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14화
예언 (5)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었다.
예상외의 공격이라 해도 벌써 몇 차례나 공격을 허용했고, 아직 저들은 감춘 무기를 모두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허무하게 잃어버린 오만의 병력부터 시작해서 반절의 보급품까지…….
실상 숨겨 둔 계략이 더 이상 없다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다!
“각하. 규모에 비한다면 미미하오나, 계속 놔두다가는 가랑비에 옷자락이 젖듯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될 것입니다. 아직 아군은 첫 번째 성벽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
“……어서 결단을.”
까드득-
공작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요새를 최대한 빠르게 점령한다. 그들을 투입하도록.”
“알겠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겠다.”
* * *
챙! 챙! 챙!
“뚫어라! 어떻게든 뚫으라고!”
본능밖에 남지 않은 아비규환.
그보다 이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쏴라!”
퓨퓨퓨퓩!
“끄아아악!”
“미, 밀지 마!”
“놈들이 성벽을 기어오른다! 견제해!”
푹!
“커헉!”
콰직!
눈을 감았다 뜨면 죽음이 몰아쳤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쏟아지는 적군의 화살이 몸을 관통했다.
“주, 죽고 싶지 않아…….”
“물러서지 마라!”
서걱-!
“허업!”
“물러서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 진격해!”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본능에 충실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쯧, 징그럽게도 몰려드는군.”
성벽 위에서 상황을 조율하던 지휘관이 혀를 내둘렀다.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지?”
“예, 벌써 두 시간이 넘도록 전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직 줄어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가…….”
성벽 아래에는 제법 시체가 쌓였으나, 그것도 아직 남은 병력에 의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허나 무의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에스테반 병사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패색도, 질린 기색도 없었다.
“단지 몰려들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성벽이 있는 한 네놈들은 한 명도 이곳을 넘을 수 없을 테지.”
그 대단한 인해전술도 압도적인 무기가 있다면 이겨 낼 수 있다.
그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아아악-!
“……음?”
그 순간, 한 병사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곤 눈매를 좁혔다.
성벽의 아래쪽에서부터 모종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저, 저건……!”
이를 처음 감지한 병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놈들의 병력 일부가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뭐라고?!”
“소, 속도가 무척이나 빠릅니다!”
“……!”
지휘관이 황급히 성벽의 아래를 살폈다.
그곳에는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한눈에 봐도 재빠르게 기어오르는 수백의 인영들이 보였다.
하지만 당황의 원인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온몸을 꿰뚫은 화살들.
어느 하나 성한 곳 없는 육체.
초점 없는 공허한 눈빛.
“이런 비인간적인!”
처참한 모습으로 쌓여 있던 시체들이 어느 순간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에게는 정녕 도리라는 것이 없단 말인가!’
병사들은 그 참담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무는 것도 잠시.
“저것들이 성벽 위로 다다르기 전에 쓰러뜨려야 한다!”
“예!”
“일부는 후작님과 사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라!”
이미 망령이 되어 버린 시체들을 보며, 지휘관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퓨퓨퓨퓩-!
적군을 향하던 화살이 시체에 겨누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날아드는 화살 세례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제아무리 생명이 없는 언데드라 하더라도 육체 능력 그 자체를 상실하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미 가속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던 시체들은 병사들의 지척으로 다다른 뒤였다.
그것은 시체를 보낸 저들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흐하하하하하! 이것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닦은 우리 흑마법사들의 힘이다!”
우우우웅-!
거대한 공명음과 함께 시체들이 거뭇한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성벽의 주변을 뒤덮은 안개가 뭉치더니 하나의 마법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
어느덧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진 사기(邪氣).
“저건!”
멀찍이 후방에서 대기하던 사제들이 이변을 감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그리고 마법진 속에서 응축된 검은 기운이 퍼져 나갔다.
마침내 완성된 저들의 사술이 성벽의 주변을 뒤덮은 것이다!
“끄아악!”
“으윽, 몸이……!”
털썩-
마치 벌레가 내장을 파먹는 듯한 고통!
성벽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다리를 오르던 연방제국의 병력 역시 마찬가지.
“컥!”
철푸덕!
“크아아악!”
검은 기운의 영향 속에 있는 이들이라면 적군과 아군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말 그대로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크윽! 설마 자국의 병사들까지 미끼로 내던졌을 줄은!”
순식간에 마비된 첫 번째 성벽.
그러는 동안에도 안개는 계속해서 그 권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사제들의 지원은!”
“지, 지금 바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해만이 악화될 터!
“제길!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은 첫 번째 성벽을 포기하고 물러선다! 어서!”
결국 첫 번째 성벽을 맡은 지휘관이 병력을 물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기껏 얻어낸 기회를 연방제국은 놓치지 않았다.
“어딜!”
서걱-!
“커헉!”
안개 속에서 휘둘러진 날붙이에 쓰러지는 병사들.
어느새 성벽을 넘은 적군의 기사들이 후퇴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일선을 정리한 적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껏 설치한 함정을 망가뜨리려 드느냐!”
“……!”
마치 한 마리의 용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은 형태.
어둠과 대비된 그들의 금빛 갑옷은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짐짓 에스테반의 태양기사단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으나, 지휘관은 저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런! 연방제국 황제 직속의 기사단 금룡대다!”
병력 사이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그들이, 혼란을 틈타 성벽 위를 장악한 것이다!
* * *
어둠 속에 스며든 백 오십의 기사들이 끝내 성벽의 위를 장악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그런 그들의 몸은 흑마법의 영향 속에 있는 것치고는 너무도 멀쩡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들의 몸속으로 흐르는 기운은 이미 이곳을 장악한 힘과 동일한 성질이 되었으니까.
“단장님.”
척-
병사들을 처리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모였다.
