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화 (2/225)

# 2

윤치성은 황급히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오지 마!”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자, 자세히 말해 봐!”

윤치성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누구보다 김필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표정으로 보건대 김필도는 필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낸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그리고 곧 기회가 올 거야.”

“무슨 기회?”

“기회를 놓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야! 필도!”

“그 겨울 치성이 네가 나와 필녀에게 줬던 그 주먹밥 말이야.”

“필도야!”

윤치성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아직 먹어 보지 못했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수십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먹어도 결코 흙이 잔뜩 묻은 그 주먹밥보다 못하더라.”

김필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버튼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필도야!”

윤치성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윤치성은 멍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바라보았다.

김필도가 대불파에 붙어 있는 이유가 필녀의 죽음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기회를 잡으라는 말!

윤치성은 회장실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장계상은 방금 안으로 들어온 조성욱으로부터 건네받은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A4 용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그것은 김필도의 신상 명세서였다.

-고아원을 탈출하여 여동생과 함께 체육관에서 생활. 그곳에서 가라테를 비롯한 각종 격투기를 접하게 되었음.

체육관 관장이 대불파의 두목이었던 정중수와 친분이 있어 소개를 시켜 줌.

-열 살 때부터 대불파에서 생활함. 열다섯 살 때까지 학교에 가 본 적도 없음.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는 걸 알아차린 정중수가 공부를 시킴.

2년 만에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

-열아홉 살 때 S대 입학.

수석 졸업.

-가라테, 유도 유단자며 특히 검도에서 강점을 보임.

“이 정도면 거의 천재구나.”

장계상은 감탄조로 말했다.

“아마 S대 나온 최초의 조폭일 겁니다.”

“그렇다면 정중수 그놈이 김필도의 머리를 알아보고 대학교육까지 시켰다는 건데… 그동안 성과는 좀 있었느냐?”

“클럽 말고도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녀석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바다 이야기라는 성인 오락실이었습니다. 모두 망설이고 있을 때 50개를 차려서 거금을 벌어들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성인 오락실이 불법으로 판정 나기 직전에 최고가로 팔아넘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대불파가 보유하고 있던 오락실의 개수는 총 1백 개였습니다.”

“그럼 오락실 하나에 8억씩만 잡아도 8백 억이구나.”

“그 다음에 뛰어든 곳이 클럽 사업과 아파트 건설 그리고 주식입니다.”

“아파트와 주식은 미친 듯이 오르는 중이고, 클럽은 야금야금 우리 나이트클럽을 잡아먹고 있군.”

“그렇습니다. 놈은 전혀 불법적인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다가도 불법임이 밝혀지면 금세 정리해 버립니다.”

“놈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느냐?”

“몇 년 안에 우린 설 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너 대학 어디 나왔지?”

“하버드 출신입니다.”

“정말이야?”

“전 학력위조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럼 S대 출신이 그렇게 사업을 하는 동안 넌 뭐 했냐?”

“그놈이 하는 건 사업이 아니라 도박에 더 가깝습니다. 성공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업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들이나 하는 겁니다. 회장님처럼 연 매출이 4천 억에 육박하는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할 만한 사업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사업을 하면 좋겠느냐?”

“회장님이 거느린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서 가장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은 대부업입니다.”

“사채놀이를 하란 말이냐?”

“사채놀이는 옛말이고 지금은 합법적인 사채업이 가능한 시댑니다.”

“나보고 대부업체 대표이사 명함을 가지고 다니라는 거냐?”

“케이블 TV 보십니까?”

“난 테레비 같은 거 안 본다.”

“케이블 TV 광고 대부분이 대부업체 광곱니다. 이젠 대부업체는 음지 사업이 아닙니다. 우선 작게 시작해서…….”

“푼돈 벌 사업이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일단 대부업체 건은 기안서 작성해서 올려라. 그리고 가서 최 회장 불러와!”

“알겠습니다, 회장님.”

조성욱이 나가고 30분 후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각진 얼굴에 강렬한 포스를 풍기는 이자가 연안파의 보스이자 최 회장으로 불리는 최태성이었다.

“아무래도 놈을 제거해야겠네, 최 회장.”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린가?”

“김필도 말이네.”

“매수가 안 되는 모양이군.”

최태성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리퍼블릭과 리도 운영권을 준다고 해도 싫다네.”

“연간 백 억이 넘는 돈을 버는데도 싫다고?”

“그렇네.”

“제 무덤을 파는구먼.”

“그래서 놈이 판 무덤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네.”

“놈을 그대로 두면 우리가 먹힌다는 결론을 내린 건가?”

“우리뿐만 아니라 정중수 그놈도 먹히네.”

“혹시 정 회장과도…….”

최태성은 장계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계상은 협상의 귀재이고 흥정의 도사다. 문득 그가 정중수와 모종의 딜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중수 그놈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네. 일단 자넨 놈을 묻을 준비를 하게.”

