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제1장 김필도
장계상은 앞에 서 있는 청년을 훑어보았다.
검정 정장에 옅은 블루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은회색 실크 넥타이를 맸다. 넥타이 중간쯤에 핀을 꽂았는데, 핀에 박힌 녹색 에메랄드가 광채를 뿌린다.
셔츠 소매 아래로 반쯤 비어져 나온 검정 가죽 줄 시계와, 댄디한 옥스퍼드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두른 게 얼마쯤 될까. 장계상의 머릿속 계산기가 작동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에 넥타이핀은 불가리, 시계는 브레게 레벨 정도 되겠지. 구두야 아무리 비싸도 다른 거에 비하면 껌 값이니 패스. 명품도 명품 나름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명품으로 도배하게 되면 천박해 보이기가 쉬운데 녀석은 마치 어느 명품 숍 윈도 속에서 빠져나온 마네킹처럼 참으로 어울린다.
185센티미터가량 되는 훤칠한 키와 군살이 전혀 없는 몸매 그리고 반듯한 이목구비와 귀티 나게 생긴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장계상은 생각한다.
“김필도입니다!”
자신을 김필도라고 소개한 청년은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장계상은 명함을 받아 들었다.
상호는 대불종합개발, 직함은 기획실장이다.
“전형적인 조폭 명함이구나.”
장계상은 명함을 내려놓고 김필도를 보았다.
그리고 인상착의를 머리에 각인시키듯 천천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저런 멋진 녀석에게는 50년대나 60년대에 지어졌을 법한 이름인 필도가 아니라 좀 더 현대적이고 시크한, 예를 들면 류현이나 진우, 또는 시우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데 김필도라…….
“원래는 필돈으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필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런데 너무 노골적이라 ‘ㄴ’받침을 빼서 필도가 된 겁니다. 여동생이 지어 준 이름이라 촌스럽지만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쉽게 기억되는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장계상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김필도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긴 그런 멋진 얼굴을 한 녀석이 김필돕니다, 하면 머릿속에 팍팍 꽂히겠구나. 앉아라!”
장계상은 자리를 권했다.
김필도는 장계상 건너편으로 앉았다.
“커피, 아니면 술?”
“근무 중이니까 커피로 하겠습니다.”
짝!
장계상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안쪽 문이 열리더니 미니스커트를 걸친 아가씨가 나왔다.
“커피 두 잔만 내와.”
“커피는 어떻게 하죠?”
“난 다방커피, 넌?”
“설탕, 크림 없이 커피만.”
김필도는 짧게 말했다.
“알았어요.”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무실 안에 진한 커피 향이 흘렀다.
“요즘 너희 대불파에서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말이 들리더구나.”
장계상은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대불파가 아니고 대불종합개발입니다, 회장님.”
“이름을 바꾼다고 본성이 바뀔 거라고 보느냐?”
“우리 본성이라면……?”
“조폭 말이다.”
“잘못 보셨습니다. 우리 대불종합개발은 불법적인 사업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합법적인 사업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협박하지도 않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한 적도 없습니다.”
“바다 이야기 같은 성인 오락은 합법적인 사업이 아닐 텐데?”
“바다 이야기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은 합법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엔 합법이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사행성과 중독성이 지적돼 불법으로 판결났고, 우린 바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할 게 없으니까 내 영역을 넘보는 게냐?”
“우리가 오픈하고 있는 클럽은 회장님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른데 내 가게 매출이 30퍼센트나 준단 말이냐?”
“그건 내가 아니라 회장님 부하 직원에게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내가 나이트클럽 사업에 발을 들인 게 언제인지 아느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지금부터 50년 전이다.”
장계상은 스스로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살아온 과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됐다. 그 후로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돈을 배웠다.
백악관 나이트.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고아원 원장선생님 지갑에서 훔친 돈을 가지고 박×스를 사들고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갔다.
한 달 전부터 기도와 웨이터 형님들에게 작업을 해두었던 터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굳이 테이블을 돌며 사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화장실 앞에 서서 박×스를 내밀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장님 사모님들은 얼마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폐를 한 장씩 내밀었다.
그때 깨달았다. 바로 이런 장사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35년 후 백악관 나이트클럽의 주인이 됐다.
승승장구란 장계상을 위해 생겨난 말이었다.
아니 살다 보면 운대가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이 맞았다. 무슨 일이 됐건 손대는 족족 상한가를 쳤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마이더스의 손이다.
백악관 나이트클럽을 바탕으로 다른 나이트클럽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의 인수는 필연적으로 주먹들이 엮일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가장 강했던 연안파와 손을 잡기에 이른다.
연안파는 최태성과 정중수 두 사람이 두목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중 최태성을 택했다. 지분은 7 대 3으로 나눴다.
자금과 힘의 결합은 완벽했다.