“좋아, 놈들이 첫 번째 성벽을 포기하고 물러서는군.”
“그렇습니다. 이제 어찌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목적은 완수했지만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본대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도망치는 놈들을 마저 정리한다.”
“충!”
팟-!
그들을 모이게 만든 기사단장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목표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쯧.”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사단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수욱-!
“……!”
그 순간, 홀로 남은 그의 머리를 노리고 살기가 드리웠다.
다가오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기척!
콰직!
“큭!”
때문에 급히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해 냈음에도, 그의 투구는 충격으로 구겨졌다.
“무슨…….”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네놈은!”
투구 속에 가려진 기사단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검을 회수하며 거리를 재는 그 외견이 어쩐지 익숙했던 탓이었다.
“그 황금색 갑옷…… 그랬군, 태양기사단이 이곳에 있었나!”
“알아주니 영광이군. 왕실 직속 제2 기사단 부단장, 로데르 캘버다.”
“크하하핫!”
문득 황룡대의 기사단장이 광소를 터드렸다.
“……즐거워 보이는군.”
“당연한 이야기.”
로데르의 눈매가 좁혀졌으나,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다. 국왕과 함께 있어야 할 네놈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더라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달리 말하자면 왕국의 최정예 병력인 네놈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이곳을 지켜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즉,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대병력을 막아 낼 방도가 없었다는 뜻과도 같은 것.
그래. 마찬가지로, 첫 번째 성벽이 뚫려 버린 지금…….
“네놈들만 처리한다면, 이 요새는 모든 무기를 잃어버린 병신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지.”
“…….”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습과 이곳에 나타난 만용만은 칭찬해 주마.”
스릉-
그의 허리춤에서 금빛의 검이 뽑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투구에 가려진 기사단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면 정면공격에서는 과연 어떨지 궁금하군.”
탓-!
슈우욱!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린 것은, 검이 휘둘러진 것과 동시였다.
챙!!
“……!”
하지만 로데르는 이에 반응하고 막아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놀란 것은, 오히려 공격한 쪽이었다.
“마, 막아 냈다고? 이 일격을?”
“…….”
상대는 그 반동으로 두 발자국 밀려났으나, 그것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일 뿐.
되려 손이 저릿한 것은 자신이었다. 명백히 힘 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왜 그러지? 우리를 죽인다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는지?”
“…….”
그 이죽거림에 기사단장의 혈관이 두드러졌다.
“우연은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슈와아아악!
채챙!
챙!
이어지는 연격에도 로데르는 침착하게 반응했다.
과연 그 최강이라 불리는 태양기사단의 부단장다운 저력이었다.
“……큭.”
반대로 점차 조급해지는 것은, 공격을 하나도 적중시키지 못하는 기사단장 쪽이었다.
챙! 챙!
‘왜, 왜지?’
챙!
‘어떻게 내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이냐!’
필시 상대는 이 흑마법의 영향 속에서 몸이 갉아 먹히는 환통을 느끼고 있을 터.
하물며 제아무리 태양기사단의 부단장이라 하더라도 자신은 알약을 먹은 상태였다.
명백히 유리한 쪽은 정해져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놈이 막아 낼 방법은…….’
……어?
그 순간, 황룡대의 기사단장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 몸을 멈추었다.
그러자 상대가 무감정한 시선으로 물었다.
“왜? 무언가가 이상한가?”
“…….”
“당연하겠지.”
퍽!
서걱!
“커헉!”
순식간에 가슴팍으로 들어오는 어깨치기.
그리고 팔이 밀려난 틈을 타고 노려진 공격에, 기사단장은 이어진 일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챙그랑!
데구루루르-
어느덧 충격으로 날아간 투구.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로데르가 이죽거렸다.
“분명 몸을 강화시켜 주어야 했을 ‘알약’의 힘이 제대로 듣지 않는 상태일 테니까.”
“아, 알약의 존재를 네놈이 어떻게……!”
기사단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알약의 존재는 감추기 쉽게 설계되어 있었다.
놈들이 제아무리 루크 공작과 흑마법사를 죽였다 하더라도, 이미 체내에 흡수된 알약을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하지 않았다.
‘알약의 힘이 듣지 않는다! 어째서지?!’
황급히 몸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상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이나,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
그 순간.
후우우우웅!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에 기사단장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 제기랄! 또 뭐야!”
강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에서도. 그리고, 얼굴의 피부와 맞닿은 대기에서도.
마치 어딘가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차 흑마법의 기운이 옅어지고 있었다.
“무, 무슨 수를 쓴 것이냐! 설마 대마법사의 힘을…….”
“구태여 대답해 줄 의무는 없을 것 같군. 손님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불청객이니 말이야.”
“이런!”
기사단장은 단원들을 호출하기 위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기다릴 것도 없이.
점차 옅어지는 검은 안개 사이로 단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은 이미 죽은 시체였다.
황금빛의 갑주를 입은 백여 명의 기사.
눈앞의 남자, 로데르가 이끌고 왔을 태양기사단이, 이미 황룡대의 단원들을 모두 죽여 버렸던 것이었다.
후우우웅!
“……!”
그런 그들의 손에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힘을 앗아 간 기물이었다.
“서, 설마 저것이…….”
그제야 기사단장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저들이 연방제국이 숨겨 둔 비장의 카드인 알약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알약의 사용자들을 일망타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커흠! 기다리다가 잠이라도 들 뻔했구려.”
“……!”
그리고 상념을 깨듯,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은 굳은 목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마, 맙소사…….”
“기껏 일족이 세운 첫 번째 성벽을 인간들이 넘게 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곳에는 망치를 어깨에 들춰 맨 드워프가 있었다.
또한, 그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검은 기계가 있었다.
수십 대.
아니, 수백 배.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그것들이, 성벽의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