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223화
이곳에 내가 있노라 (2)
“없다.”
“…….”
내 냉혹한 확답에 브라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공허한 눈빛과 씁쓸함은 숨기지 못했는지,
“……그렇습니까.”
이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은 한결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공작성은 레스피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선전을 위해서라도 놈들이 그대로 남겨 둘 리는 없을 테지요.”
“실망했나. 반쪽밖에 남지 않은 공국의 모습에.”
“예,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장소를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입니다.”
잃어버렸던 것. 영영 되찾을 수 없었을 그 미래가 나와의 만남으로 변해 버렸다.
다만 명백히 이전의 상황보다는 나았다.
그저 용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며 이땅 저땅을 전전하던 그때의 상황보다는.
그 순간이었다.
“무엇이 문제지.”
“예?”
문득 들려온 싸늘한 내 목소리에 녀석이 시선을 들었다.
“……!”
그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없었던 냉혹한 감정이 내 눈빛 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고작 추억이 담긴 공작성 따위가 무너진 것? 그게 아니면 아무 걱정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때와 다르게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
“…….”
“착각하지 마라.”
놈은 이제 공국의 후계자가 아닌 왕의 이름으로 그곳을 탈환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공국이 아닌 레스피엘을 재건하게 될 것이다.
그래, 모든 상황은 이전과 똑같지 않았다.
고작 공작성 따위가 무너진 것으로 낙심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는 말이다!
“추억이 짓밟히고 퇴색되었다면 새로 만들어라. 한때의 상징이었던 장소가 무너졌다면 그곳을 네놈의 이름으로 뒤덮어라.”
“……!”
“누구도 이전 공작성의 존재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누구도 레스피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못하도록.”
나는 녀석의 눈빛에 마주 대고 확답했다.
“그것이 네놈을 믿고 따르게 될 백성들을 위한 보답이자 군주의 자질이다.”
“…….”
“너는 더는 용병대장 따위가 아니니 말이다.”
“전하…….”
브라함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떨리는 그 입술은 무척이나 묻고 싶은 대화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녀석은 그것을 삼켜 냈다.
“……남은 붉은 매 용병단. 아니, 전하를 따르기로 결심한 제4 기사단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지.”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제4 기사단의 기사단장 브롬.
그는 단원들의 진심을 다한 경례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4년이 지나갔다.
브롬이 떠나간 이후로도 붉은 매 기사단의 단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태양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로데르가 단장의 자리를 이어받고, 아르곤 기사단의 단장인 에드워드의 후임이 결정되었음에도 여전히 공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단장의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있었는데.
의외라면 의외일지, 그 인물은 고작 이 년 만에 부단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국왕의 제자.
……로엘이었다.
“부, 부단장님…….”
털썩!
왕실의 연병장을 달리던 기사들이 흙먼지 속에서 연달아 주저앉았다.
기사단의 기강을 생각하면 훈련 도중에 자리에 주저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전신을 감싼 풀 플레이트 아머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생각하면 애처롭지 않을 수 없었다.
“버, 벌써 삼십 바퀴째입니다…… 이러다가 기사들이 탈진한단 말입니다……!”
“……안 돼.”
어느덧 성숙해진 로엘은 중천에 뜬 태양을 주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직. 한 시간밖에. 안 지났어.”
“으어…….”
“앞으로. 한 시간이야.”
“커어억!”
그녀의 단호한 음성을 들은 기사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더 이상 몸을 세울 기운도 없었다.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눕고 싶었다.
‘부, 부단장만 아니었어도…… 크윽!’
하지만 기사들은 눈물을 삼키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권력의 중심인 국왕의 제자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인맥만으로 부단장의 자리를 따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실력으로.
압도적인 속도와 빈틈을 노리는 세검술. 그리고 특유의 막강한 마력으로 제4 기사단 전원으로의 인정을 받아 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된 훈련들.
그녀는 자신이 배운 그대로 훈련을 시작했고 그들은 어쩔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고된 훈련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태양 기사단에 비견 될 정도로 실력이 늘고 있으니 뭐라고는 못 하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어.’
‘역시 저분이 단장 자리를 가져가게 해서는 안 돼……!’
그것이 바로 단장의 자리가 공석으로 유지되고 있는 이유.
이미 자격은 충분했음에도 단원들이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저벅-
“이만하고 일어서십시오.”
“……!”
그때, 주저앉아 있던 그들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긋하지만 한없이 날카로운 말투. 그럼에도 그 속에 숨길 수 없이 자리한 권태.
“헛!”
“헤, 헤그메스 백작님!”
“……왜 훈련을 멈춘 거야.”
로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다가온 조지가 입술을 씰룩였다.
“그것을 제게 말씀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붉은 매 기사단의 부단장님.”
“…….”
“바로 모레가 그날입니다. 기사들이 컨디션을 유지하게끔 만들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제아무리 국왕의 직속 보좌관이자 백작급의 고위 귀족이라 하더라도, 왕실 기사단의 훈련 방침에 간섭하는 것은 월권행위였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면 말은 달랐다.
“이만 기사들을 돌려보내고 휴식시키십시오. 그리고 당신 역시도.”
“…….”
결국 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만, 뒤돌아 걸어가는 조지의 옷자락을 잡을 뿐이었다.
