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어느새 시계는 8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거 가야 하나…….”
김필도는 망설였다.
어디서 사고라도 난 듯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빠져나갈 곳도 없네.”
별수 없이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끼워 넣었다.
엔야의 노래를 들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끝에 10시가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무 늦…….”
“정 회장, 나요.”
시동을 끄고 내리려는데 도청장치에서 장계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차 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풀었다.
“어쩐 일이오?”
이번엔 정중수 목소리였다.
“얼굴 좀 봤으면 해서 말이오.”
“난 볼일이 없소.”
“11년 전 그날 김필도의 여동생을 데려온 사람이 정 회장이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소.”
“이미 지난 일이오.”
“내가 그 사실을 김필도에게 말하면 어떻게 하겠소?”
“난 필도를 대학까지 보내 줬소. 필도가 장 회장의 말을 믿을 거라고 보시오?”
“난 장계상을 믿어, 정 회장.”
김필도는 도청장치를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그가 정중수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11년 전 필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단추 하나가 나왔다. 강간을 당하는 와중에 반항을 하다가 우연히 물어뜯었는지, 아니면 범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일부러 물어뜯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복 단추로 보였던 그것이 필녀의 입에서 나왔고, 유일한 단서였다.
그 단추에 대해서는 경찰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반년 전 정중수의 집에 심부름을 갈 일이 있었다. 그때 그의 집 장롱 속에서 오래된 양복을 발견했다. 그 양복 오른쪽 소매 단추 세 개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단추를 꺼내 맞춰 보았다. 남아 있는 두 개와 같은 단추였고, 뜯겨 나간 실도 같았다.
무려 10년 만에 필녀를 살해한 범인을 찾았지만 김필도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중수가 필녀를 살해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그날 있었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 가고 있다. 필녀가 그렇게 된 날 밤에는 정중수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물론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정 회장과 최 회장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그 어린 계집을 미끼로 사용하려 했다고 하면 그 녀석도 믿을 거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장 회장도 있었다는 걸 필도가 알아차릴 텐데?”
“그래서 대화를 하자는 거 아니오, 정 회장.”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정 회장이 김필도를 포기하면 우린 전쟁을 하지 않고도 공생이 가능할 것 같은데…….”
“김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잔 말이오?”
“그놈 이야기도 있고,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을 것 같소.”
“좋소, 장 회장. 내일 저녁 10시 영흥관에서 보도록 합시다.”
“크큭!”
김필도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도청장치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그는 터미널 인부들이 머무는 건물에 발을 들였다.
“누굴 찾아온 거요?”
문이 열린 사무실 안쪽을 기웃거리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인이 물었다.
“선장을 만나러 왔소.”
김필도는 주머니에서 5만 원 지폐 한 장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지폐를 불빛에 비춰 보던 노인은 김필도의 얼굴을 흘금 쳐다보고는 한쪽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턱수염이 수북하게 긴 중년 사내가 나왔다.
“내가 선장이오.”
중년 사내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요새 바다를 건너려면 얼마나 듭니까?”
“무슨 소리요?”
중년 사내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 이런 사람입니다.”
김필도는 오른손 팔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문신으로 가득 찬 피부가 드러났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멀쩡한 건 손과 발 그리고 얼굴뿐입니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물어도 되겠소?”
“전엔 사시미라고 불렸고, 지금은 학사라고 불립니다.”
“대, 대불파의 학사셨군요.”
중년 사내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대불파가 아니고 대불종합개발입니다.”
“일본까지 가는 데는 4천입니다.”
“필리핀은요?”
“필리핀 역시 같은 금액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갑니까?”
“배로 먼저 공해로 나간 다음 필리핀으로 가는 선박으로 갈아타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가실 겁니까?”
“아는 사람입니다. 준비는 언제쯤 되겠습니까?”
“배는 3일 후에 떠납니다. 연안부두로 오셔서 이 번호로 전화를 하십시오. 금액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4천입니다.”
사내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선장께서 직접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계약금을 드리겠습니다.”
김필도는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중년 사내는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5만 원권 네 다발이 들어 있었다.
“시원시원하시군요.”
선장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돈다발을 손바닥에 대고 툭툭 쳤다.
“그럼 부탁하겠소.”
김필도는 선장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벨이 울리자 박두칠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었다. 액정 화면에 최 회장이라고 뜬 것이었다.
“접니다, 회장님!”
“지금 어디냐?”
“인천 컨테이너 터미널입니다.”
“김필도는?”
“차는 이곳에 두고 누군가를 만나러 갔습니다.”
“정리해.”
“완전 제겁니까?”
“증거 남기지 마!”
“알겠습니다, 회장님!”
박두칠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뒤편에 앉은 자들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조장들이었다.
“제거 명령입니까?”
오른편 사내가 물었다.
“증거 남기지 말랜다.”
“알겠습니다, 형님!”
두 사람은 낮게 소리치고는 차에서 내렸다.