거의 반년에 하나씩 나이트클럽이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이 흘렀을 때 장계상의 별명은 ‘마이더스 손’에서 ‘밤의 대부’로 바뀌었다.
30개의 나이트클럽을 소유하고 대부분의 주먹을 거느렸다.
문제가 생긴 건 1년 전이다.
나이트클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업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미친 작자가 돈지랄한다고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트클럽의 성공 여부는 부킹을 담당하는 웨이터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웨이터만 확실하게 관리하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매출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원인을 조사했다. 놀랍게도 나이트클럽 매출의 30퍼센트를 잡아먹은 것은 같은 업종의 클럽이었다.
도끼눈을 뜨고 클럽을 오픈한 자들을 파헤쳤다. 그러다가 클럽의 배후에 십여 년 동안 연안파의 최대 맞수였던 대불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불파의 두목 정중수는 과거 연안파 두목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중수는 클럽 같은 고차원적인 놀이 문화를 만들어 낼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다른 자가 있을 거란 생각에 계속 조사를 시켰다. 그리고 학사(學士)라는 별명을 가진 자를 끄집어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대불종합개발은 회장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클럽 또한 회장님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기존 업소를 인수해서 오픈을 했고요.”
“난 너희들이 오픈한 업소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나의 관심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내 돈이다.”
“우리 대불종합개발 회장님께서는 다툼을 바라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문화인답게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턱!
장계상은 옆에 두었던 파일 하나를 김필도 앞으로 던졌다.
“뭡니까?”
김필도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장계상을 보았다.
“리퍼블릭의 운영권이다.”
“리퍼블릭의 운영권을 왜 내게 주시는 겁니까?”
“리퍼블릭은 매월 20억의 매출이 나오는 최고 대어다.”
“1년이면 2백40억이군요.”
“마진은 30퍼센트가량 나온다. 그걸 네게 주겠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전 정 회장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굳이 21세기 문화인이라는 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프로는 자기 몸값에 따라 움직인다고 들었다. 내가 내놓은 건 지금 네가 받고 있는 연봉의 3배가 넘는다.”
“아직 나에 대해서 조사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네가 정중수 밑에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냐?”
“사람이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억류하고 있는 제 아이들은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이걸 더 얹겠다.”
장계상은 파일 하나를 쌓아 올렸다.
그것은 리퍼블릭과 비슷한 규모인 리도 나이트클럽의 소유권이었다.
“무엇을 주셔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못 받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의리도 지켜야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걸 보니까 아직 멀었구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딱 한 번만 제안한다, 김필도.”
장계상의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오늘 제안 항상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그럼.”
김필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김필도는 복도 끝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주변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사시미.”
오른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키가 170센티미터 남짓한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복도 벽에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다.
김필도는 가볍게 손을 올려 보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작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윤치성이었다.
김필도와 윤치성의 인연은 다섯 살 때 체육관에서 시작됐다. 김필도는 체육관에서 먹고 자며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였고, 윤치성은 격투기를 배우러 온 회원이었다. 우연히 윤치성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면서 친해져 함께 대불파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불파에서 김필도는 사시미란 별명으로, 윤치성은 작두라는 별명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에 진학하는 사이에 대불파를 나가 연안파로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보게 된 것이다.
“회장님께서 널 좋게 보신 모양이더라.”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김필도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너와 난 환상의 콤비였다.”
“네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랬겠지.”
“내가 대불파를 나온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구나.”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필도, 너도 나와라.”
“그럴 수 없다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결국 너도 나처럼 버려질 거다.”
“그거 아냐?”
“뭘 말이냐?”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 말이야.”
김필도는 씁쓸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넌 죽어.”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지.”
“우리 연안파로 오지 않아도 좋아. 대불파에서만이라도 나와라.”
“다음에 술이나 한잔하자.”
김필도는 으레 하는 인사말을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류 봉투를 든 사내가 내렸다. 사내는 장계상 회장의 비서 조성욱이었다.
조성욱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자 김필도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그때까지 윤치성은 김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필도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 기억나?”
“필녀?”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윤치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벌써 11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필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필녀를 본 것은 필도를 알고 난 3년 후였다.
녀석은 필녀라는 동생과 단둘이서 살고 있었다.
처음 필녀를 보았을 때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요정인줄 알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예뻐지는 필녀를 보며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던지. 필녀에 대한 짝사랑은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열세 살 때까지 계속됐다.
필녀가 열세 살 되던 해 생일날 케이크를 사들고 필도와 함께 집으로 갔다. 그런데 필녀는 집 안에 없었다.
밤새도록 그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필녀는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고, 뒷산의 작은 저수지에서 필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경찰은 자살로 처리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자살이 아니었어.”
“무슨 소리냐?”
“필녀는 자살로 죽은 게 아니라 겁탈 뒤 살해당해 저수지로 던져졌던 거야.”
“다, 다시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