽃피운다.’
적어도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에 그 누구보다도 만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었다.
……분명 그랬어야 할 터지만.
‘어째서…….’
주름진 볼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은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빛바래 버린 수염의 아래로 떨어져 그의 손에 들린 종이 위로 하염없이 바스러졌다.
“…….”
스윽-
노마법사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게 묻어 버린 얼룩이 지워질 리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모를 그 행동은 기어코 눈물 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마치 소중하게 간직하던 보물을 어루만지듯.
그 종이 위로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던 것이다.
[당일 진행된 교황 성하의 선언으로, 수십 년간 이어졌던 흑마법사 말살 작전이 온전히 종료되었음을 알려 드리오.]
[이제 성국의 창은 평화를 바라는 그대들에게 향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오.]
[뒤늦은 사죄로 그대들의 원한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또한 세간의 시선 역시 곧장 바뀌지는 않을 테요.]
[하나 성국은, 앞으로도 그대들이 있어야 할 장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조만간 두 숙적이 평화롭게 만날 일이 있었으면 좋겠소.]
……마침내 그들을 옮아 매던 족쇄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구원받았다.
“아아…….”
비통한 원혼과 절망감이라는.
그 덧없던 심연 속으로부터.
“나의 군주시여……!”
무릎을 꿇은 노마법사의 오른팔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 손에서부터, 빠르게 타오르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 심장과 생명을, 영원히 그대에게 바치겠나이다……!”
알렌 에스테반.
남자는 마침내 그 이름을 가슴속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