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와서는 목욕은 물론이고 세수를 해 본 적도 없다. 비록 고대의 방이 마법으로 만들어진 장소고 외부 시간으로 따지면 5개월에 불과하지만 김필도가 느끼는 시간은 5년이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씻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자 공연히 온몸이 가려웠다.
어느새 눈앞엔 벌판 끝, 조각처럼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이 버티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뾰쪽하게 솟은 탑처럼 보였던 산은 좌우 폭이 수킬로미터는 될 정도로 넓었다. 물론 높이는 상상할 수가 없다.
산자락 아래로 최소 1백여 미터 높이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높은 곳으로 갈수록 점점 커진다.
잠시 산을 살피던 김필도의 눈이 반짝 빛났다.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지랑이의 모습은 얼음이 녹을 때 나오는 것과 달랐다. 붉은색이 아닌 흰색이었던 것이다.
흰색의 아지랑이를 보자 공연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김필도는 아지랑이를 좇아 내달렸다.
캬우우!
바로 그때였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이곳까지 오면서 몬스터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울음소리는 비로소 아주 위험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목욕은 포기해야겠네.”
김필도는 아쉬운 얼굴로 수증기인지 안개인지 모르는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보았다.
캬우우!
“얼라리?”
김필도는 황당했다.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두려운 느낌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느낌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분명 김필도 그의 감정은 아니었다.
대불파의 이인자였던 사시미 김필도가, 무려 95명이 넘는 인간을 도살한 김필도가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감정의 정체는 한 가지다.
“드디어 나도 짐승의 경지로 들어선 건가?”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캬우우!
또다시 슬픈 울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구해 달라는 애원이었다.
“미치겠네.”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폭은 조폭답게 살아야 한다는 게 신조처럼 굳어진 생각이다. 즉 착한 일은 조폭이 하지 말아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지금 막 문 대륙에 첫발을 디딘 상황.
공연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캬우우!
“알았어, 인마.”
김필도는 별수 없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필도가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것은 30분쯤 나아갔을 때였다.
“헐! 대박이네.”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5미터 거리를 두고 서 있고, 그 가운데 문제의 생명체가 있었다.
요른으로부터 들은 설명에 의하면 오드였다.
생긴 건 전설의 묘인족, 즉 고양이 인간 모습인데 그 흉포함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였다.
뛰어난 머리, 수백 미터 나무를 순식간에 올라가는 민첩함과, 전투마보다 더 빠른 스피드 그리고 명검에 필적한다는 발톱으로 무장한 오드는 가사 10명과 맞먹는 전투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그런 오드가 눈앞에 있었다.
귀의 위치는 사람과 비슷했지만 생긴 건 고양이 귀를 닮았다. 눈동자는 오른편은 초록색이고 왼편은 하늘색인 오드아이이다. 키는 2미터가량이고 키와 비슷한 길이의 꼬리가 나 있다. 체형은 인간과 흡사하다. 문제는 인간의 몸보다 더 멋진 몸매를 가진 오드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있어라. 휴대전화가 어디 있을 텐데… 오픈!”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저런 멋진 장면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오드에 초점을 맞추며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카메라는 켜지지 않았다.
“?”
김필도는 휴대전화 버턴을 여기저기 눌러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어 보인다. 액정에 불도 들어와 있고, 배터리도 완전 충전상태다. 다만 안테나 바는 뜨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버튼은 먹통이다.
“어?”
문득 이곳에 온지 5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성능 좋은 휴대전화라고 해도 배터리가 5개월 동안 유지될 수는 없다.
“이건?”
김필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휴대전화의 시계가 6월23일 12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12시40분에 멈춰 있었다.
이번엔 브레게 손목시계를 꺼냈다.
손목시계 또한 6월23일 12시40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겠네.”
6월23일 12시40분이면 운석과 충돌한 시간이 분명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도 현실이고 덫에 걸린 오드도 현실이다.
결코 꿈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아공간을 열어 휴대전화와 손목시계를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오드를 살폈다.
덫은 오드의 가슴을 조이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나온 걸 보면 안쪽에 가시 같은 날카로운 뭔가가 튀어나온 게 분명했다.
“그럼 열심히 눈 사진을 찍는 수밖에.”
김필도는 그 자리에 앉아 오드를 감상했다.
“총각 가슴에 불을 지르는구나. 기냥 죽여줘요~.”
김필도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드의 몸매는 그만큼 대단했다.
조폭 생활을 했으니 룸살롱은 수시로 들락거렸고,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의 몸을 지겹도록 보았다.
하지만 단연코 눈앞의 오드에게는 게임이 안 된다. 아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풍만한 엘프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오드의 몸매는 엄청났다.
캬우우!
김필도를 발견한 오드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울었다.
“구해 달라는 거냐?”
김필도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오드는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날 공격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구해 주마.”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드는 말없이 구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이제 나도 대공이니까.”
김필도는 오드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오드의 상태가 명확하게 보였다. 덫은 가슴 위에 끼워져 있었다. 마치 손오공의 머리에 끼운 금고아처럼 단단하게 조이고 있는 듯 가슴살이 덫 옆으로 비어져 나와 있다.