콱-
“무슨 일입니까.”
“……또 존댓말.”
“예?”
뒤를 돌아본 조지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매를 좁힌다.
“반말이…… 좋아.”
“…….”
로엘이 하고 싶은 말은, 이전처럼 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지로서는 억울할 따름이다. 단원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부단장급의 상사를 편히 하대했다가는, 기사단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기강이 무너져 버릴 테니까.
“하아.”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나.
슥- 슥-
결국 조지는 그 머리를 보이지 않게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로엘을 달랬다.
로엘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불만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여, 역시 헤그메스 백작님……!”
“죄 많은 남자야……!”
이를 본 기사들이 몰래 숙덕거리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 * *
똑똑!
“엘리. 준비는 다 되었니? 들어가도 되겠느냐.”
“네, 아빠.”
끼익-
비도르 공작은 드레스룸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의 꾸민 모습이 기대되는 것은.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전형적인 딸바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 엘리?”
“네?”
“그, 그 옷은 대체 뭐니…….”
그를 맞이한 것은 단아하고 고아한 드레스가 아닌,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딸아이의 모습이었다.
“아, 이거요?”
그런 공작의 충격 속.
엘리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분이라면 이런 의상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 그분? 그게 대체…….”
“헤그메스 백작님 말이에요.”
“허억!”
공작의 시야가 아득해지며 허공을 맴도는 별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히 겪어 본 현상…… 즉,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충격을 받고 기절해서는 안 되었다.
“얘, 얘야!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응? 왜요? 아빠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란 것을 알지 않니!”
눈을 부릅뜬 공작이 엘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알겠니? 조지는 안 된다.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그 녀석은 안 돼……!”
“…….”
“놈을 사위로 들이라고? 아니야…… 그건 정말 아니야…….”
눈앞에 딸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중얼거릴 정도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분명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화병으로 쓰러지게 만들 테지.
아니, 거기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놈은 결혼 생활도 지겹다며 도망갈 녀석이다!’
자신을 강제로 옭아매는 것에는 딱 질색하는 성격이다.
안 봐도 뻔한 일이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부디 갈아입으려무나. 하물며 이런 복장은 공식 석상에서 드러낼 만한 것이 아니야.”
“……알겠어요.”
“후우.”
결국 엘리는 공작의 성화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드레스룸을 나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로엘, 그 아이도 그렇고, 엘리까지. 녀석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려는가?
“나쁜 남자가 좋은 건가…….”
정녕 모를 일이었다.
* * *
다음 날.
정말로 드물게 일찍 일어난 조지는 왕궁의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흐음? 헤그메스 백작이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왕이시여.”
“허허,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툭툭-
선왕은 무척이나 살갑게 다가오며 조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왕관의 무게에서 벗어난 지도 벌써 5년에 가까운 시간.
그 긴 세월은, 근엄했던 당시의 모습을 한 꺼풀 벗겨 내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근데, 아닌 게 아니라 너무 편안해졌다.
“왕궁에는 새벽에 돌아오셨습니까.”
“음? 그렇게 보이는가?”
“예. 그렇습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조지의 시선이 빠르게 선왕의 옷차림을 훑었다.
누가 봐도 북부의 기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
각종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남국의 화려한 옷은, 그가 여행지에서 이제 막 도착했음을 시사했다.
아직도 여행의 여운이 빠지지 않은 것이다!
“허허, 이런. 옷을 갈아입는 것을 깜빡했군. 아무래도 마법으로 급히 도착해서 말일세.”
선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조지가 건넨 망토를 어깨 위로 둘렀다.
그러자 다시금 근엄했던 그때의 모습이 얼핏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일 시작되는 식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조지는 그렇게 답하며 복도의 창밖을 눈짓했다.
그곳에는 이른 아침부터 마무리 작업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드워프들이 보였다.
“그렇군.”
선왕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삼스럽다만 자네도 이제 어엿한 보좌관으로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음. 저 꼼꼼한 준비는 자네의 지시대로 행해진 것이겠지. 정녕 충성심이 깃들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일세.”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조지가 눈매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찡그렸다.
하지만 선왕은 그것을 발견하고도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내일은 대륙의 역사에서 단 한 번밖에 없을.
‘정말 잘 되었구나. 알렌.’
에스테반이 제국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날이었으니까.
* * *
“전하,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조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통로의 끝으로 이어져 있는 환한 빛무리.
저곳을 넘으면 비로소 나는 백성들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였다.
“…….”
뚜벅- 뚜벅-
말없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감회가 새롭게 와닿는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다.
이 순간은 나 역시도 기다려 왔던 것이고, 내 행보가 가리키는 마침표가 될 터였으니.
후우욱!
곧 외부의 공기가 피부로 와닿고, 태양 빛 아래 그려진 광경이 펼쳐졌다.
────!!
“와아아아아아!”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환호성.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려든 인파.
귀빈의 자리를 채운 것은 신성제국의 성녀와 아렌델의 왕세자를 비롯한 각국의 중책들이었고.
마침내 그 끝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아직도 건장함을 과시하듯, 육중한 갑주를 챙겨 입으신 아버님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루어 낸 나의 제국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내 자취가 남아 숨 쉬는 한.
에스테반의 의지는 영원히 이 땅 위에 서게 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갔다.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