박두칠이 타고 있던 에쿠스 뒤편 컨테이너 옆에는 승합차 5대가 대기 중이었다.
두 사람이 승합차 앞으로 가자 문이 열렸다.
“놈을 묻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형님!”
정장을 갖춰 입은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방망이와 골프클럽, 체인 그리고 40센티미터가량 되는 도가 들려 있었다.
“놈은 사시미란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칼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걸 명심해라!”
덩치가 큰 조장은 조원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며 말했다.
“네!”
덩치들은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차를 끌고 가서 놈이 도망칠 곳을 막아!”
“알겠습니다.”
조장의 말을 들은 조원들은 곧 승합차를 몰고 흩어졌다. 그들은 김필도의 차와 30미터 떨어진 곳에 승합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차를 향해 가던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갑자기 머리가 쭈뼛 서며 소름이 돋았다.
살아온 세월은 얼마 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경험은 몇 번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놈들이 나타났다.
‘입고 오길 잘했네.’
김필도는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치며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를 10여 미터 남겨두고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키가 만져졌다. 잠시 키를 더듬던 그는 한편을 눌렀다.
트렁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김필도는 좌우를 살피며 열린 트렁크를 향해 걸어갔다.
파앗!
바로 그때였다.
강한 빛줄기가 김필도를 덮쳤다. 어둠을 뚫고 직진하는 빛줄기의 정체는 승합차 전조등이었다.
파악!
김필도는 쏜살같이 트렁크를 향해 뛰었다.
“묻어!”
그가 트렁크 앞에 선 순간 박두칠은 차갑게 소리쳤다.
탁탁탁! 타탁탁탁!
주위에 있던 덩치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김필도를 향해 내달렸다.
그때 김필도는 트렁크에서 기다란 물체를 꺼냈다. 그것은 집에서 가져온 일본도였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소도를 오른편 허리띠 사이로 찔러 넣었다.
“차앗!”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서늘한 느낌이 왔다. 김필도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콰앙!
야구방망이가 자동차의 트렁크를 후려쳤다. 상체를 일으킨 김필도는 덩치의 무릎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도를 뽑지 않고 도집째 후려쳤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아니, 어디를 쳐야 상대가 불능이 된다는 사실을 김필도는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퍼억!
덩치의 무릎에서 섬뜩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악!”
덩치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오른편 무릎이 박살나 버린 것이었다.
스악!
또다시 바람 소리와 더불어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김필도는 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앙!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것은 골프클럽이었다. 김필도는 오른손을 강하게 쳐 올려 골프클럽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사내의 갈비뼈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도집은 검은색이었다. 표면에는 옻칠이 돼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흰색의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재질은 쇠다.
쇠로 만든 물건이 6백여 년간 녹이 슬지 않고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이다. 즉 명도란 의미다.
퍼억!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컥!”
덩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김필도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덩치의 턱을 향해 머리를 박아 넣었다.
퍼억!
“커억!”
순식간에 십여 개의 이가 나간 사내는 비명과 함께 벌러덩 넘어갔다. 사내의 입 주위는 피로 범벅이었다.
김필도는 재빨리 차를 등지고 섰다. 차가 있으면 그나마 뒤가 보호되기 때문이었다.
차앗!
또다시 강한 기합과 함께 덩치 두 명이 달려왔다. 오른편에 있는 자는 쇠파이프를, 왼편에 있는 자는 체인을 들고 있었다.
휘익!
먼저 공격해 온 무기는 체인이었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퍼억!
체인은 차 측면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이런 개호로새끼! 리스가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김필도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차가운 광채를 뿌려댔다. 그는 왼손으로 체인을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덩치의 머리를 향해 도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퍼억!
퍽!
“커억!”
동시에 두 번의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비명을 내지른 자는 머리가 깨진 덩치뿐이었다. 다른 덩치의 쇠파이프가 어깨를 찍었지만 김필도의 입에서는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날 찍었다 이거지!”
김필도는 미소를 베어 물며 도를 쭉쭉 찔러 넣었다. 도는 빠른 속도로 쏘아져 가더니 덩치의 턱에 꽂혔다.
퍽!
“억!”
나직한 비명과 함께 덩치의 동체가 뒤로 넘어갔다. 한순간에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퍽!
바로 그때였다. 강한 충격이 머리에서 느껴지더니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김필도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차 위로 올라가 공격을 한 모양이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빠르게 달려드는 덩치의 모습이 보였다. 놈의 손에서 새하얀 광채를 뿌리는 그것은 사시미라고 불리는 회칼이었다.
과거 김필도가 대학을 가기 전에 사용하던 무기이기도 했다.
김필도는 도를 번쩍 들어 올렸다.
퍼억!
바로 그때 그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강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머리를 쳤던 자가 다시 공격을 해 온 것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통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썅!”
뼈가 부러지면서 오는 고통에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와 동시에 왼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는 왼편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됐다.
회칼을 든 자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지만 놈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김필도는 자세를 낮추면서 덩치의 무릎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