그리고 덫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김필도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피를 많이 흘려 힘을 잃은 듯 오드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덫은 폭 15센티미터, 두께 10센티미터로 마나를 다루는 검사가 아니면 잘라내기 힘들 정도로 두꺼웠다. 120도 간격으로 붙어 있는 쇠사슬은 좌우측 나무에 묶여 있었다.
“먹혀야 할 텐데.”
김필도는 덫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언락(Unlock)!”
그는 기초 마법인 언락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상당히 강한 마법사가 만든 듯 덫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법은 안 될 것 같고, 여길 잘라야 하겠다.”
김필도는 오드의 가슴골을 가리켰다.
다른 곳은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도로 잘라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네 가슴이 커서 칼질이라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할래?”
김필도는 소도를 뽑으며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한 건 아니었다.
“살고 싶으면 똑바로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히면 돼.”
김필도는 오드가 취해야 할 자세를 직접 해 보였다.
오드는 생각이 많은 듯 복잡한 눈빛으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오드는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사람도 아닌 몬스터 알몸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를 줄은 정말 몰랐다.”
김필도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오드의 가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바람은 세월을 가른다, 라콰(Laqwa)!”
번쩍!
그의 소도가 새하얀 광채를 토해냈다.
새하얀 광채가 오드의 가슴에서 폭발하고, 덫은 일거에 잘려 나갔다.
캬우우!
덫이 잘려 나가면서 상처를 건드린 듯 오드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했다.
“기다려!”
김필도는 도를 원래 자리에 넣고, 오드의 가슴을 조이고 있던 덫을 제거했다. 역시 예상대로 덫 안쪽에는 5센티미터가량 되는 칼날이 솟아 나와 있었다.
퍼억!
캬우!
덫이 제거되자마자 오드는 김필도를 쳐 넘어뜨리고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구해 줬으면 고맙단 말이나 하고 갈 것이지는.”
김필도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예술이네.”
빠르게 달려가는 오드를 보며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엄청난 스피드를 가졌다는 말이 맞았다. 오드는 금세 김필도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 씻고 가야겠다.”
김필도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걸었다.
가까운 듯 보였던 그곳에 도착하는 덴 무려 1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힘들게 온 보람은 있었다.
폭이 10미터가량 되는 온천이 수증기를 벌컥벌컥 토해 내고 있었다.
김필도는 옷을 벗어 던지고는 온천으로 들어갔다.
물 온도는 적당했다. 그는 아공간을 열어 세면도구들을 꺼냈다.
먼지로 떡 져 있는 머리를 감고, 몸도 씻고, 턱수염을 밀었다. 그런 다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영화 속 주인공이다. 수십 명을 죽이고 차원이동을 하고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개연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지만 비주얼은 제법 봐 줄 만한 B급 판타지 영화.
“뭐 그럼 어때서.”
김필도는 픽 웃었다.
첨벙!
바로 그때였다. 그가 앉아 있는 온천 건너편에서 뭔가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눈을 떴다.
“엥?”
그는 황당한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
물로 떨어진 은발 여자는 1시간 전에 구해 주었던 그 오드였다. 오드가 떨어진 곳에는 핏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물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이미 기절한 듯했다.
“구해 줬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다시 찾아와서 A/S까지 요구하는 건 또 뭐냐? 하긴, 내가 한 인물 한다마는.”
김필도는 혀를 차며 오드 곁으로 갔다.
오드의 머리채를 잡고 원래 자리로 온 그는 오드를 똑바로 앉혔다. 예상대로 오드는 기절한 상태였다.
“어?”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오드의 가슴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오드가 찾아온 건 A/S 때문이 아니었다. 이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상처가 낫는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공호흡은 구강 대 구강법이 최고라고 하던데, 쩝!”
상처가 나아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오드를 바라보며 김필도는 입맛을 다셨다.
“아서라, 대공의 체통이 있지, 어찌 오드와.”
김필도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고는 아공간을 열었다.
맨 먼저 손이 닿는 곳엔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김필도의 필수품, 아니 조폭의 필수품인 구급약 상자였다. 보기엔 붉은색 십자가 표시가 돼 있는 평범한 구급약 상자 같지만 내용물은 완전히 달랐다.
전에는 일반 붕대, 압박붕대, 소독약, 빨간약, 진통제, 스프레이 파스, 소화제 등을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지금 구급약 상자 안에는 파란색의 작은 물병만 잔뜩 들어 있다. 일명 포션이라고 부르는 만병통치약이다.
김필도는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오드의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볼을 눌러 입을 벌리고는 포션을 부었다. 푸른색 액체는 오드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오드를 연못 가장자리에 기대 앉히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언뜻 잠이 들고 말았다.
김필도가 다시 잠이 깬 것은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옆을 보았다. 하늘색과 초록색 눈동자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오드였다.
오드의 눈동자는 왜 나를 구해 주었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두 가지 이유야. 첫째는 지금까지 내가 본 여자들 중 가장 죽이는 가슴과 엉덩이를 가졌다는 거야.”
김필도는 오드의 가슴을 턱으로 가리켰다.
덫 안쪽의 칼날에 입었던 상처는 다 나아 흉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캬우!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오늘이 내가 문 대륙에 첫발을 디디는 날이라는 거야. 너희들도 그렇겠지만 원래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가급적이면 부정 타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나도 그래. 원래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야 하는데 돼지 머리나 떡을 구할 방법도 없고, 그래서 착한 일로 대신한 거야.”
김필도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