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왕수근이 움직이자 강도남을 비롯한 형사들이 일제히 체육공원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들이 왕수근이 체육공원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이보경이 가진 무전기 때문이었다. 제압된 순간 들고 있던 무전기를 김필도의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10분 후 왕수근의 차는 BMW750이 주차돼 있는 체육공원에 도착했다. 김필도의 차 주위에는 윤두상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 옆으로. 이 차 뒷문이 내 차 조수석 문과 나란하도록 세우면 돼.”
김필도가 말했다.
“도망칠 곳은 없다, 김필도.”
왕수근은 차를 몰고 가며 말했다.
“함께 가자고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내려가서 내 차 조수석 문을 열어 놓고 이 차 문도 열어. 그리고 이 차 시동은 끄지 말고.”
차가 멈추자 김필도는 말했다.
남덕선은 자동차에서 내려 BMW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김필도와 이보경이 타고 있는 차 문을 열었다.
“저쪽으로 가!”
김필도는 강도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남덕선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김필도, 그녀를 놔줘라!”
강도남은 권총으로 김필도를 겨냥하며 소리쳤다.
“댁이 책임자?”
“인천 중부 경찰서 형사계장 강도남이다.”
“이름이 참 멋지군요. 나 이 아가씨와 함께 내 차로 건너가고 싶은데 권총은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는 게 어때요? 50미터 정도면 되겠는데.”
“김필도, 도망치지 못한다.”
“내가 셋을 세고 난 다음엔 권총 방아쇠를 당겨도 상관없어요. 하나!”
김필도는 수를 셌다.
“권총을 내려놓고 물러나!”
강도남은 형사들에게 소리치고는 권총을 내려놓았다. 형사들이 50미터가량 물러나자 김필도는 이보경과 함께 그의 차량에 올랐다.
“운전은 할 줄 알지?”
“나보고 하란 말이에요?”
“난 이걸 쥐고 있어야 하잖아. 시동은 거기 버튼을 누르면 돼.”
김필도는 도(刀)를 슬쩍 들어 올렸다.
“날 죽일 건가요?”
이보경은 시동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곧 시동이 걸렸다.
“난 이유 없는 살인은 하진 않았어. 컨테이너 터미널의 그놈들은 날 죽이려고 했고, 영흥관의 그 녀석들은 정중수 일행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거든.”
“그렇다고 살인을 했다는 게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살인을 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냐. 내가 95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난 다만 아가씨를 죽일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싶을 뿐이야. 출발해.”
“어디로 가죠?”
“일단 직진. 그리고 가는데 조건이 있어. 속도계는 1백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도록 해.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네 목을 친 다음 내가 운전할 거야.”
“아, 알았어요.”
이보경은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갔다.
“서둘러!”
강도남은 조금 전 자리로 뛰어가 총을 주워 들고는 차로 내달렸다. 강도남 일행이 승합차에 오르는 그 순간 성남 중부 경찰서 형사들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탔다.
“키!”
승합차에 오른 강도남은 윤두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두상이 키를 건네주자 곧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삐뽀! 삐뽀! 삐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승합차를 비롯한 세 대의 승용차가 BMW를 쫓아 내달렸다.
“어디로 간 거지?”
강도남은 가속페달을 최대한 눌러 밟았다.
“제2경인고속도로를 탔습니다.”
“다시 인천으로 간다고?”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댁 동생을 살해했나요?”
그때 무전기에서 이보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생이었다면 복수를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럼?”
“내가 가자고 해서 데리고 나왔어.”
“함께 고아원이 있었어요?”
“원장 놈이 수시로 목욕을 시켰어. 다른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목욕을 거의 사흘에 한 번씩 시켰지. 물론 그놈도 발가벗은 채였고.”
“그, 그래서 데리고 도망친 거예요?”
“반드시 돈을 벌어 부자가 되자고 필돈이라고 이름을 지었어. 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김’씨를 썼고. 그런데 그 아이가 필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김필도가 된 거야. 그리고 필녀는 필도의 여자라는 뜻이고.”
“당신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원장 놈의 노리개가 됐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기는 했겠지. 사실 우리 같은 것들에게 정조니 순결이나 하는 건 10원의 가치도 없거든.”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발가벗겨지고 성폭행당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 죽은 애를 자살로 판정한 놈이 경찰이었어.”
“그럼 그 경찰은?”
“잘 살고 있겠지 뭐.”
“죽이지 않았다고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왜죠?”
“내가 복수를 할 수 있게 해 줬잖아.”
“동생의 복수를 한 대가치곤 너무 크게 치르는 거 아닌가요?”
“원래 인천의 그놈들은 없앨 생각이 없었어.”
“그들이 당신을 없애려고 쫓아왔단 말인가요?”
“맞아.”
“그들을 없앨 실력이면 도망칠 수도 있지 않았나요?”
“어디로?”
“……!”
이보경은 할 말이 없었다.
