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만 년 이상 살아왔다면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다섯 명이 힘을 합쳐야 차원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무려 3천 년 동안 문 대륙에서 살았다는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루시안은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튼 그들이 루시안을 구한 것은 ‘맹약의 구슬’이라고 부르는 5개의 구슬 때문이다.
‘맹약의 구슬’은 드래곤들이 성룡이 된 기념으로 세상으로 하나씩 던지는 구슬을 말한다. 그 구슬을 얻은 자는, 구슬의 주인인 드래곤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고, 드래곤은 들어줘야 한다는 맹약이 들어 있다.
용언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다.
루시안은 그 구슬을 가지고 치료를 요구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으로 치료하기엔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러자 루시안은 그의 도플갱어를 찾아 달라고 요구했다.
루시안이 그의 도플갱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제국에 있을 때 우연히 만났던 무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반쪽의 영혼을 가진 자가 존재한다고 하였고, 조만간 하나로 합쳐질 거라고 예언했다.
사실 루시안이 드래곤들에게 도플갱어 이야기를 꺼낸 건 그냥 찔러 본 것에 불과했다.
가족이 있다면 그들을 돌봐 달라고 했겠지만 루시안은 고아였다. 대부분 격리된 채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목숨을 구해 달라는 것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도플갱어를 찾아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차원 마법을 펼쳐 도플갱어를 찾아냈다. 미티어 스웜 마법을 펼치고, 유성에 차원 이동 마법을 심는 모든 작업은 마법진 안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본체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섯 고룡의 힘은 엄청났다. 그들은 결국 소환 마법에 성공했다.
우웅!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직한 울림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튼처럼 쳐져 있던 푸른 광채가 사그라지고 주위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김필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브 후드를 눌러쓴 자였다. 후드가 워낙 커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네 명은…….”
“소멸됐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후드 안에서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떨림이 일었다.
“나는 요른 다무르 에단베르 일리케 폰 크레디아다!”
노인은 김필도를 빤히 보았다.
로브 후두 안에서 은빛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노인의 눈빛이었다.
김필도는 움찔했다. 마치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 난 학사 사시미 김필돕니다.”
다른 뜻이 있어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이름이 너무 길어 비슷하게 맞추는 게 낫겠다 싶어서 급조한 이름일 뿐이었다.
“가급적 뒤에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란 말도 붙여라.”
“어떻게 된 건지 먼저 알고 싶습니다.”
“루시안 말이냐?”
“네.”
“네 머릿속에 있는 걸 믿지 못하는 게냐?”
“누군가가 확인해 주면 더 쉽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너희 둘은 원래 하나였다.”
“도플갱어가 맞단 말이군요.”
“그랬기 때문에 너희 둘은 차원을 넘어 대화가 가능했던 거다. 물론 우리의 마법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지만.”
“그럼 내가 나타나서 그는 소멸된 겁니까?”
“너 때문에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는 독에 중독돼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죽었다?”
“껍데기만 사라졌을 뿐이다.”
“영혼은 여기에 들어 있다는 말이구려.”
김필도는 집게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쳤다.
“네 눈을 봐라.”
김필도는 가지고 있던 설풍을 절반가량 뽑았다.
차원을 넘어 다른 세계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에 있던 도는 그대로 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권총을 이보경에게 주지 않고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도를 뽑아 도면에 얼굴을 비춰 본다.
얼굴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검은 머리도 그대로고 코도 오뚝하고, 도톰한 입술도 그대로다.
다만 한 곳, 눈동자만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다.
김필도는 팔소매를 걷어 보았다. 온몸에 도배했던 문신조차 그대로다.
“훗! 반반이네.”
김필도 절반 루시안 절반.
사실인지 그것까진 모른다. 하지만 불완전했던 두 객체가 하나가 돼 완전체가 됐다는 건 분명했다.
“마음에 드네요.”
김필도는 요른을 보며 말했다.
“쉽게 적응하는구나.”
요른의 눈에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한 존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보통 지금과 같은 경우를 당하면 인간은 패닉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녀석은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유유자적하다.
“원래 잡초는 아무 곳에서나 막 자라잖아요.”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살았던 곳에서는 어렵게 살았다는 뜻이냐?”
“루시안도 그다지 편하게 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리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뿌리가 같으면 비슷한 열매가 열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렇군요.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고대의 방’이다.”
“문 대륙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곳?”
“문 대륙에 대해 아느냐?”
“태초의 땅이라고 불렸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전설에 의하면 신족이라 불리는 천족과, 마족, 인간, 드워프, 엘프, 몬스터가 평화롭게 살았던 유일한 곳이 바로 문 대륙이라고 한다.”
“그 정도면 무릉도원인데?”
“무릉도원은 뭐냐?”
“파라다이스를 말하는 겁니다.”
“파라다이스라…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구나. 맞다, 이곳은 파라다이스였다. 신마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이곳이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한 이유가 전쟁 때문이란 말이군요.”
“무려 1만 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었으니까.”
“1만 년?”
김필도는 처음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1만 년 동안 전쟁을 한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게냐?”
“1만 년이면 얼마나 긴 세월인 줄 아세요?”
“너희 인간도 백 년 동안 전쟁을 치르곤 하지 않느냐?”
“하지만 1만 년은 1백 년의 백 배죠.”
“인간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이겠지만 우리 드래곤 입장에서 보면 일생밖에 되지 않은 세월이다.”
“흠!”
요른의 말이 맞다.
하루살이의 삶과 사람의 삶을 비교할 수 없듯이 인간의 삶과 드래곤의 삶 또한 비교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기록하기조차 힘든 1만 년이 드래곤에게는 일생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무리 일생이라고 해도 1만 년 동안 싸운다는 건 엄청난 거잖습니까.”