“당장 감시를 시작해야겠군.”

“그래 주게. 그리고 이번 작전에서는 윤치성을 빼게.”

“그렇게 하지.”

최태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막 밖으로 나가려던 최태성이 장계상을 돌아보았다.

“뭔가.”

“11년 전에 했던 맹세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말이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장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 왔던 정중수와 갈라서게 된 사건이 터진 그날. 아직도 생생하다.

장계상과 최태성, 정중수는 아가씨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셨다.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술 속에는 상당량의 마약이 들어 있었다.

약에 취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정중수가 새로운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필름이 끊겼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나이 어린 소녀가 발가벗겨진 채 국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최태성은 그 여자아이를 살피고 있었고.

직감적으로 사고를 쳤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명 혼자 한 건 아닐 거라고 장계상은 생각했다. 하지만 최태성과 정중수가 먼저 깨어 있어 혼자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뒤처리는 최태성이 했다. 그런 최태성에게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최태성이 말한 맹세란 그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네.”

“물론이네, 최 회장. 자네가 날 배신하기 전까지는 기억하고 있을 거네. 그런데…….”

“말하게.”

“그 계집아이는 누구였는가?”

“김필도의 여동생이었네.”

“그런데 정중수가 그 아이를 왜 데려온 건가?”

“성공하면 자네를 파멸로 이끌 수 있고,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김필도에게 말하면 언젠가는 자네를 없애려 들 테니까.”

“그러니까 미성년자 강간 살해 혐의로 날 교도소에 처넣으려고 했단 말이구먼.”

최태성은 쓰게 웃었다.

“마약 복용 혐의에 그동안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 몇 가지까지 더하면 무기징역은 받아낼 수 있었을 거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 파트너로 정중수가 아닌 자네를 선택했으니까.”

“그래서 정중수가 떠난 거였구먼.”

“아무튼 잊지 말게.”

최태성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윤치성이 다가왔다.

“나무꾼은 어디 있지?”

최태성이 물었다.

“일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

“무슨 일 있습니까?”

“윤치성!”

최태성은 윤치성을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윤치성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김필도가 다녀간 뒤라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늘 네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

최태성은 차갑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들였다. 곧 그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윤치성은 엘리베이터 1층 버튼에 불이 들어오자 비로소 상체를 들었다. 그러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윤치성이 팀장으로 있는 레드 팀은 장계상 회장의 경호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회장실 바로 옆이 사무실이다. 사무실 안에는 레드 팀의 막내인 이동수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 줘.”

윤치성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이동수는 커피 머신에 캡슐을 끼우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갈색 액체가 에스프레소 잔으로 떨어졌다. 향긋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자 골드 크레마가 생겨났다.

이동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모처럼 최고의 커피가 뽑아진 듯했다.

이동수는 커피 잔을 빼내 뻬르쉐 각설탕을 하나 집어넣고 커피 스푼으로 가볍게 저은 후 윤치성에게 내밀었다.

“동수 너 일 하나 해야겠다.”

윤치성은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

“어떤 일입니까?”

“나무꾼 형님 근황을 알아야겠다.”

“나무꾼 형님 말입니까?”

이동수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근황을 알고 싶다는 건 곧 감시를 하라는 의미다.

조직의 형님을 감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최소한 팔다리 힘줄 정도 잃는 건 기본이고, 심하면 이름 모를 야산에 묻힌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 회장님께서 나무꾼 형님께 어떤 일을 시키는 것 같은데 우리만 배제되는 것 같아서 그래. 별다른 뜻 없으니까 슬쩍 알아봐.”

“전 공연히… 걱정 마십시오, 형님.”

이동수는 안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김치성은 이동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나무꾼 박두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승용차 1대와 승합차 5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김필도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보통 엘리베이터보다 약간 빠른 속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비밀 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40평 남짓한 널따란 원룸이 그를 반겼다.

김필도는 불을 켜고 오디오 전원을 올렸다. 마크레빈슨 23.5 프리와 파워 앰프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고, 와디아 850 시디플레이어가 구동 준비를 한다.

버튼을 누르고 엔야의 시디를 올렸다.

시디는 오디오를 구성해 준 업자가 주고 간 것이었다.

곧 육중한 크기의 JBL4343 스피커가 깊고 맑은 소리를 토해 낸다. 음악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엔딩 장면에 삽입됐던 와일드 차일드(Wild Child)였다.

실내 곳곳에 음상이 맺히고 음악의 홀 깊숙이 갇힌다. 엔야의 음악은 마치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초원 끝에 솟아 있는 눈 덮인 산. 그 사이를 흰색의 유니콘이 달려가는 듯하다.

JBL 스피커는 클래식보다는 재즈나 팝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엔야의 음악은 클래식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데, 묘하게도 JBL이 토해 내는 소리는 엔야의 음악을 한층 잘 표현해 내고 있는 듯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