조폭들의 세계. 그건 이보경도 잘 알고 있다. 김필도의 말처럼 이미 표적이 됐다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에게 살인은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목숨만큼 사랑했던 그 아가씨가 지금 상황을 원할 거라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나도 망치고 말았지만 후회하진 않아.”
“나다, 이 형사!”
바로 그때 김필도의 주머니에서 강도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봐라? 대단한 아가씨네?”
김필도는 이보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형사예요.”
“투철한 직업 정신이네. 아무튼 아가씬 나중에 이런 차를 타게 될 것 같아.”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무전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버튼을 눌렀다.
“왜 그러쇼?”
“소행성이 떨어지고 있다, 김필도! 계속 가면 소행성이 네 차를 덮치게 될지도 모른다.”
“소행성?”
김필도는 전면 유리 너머로 하늘을 보았다. 강도남의 말처럼 시뻘건 불덩어리 하나가 지상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멈춰라, 김필도. 계속 가면 둘 다 죽는다!”
강도남은 고함을 내질렀다.
“멈춰, 아가씨!”
김필도는 짧게 소리쳤다.
끼이익!
이보경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려.”
“보내 주는 거예요?”
이보경은 굳은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김필도의 허리 뒤쪽에 권총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리라고 해 놓고 권총으로 쏴 버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아가씨를 죽여서 얻을 게 없잖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내려. 그리고 이거 가져가고.”
김필도는 권총을 내밀었다.
“내가 권총으로 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이보경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렇게 하든지.”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설풍과 소도를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런 다음 음악을 틀었다. 전날 밤에 넣어두었던 에미넴 시디였다.
그는 3번 트랙 Stan이 아닌 2번 트랙 Kill you를 선택했다. 그러고는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엄마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늘 하곤 했지
내 아빠는 악마 같은 인간이라고
아빠는 나를 미워한다고 말했지
그러나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자
엄마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
……
김필도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불덩어리는 이제 확연하게 보인다. 앞으로 30초 혹은 40초 안에 떨어질 것 같다. 방향은 정확하게 머리 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보경을 보았다.
“김필……!”
부아앙!
BMW750이 포효하며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김필도는 속도계로 힐끔 보았다. 바늘은 어느새 250을 가리킨다.
최고 속도다.
미친 듯이 달렸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하하하!
스피커에서는 에미넴이 쉬지 않고 욕을 해댄다.
텍사스 전기톱으로 뇌수를 빼내지
머리는 목에 달랑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어
피, 내장, 총, 상처
칼, 삶, 아내, 수녀, 창녀
-난 너다. 루시안!
바로 그때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파노라마 선루프를 열었다.
크루즈컨트롤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의자 등받이를 뒤로 눕힌다. 무릎에 올려 두었던 두 자루의 도를 오른손으로 쥐고 선루프 사이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강한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퀸다.
“난 너다. 루시안!”
김필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던 거대한 불덩어리가 김필도가 타고 있는 BMW를 덮쳤다. 그리고 활짝 편 김필도의 왼손에서 푸른 광채가 솟아 나왔다.
제5장 추방자들의 땅
비록 24년의 짧은 삶이었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없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렸다. 그 정도면 족하다.
고아 주제에 대학까지 나오고 부족함 없이 살았으면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까. 혹자는 그래 봐야 조폭 아니냐고 하겠지만.
하지만 비빌 언덕 하나 없는 고아는 조폭으로 성공하는 것조차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나름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닌 모양이다.
“명줄도 더럽게 기네.”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빛의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푸른 광채가 위쪽으로 쏘아져 올라간다. 빛으로 담을 만들어 놓은 듯한 이곳은 마법진 안이다.
“여기 있던 녀석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였는데… 흡!”
김필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다름 아닌 그였다.
머릿속에는 김필도로 살았던 삶과 루시안의 삶이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동영상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난 너다 루시안
문득 루시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녀석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복창하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누가 설명 좀…….”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궁금증을 갖는 순간 머릿속에서 대답이 떠오른다. 마치 컴퓨터가 자동으로 동영상을 불러오는 것처럼.
이름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작위는 황제 다음으로 높다는 대공이다.
물론 문서상 그렇다는 뜻이다.
영지는 없다.
황제는 대공 작위를 하사하면서 문 대륙에 다녀오면 영지를 마련해 놓겠다고 했다.
추방자의 대륙이라 불리는 이곳으로 온 목적은 구멍 난 차원의 벽 보수와 하만티움 채광이다.
하만티움은 이곳에서만 나는 최고 질의 마정석이다.
그 일을 시킨 사람은 물론 황제다.
제국을 떠나 차원의 벽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왔고, 발을 디딘 지 사흘 만에 독에 중독돼 낭떠러지로 던져졌다.
물론 검에 찔려 확인사살까지 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낭떠러지 아래쪽에 호수가 있어 죽지 않았다.
호수 주위에 다섯 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루시안을 구했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다섯 명은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1만 년 이상을 산 고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