“1만 년 동안 전쟁을 한다고 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싸운다는 게 아니지 않느냐. 때론 쉴 때도 있었겠지.”
“하긴 그렇겠죠. 전쟁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허허허! 어린 녀석이 벌써 삶의 이치를 깨달았구나.”
“그래도 워낙 쟁쟁한 자들의 싸움이라 이곳은 완전 박살났겠네요?”
“당연하지. 이곳 문 대륙은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쌈질은 보스끼리의 맞장이 최고라고요.”
“맞장이 뭐냐?”
“대가리 둘이 일대일로 싸우는 거요. 그래서 이기는 자가 몽땅 먹는 거죠.”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구나. 아무튼 수명이 수천 년이고 스스로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천족과 마족은 미친 듯이 1만 년 동안 쌈질을 했다. 그 결과 이곳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추방자들의 땅이 된 거죠?”
“그들은 전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몬스터들을 이용해서 무적의 키메라들을 만들었다.”
“그 키메라들이 변이를 거쳐 새로운 종의 몬스터가 된 거군요.”
“그 바람에 이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추방자의 땅으로 사용된 건가요?”
“그런 셈이다. 각 대륙은 차원의 벽을 세워 문 대륙을 차단했다. 그런 다음 대륙에서 불필요한 자들을 이곳으로 추방했지.”
“루시안도 불필요한 자였을까요?”
“그건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게 아니냐.”
“루시안은 힘도 없고, 재산도 없는, 말 그대로 빈털터리였어요.”
“하지만 너희 인간이 말하는 고결한 피를 가졌겠지.”
“고결한 피라고요?”
“대공 작위를 받을 정도면 최소한 황족이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
“황족은 개뿔이. 혈통을 따지는 건 개밖에 없는데.”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클클클! 인간도 있어, 이놈아.”
“그건 그렇고 이제 여기에 대해 말해 주셔야죠.”
“나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외부에 비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걸로 봤을 때 훈련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해 봤지.”
“시간이 빨리 흘러요?”
“이곳 1년은 외부의 1달과 같다.”
“10년을 보낸다고 해도 실제로는 10개월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왜 이런 장소를 만들었을까요?”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10년 동안 훈련을 시킨다고 해도 밖으로 나가면 10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신병 훈련장으로는 그보다 좋은 장소가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얼굴은 폭삭 늙어서 나가겠네요.”
“마법 공간에서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긴 공간은 그대로고 시간만 흐르는 곳이니까.”
“마법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이네요?”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일리가 있네요. 그럼 여긴 신마 전쟁 때 신족이나 마족의 훈련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군요.”
“시간이 늦게 흐르고 마나 밀도가 10배 높다는 사실로 추론해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루시안이 내게 전해 준 박투 마법이라는 건 뭐죠?”
“루시안이 아니라 내가 전해 준 마법이다.”
“영감님이 전해 주었다고요?”
“그 녀석은 매개체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는 저기에서 익혔다.”
요른은 안쪽을 가리켰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요른이 가리킨 안쪽에는 마법등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성인 몸통보다 더 두꺼운 기둥 다섯 개가 펜터그램 형태를 이루며 서 있었다.
김필도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림이네요?”
김필도는 기둥을 가늠해 보았다. 기둥의 높이는 10미터가량. 석재인지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호박색을 띤 기둥의 표면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만티움으로 만들어진 기둥이다.”
“혹시 저 녀석들 때문에 이 공간의 마나 밀도가 높아진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여긴 그림이 없네요?”
김필도는 기둥의 한 면을 가리켰다.
마치 일부러 파 낸 것처럼 지름 8센티미터가량 되는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네 왼손 손바닥에 있는 바람의 속성 마법인 라콰(Laqwa)다.”
“바람의 속성 마법은 스피드와 관련이 있나요?”
“스피드 업은 라콰의 기능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저런 허섭스레기 같은 마법 말고 한 방에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그런 마법을 배우는 방법은 없나요?”
“마법이 어떤 건지 아느냐?”
“당연히 알죠.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왕국 하나 정도는 우습게…….”
“왕국 하나 정도를 박살 낼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40년이 걸리는데 그래도 괜찮다면 가르쳐 주마.”
“그래 봐야 밖으로 나가면 4년밖에 흐르지 않았을 테니까 나쁘지 않은데요?”
대학을 다니는 시간과 같으면서도 얻는 건 상상을 초월한다. 36년의 시간을 공짜로 얻는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건 우리가 차원이동 마법을 펼치기 전 상황이다.”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요?”
“차원이동 마법을 펼치기 전에 이곳의 마나 밀도는 지금의 백 배 정도였다.”
다섯 드래곤이 차원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곳을 채우고 있는 마나였다.
“난 천잰데.”
“내가 말한 것도 천재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불가능하단 말이네요?”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나친화력을 갖고 태어나야 하고, 어린 시절부터 서클과 심장을 함께 성장시켜야 하지. 즉 심장을 감싼 서클이 자신의 일부라는 걸 인식해야 부작용이 없다는 말이다. 너처럼 몸과 마음이 다 큰 상태에서 마법을 시작하면 부작용 때문에 3클래스 이상은 익힐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어린아이보다 더 못해.”
“왜죠?”
“마법은 절대적인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완벽하게 익힐 수 없기 때문이지.”
“난 마법을 믿습니다, 영감님.”
“하지만 어린아이만큼은 강한 믿음은 아니질 않느냐.”
“믿음이 강할수록 마법이 강해진다는 말이군요.”
“강한 믿음이 기적을 불러온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다.”
“하지만 이것도 마법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김필도는 왼손 손바닥의 마법진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